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은 1939년 유럽 순회공연에서 자신이 주연한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8)>를 상연했다. 217일 금요일 밤 9, 파리의 센 강변 트로카데로 정원(Jardins de Trocadéro)에 인접한 <살드예나(salle d'Iéna)> 극장에서였다.

 

2017년 여름 최승희 선생의 파리공연을 조사하던 중 나는 이 영화 상연을 보도한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르땅(Le Temps)>을 비롯한 파리의 6개 일간지가 이 사실을 보도했고, <랭트랑지장(L'Intransigeant)>은 간단한 비평도 게재했다. 이는 예상치 못한 발견이었는데, 이 취재를 위해 예습을 꽤 했었지만, 이 영화의 유럽 상연에 대한 연구는 전혀 없었고, 8권에 달하는 최승희 평전들도 이를 언급한 바 없었기 때문이다.

 

최승희 선생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8)>가 상연되었던 파리의 <살 드예나> 극장.

 

무대 예술가인 최승희가 영상에 등장하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무용가가 극영화에 출연한 것은 본인이나 관객에게 의미 있는 일이었을 것이고, 특히 그런 영화를 자신의 순회공연 중에 상연한 데에는 특별한 의도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비록 80년쯤 늦기는 했으나, 이글은 최승희의 그 특별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찾아보기 위한 시도이다.

 

최승희는 평생 3편의 무용영화를 촬영했다. 해방 전의 <반도의 무희(1936)><대금강산보(1938)>, 해방 후의 <사도성 이야기(1956)>였다. 그밖에도 <백만인의 합창(1935)>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그대와 나(1941)>에도 출연 교섭을 받았으나 고사한 바 있었다.

 

해방 후 <춘향전(1948)><반야월성곡(1949)>, <맑은 하늘 아래서(1955)> 등의 무용극이 영화화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최승희의 북한시절 활동에 정통한 이애순(2002)과 김채원(2008)의 책에 따르면, 영화화된 작품은 <사도성 이야기>뿐이었다.

 

더구나 <사도성 이야기>는 컬러영화였으므로 최승희의 무용영화라는 무용사적 의미와 함께, 북한 최초의 컬러영화라는 영화사적 의미도 갖는다. 참고로,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는 안창호 선생의 아들 안철영 감독의 <무궁화동산(1949)>과 홍성기 감독의 <여성일기(1949)>였다.

 

그러나 한국영화사에서는 <대금강산보>가 낯설다. 인기있는 미인 예술가 최승희 주연의 나름 인기 있던 영화였지만, 다른 배역이 모두 일본인이었고, 언어도 일본어였을 뿐 아니라, 제작자도 일본 영화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금강산보>는 이경손이나 나운규 감독의 무성영화나 문예봉이나 김일송이 출연한 한국 영화들과 나란히 언급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본 오사카의 <타이센칸(大山館)>에서 발행한 <대금강산보>의 홍보 전단

 

<대금강산보>는 일본 영화사에서도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 일본 영화 데이터베이스에는 <대금강산보>의 기초정보가 등재되어 있지만, 연구 대상이 되기는커녕 일본 영화사 저술이나 자료집에서도 다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본영화테레비전 프로듀서협회가 편찬한 <프로그램영화사: 다이쇼에서 이차대전까지(プログラム映畵史: 大正から戰中まで, 1978)>라는 책에는 <백만인의 합창>의 포스터가 실려 있지만, <반도의 무희><대금강산보>는 자료 제시는커녕 언급조차 없다. <백만인의 합창>의 출연자 명단에도 최승희의 이름은 올라있지 않았다.

 

최승희의 무용영화들이 한국과 일본의 영화사에서 외면당한 것은 해방 이후 계속된 이데올로기적 격동 때문이다. 일제의 패전으로 최승희는 더 이상 일본 신민이 아니었지만, 북한에서 활동하게 됨에 따라 한국과 일본에서는 그의 행적과 업적이 폄하되거나 잊혀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의 제작과 배급, 특히 해외 상연 과정을 자세히 살폈다. 영화의 내용과 성격을 살피는 한편, 이에 출연하고 상연했던 최승희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 계기로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가 재조명되고 남,북한과 일본 영화사에서 조금 더 활발하게 논의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연구의 주요 자료는 2017년 필자의 최승희 유럽 순회공연 취재를 통해 발굴되었다. 이 취재는 <후암재단>의 재정지원으로 이뤄졌음을 밝히며, 고 차길진 회장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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