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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20210301-명치학원대학-국제학연구-58-오키노 이와사부로沖野岩三郎문고의 안중근 그림엽서 by 아키즈키秋月望노조미-31-43

沖野岩三郎文庫安重根絵葉書 by 秋月望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의 안중근 그림엽서 by 아키즈키 노조미

 

はじめに 서론

明治学院大学図書館沖野岩三郎文庫ハルビン駅頭伊藤博文暗殺した安重根絵葉書所蔵されている切断した左手薬指せるポーズの写真上部漢詩まれ下部英文キャプションが印刷された絵葉書である

메이지가쿠인대학 도서관의 오키노 이와사부로(沖野岩三郎) 문고에는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 그림엽서가 소장돼 있다. 절단한 왼손 약지를 보여주는 포즈의 사진 상단에 한시가 쓰여 있고 하단에 영문 캡션이 인쇄된 그림엽서이다.

 

 

1967 刊行された書物1めて紹介されその後韓国日本論文やシンポジウムでもげられており2),韓国のテレビ何度取材してドキュメンタリーの放映している3)。

1967년에 간행된 책(1)에 처음 소개되었고, 그 후 한국이나 일본의 논문이나 심포지엄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으며,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국도 몇 번인가 취재해 다큐멘터리에서 방영하고 있다(3).

 

しかしこの絵葉書由来については詳細検討はなされておらずにテレビ放映には根拠のない推論られる本稿ではこの絵葉書についてこの絵葉書作成されるに過程沖野岩三郎手許されていた経緯について関係資料提示しつつ検証する

그러나, 이 그림엽서의 유래에 대해서는 상세한 검토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텔레비전 방영 중에는 근거가 없는 추론도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 그림엽서에 대해 이 그림엽서가 작성되기에 이르는 과정과 오키노 이와사부로의 손아귀에 남아 있었던 경위에 대해 관련 자료를 제시하면서 검증한다.

 

沖野文庫書簡類

오키노 문고의 서간류

 

沖野岩三郎1876年和歌山県日高郡寒川村まれた役場書記山林労働者などを1890 和歌山師範学校入学卒業後小学校教員となり寒川小学校校長めた1901 受洗してクリスチャンとなり1904 上京して9 明治学院神学部入学した明治学院在学中同期入学賀川豊彦らと日露戦争反対して非戦論主張した1907 卒業同時和歌山県日本基督教会新宮教会牧師となり新宮在住医師社会運動家大石誠之助らと親交んだ1910大逆事件まれるが沖野ういところで逮捕れた1917大逆事件をテーマに執筆した小説宿命大阪朝日新聞懸賞小説入選以後文筆活動小説童話評論随筆紀行など数多くの作品発表した4)。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1876년 와카야마현 히다카군(日高郡) 사무카와무라(寒川村)에서 태어났다. 동사무소의 서기나 산림 노동자등을 거쳐, 1890년에 와카야마 사범학교에 입학, 졸업 후에는 초등학교 교원이 되어 사무카와(寒川) 초등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1901년에 수세하여 크리스천이 되었고, 1904년에 상경해 9월에 메이지 학원 신학부에 입학했다. 메이지 학원 재학중, 동기 입학의 카가와 토요히코(賀川豊彦)등과 러일 전쟁에 반대해 비전론을 주장했다. 1907년 졸업과 동시에 와카야마현의 일본기독교회 신구교회 목사가 되어 신구(新宮) 거주 의사이자 사회운동가인 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10년의 대역 사건에 휘말리지만, 오키노는 위기에서 체포를 면했다. 1917년에 대역 사건을 테마로 집필한 소설 숙명(宿命)오사카아사히신문의 현상 소설에 입선해, 이후 문필 활동에 들어가, 소설, 동화, 평론, 수필, 기행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4).

 

沖野戦後1952 蔵書28 自著4 原稿書簡などを資料明治学院寄贈したこのうち一般書籍類大学図書館蔵書として閲覧されたが8 つの巻物表装された書簡類特別貴重資料として貴重書庫保管されているこの書簡類については1969 1 図書館内沖野岩三郎寄贈書簡内容紹介作成され1982 11 明治学院大学図書館から刊行された沖野岩三郎文庫目録にそれが再録されている5)。

오키노는, 전후 1952년에, 장서 28상자, 자저 4상자와 원고, 서한등을 포함한 자료를 메이지 학원에 기증했다. 이 중 일반 서적류는 대학 도서관의 장서로서 열람에 제공되었지만, 8개의 두루마리로 표장된 서한류는 특별 귀중 자료로서 귀중 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이 서한류에 대해서는, 19691월에 도서관내에서 오키노 이와사부로 기증서한 내용소개가 작성되어 198211월에 메이지가쿠인 대학교 도서관으로부터 간행된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목록에 그것이 재록되어 있다(5).

 

書簡葉書などを表装した8 巻物それぞれに18 巻数されており6 8には一九一年事件記載されているこのうち6 には沖野岩三郎・ハル夫妻発行していた雑誌サンセット発行発禁わる書類大逆事件裁判関連した控訴申立書弁護士平出修からの書簡崎久保誓一大石誠之助からの書簡葉書などが表装されている8 崎久保誓一大石誠之助から沖野岩三郎にあてた獄中書簡中心である

서한·엽서 등을 표장한 8권의 두루마리는 각각 1~8권의 권수가 기록되어 있고, 6권과 제8권에는 표에 1910년 사건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중 제6권에는 오키노 이와사부로·하루(ハル)부부가 발행하고 있던 잡지 선셋(サンセット)의 발행이나 발금에 관련된 서류, 대역 사건의 재판에 관련된 항소 신청서나 변호사 히라데 오사무(平出修)의 서한, 사키쿠보 세이치(崎久保誓一), 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의 서한, 엽서 등이 표장되어 있다. 8권은 사키쿠보 쇼이치(崎久保誓一), 오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에서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 보낸 옥중 서한이 중심이다.

 

625cm全長1670cmその1040cmあたりに幸徳秋水漢詩かれ英文キャプションのった絵葉書まれている1)。この右側には崎久保誓一1929 から1930にかけて沖野岩三郎った6 葉書られている

6권은 폭 25cm, 전체 길이 1670cm, 1040cm쯤에, 행덕추수(幸徳秋水)의 한시가 쓰여져, 영문 캡션이 들어간 그림엽서가 붙여져 있다(그림 1). 이 오른쪽에는 사키쿠보 쇼이치(崎久保誓一)1929년부터 1930년에 걸쳐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 보낸 6장의 엽서가 붙어 있다.

 

崎久保誓一1911118大逆罪死刑判決けたが翌日天皇特赦無期懲役減刑され秋田刑務所服役して1929仮釈放された巻物のこの部分6 葉書仮釈放後崎久保から沖野られたもので葉書表裏剥離して両面べて表装してあるこの葉書びにられている安重根絵葉書写真面のみが表装されている

사키쿠보 맹세이치는 1911118일에 대역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다음날의 천황 특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아키타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1929년에 가석방되었다. 두루마리의 이 부분 6장의 엽서는 가석방 후에 사키쿠보에서 오키노로 보내진 것으로, 엽서의 앞뒷면을 박리하여 양면을 나란히 표장하였다. 이 엽서의 줄에 붙어 있는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사진면만 표장되어 있다.

 

 

絵葉書左側には,「東京牛込富久町113 大石誠之助から紀伊國新宮町キリスト教会沖野岩三郎られた封筒191116日付獄中にて聖書んだ感想という書簡られている東京牛込富久町113東京監獄住所ここに収監されていた大石誠之助124幸徳秋水らと処刑された大石誠之助から沖野岩三郎られた最後手紙120日付書簡8 最後表装されている

그림엽서 뒤(왼쪽)에는 도쿄 우시고메 도미히사쵸 113 오이시 세이노스케에서 기노쿠니신구쵸 기독교회 오키노 이와사부로앞으로 보낸 봉투와 191116일자 옥중에서 성경을 읽은 소감이라는 서한이 붙어 있다. 도쿄 우시고메 토미히사쵸 113은 도쿄 감옥의 주소로, 이곳에 수감되어 있던 오이시 세이노스케는 124일에 코토쿠 아키미즈(幸徳秋水)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오오이시 세이노스케로부터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120일자 서한은, 8권의 마지막에 표장되어 있다.

 

この6 安重根絵葉書については,「沖野岩三郎寄贈書簡内容紹介では,「安重根をたたえる幸徳秋水)」となっているが,「とあるのはりである

이 제6권의 안중근 그림엽서에 대해서는 오키노 이와사부로 기증 서한 내용 소개에서는 안중근을 기리는 코토쿠추스이(幸徳秋水)의 시(책 오려내기)라고 되어 있지만, 책 오려내기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この内容紹介作成された1969 より196466 年頃大逆事件資料調査のために沖野岩三郎文庫調べた神崎清がこの絵葉書発見1967 刊行した神崎清この暗黒裁判革命伝説3)』(芳賀書店 1967絵葉書画像掲載していた2)。撮影条件かったためか非常画質いものだが写真右下47との鉛筆6っており沖野岩三郎文庫写真同一のものであることが確認できる

'내용 소개'가 작성된 1969년보다 전인 1964~66년경에 대역 사건의 자료 조사를 위하여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를 조사한 칸자키 기요시(神崎清)가 이 그림엽서를 '발견'하여 1967년에 간행한 칸자키 기요시 '이 암흑 재판(혁명 전설 3)'(하가서점(芳賀書店) 1967)에 그림엽서의 화상을 게재하고 있었다(그림 2). 촬영 조건이 나빴기 때문인지, 매우 화질이 나쁜 것이지만, 사진 오른쪽 아래에 47이라는 연필의 기입(6)이 찍혀 있어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의 사진과 동일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幸徳秋水漢詩とキャプション

코토쿠 추수이의 한시와 캡션

 

1910 6 1 幸徳秋水湯河原逮捕された幸徳秋水はカバンに安重根絵葉書所持していたことがっている

191061일 코토쿠 추수이(幸徳秋水)가 유가와라(湯河原)에서 체포되었을 때 유토쿠 추수이는 가방에 안중근의 그림엽서를 소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大逆事件裁判にあたっては大審院書記手書きで被告たちの押収物についての一覧リストを作成した大逆事件秘密裁判だったためこの押収物リストもしく管理され担当弁護士には公判終了後返却条件謄本貸与されていた弁護士平出修その一部複写物新宮被告家族支援などにあたっていた沖野岩三郎にもっていたという7)。戦後神崎清担当検事のところにっていたその押収物リストを入手してこれに索引けて影印刊行したのが大逆事件記録刊行会証拠物写1964である

대역사건의 재판에 있어서는, 대심원의 서기가 손으로 피고들의 압수물에 관한 일람 리스트를 작성했다. 대역 사건은 비밀재판이었기 때문에, 이 압수물 리스트도 엄격하게 관리되어, 담당의 변호사에게는 공판 종료 후의 반납을 조건으로 등본이 대여되고 있었다. 변호사 히라데 오사무(平出修), 그 일부의 복사물을 만들어, 신구(新宮)에서 피고 가족의 지원 등에 임하고 있던 오키노 이와사부로(沖野岩三郎)에게도 보냈다고 한다(7). 전후 칸자키 기요시(神崎清)가 담당 검사에게 남아 있던 그 압수물 리스트를 입수하여 이것에 색인을 붙여 영인 간행한 것이 대역 사건 기록 간행회 증거물사1964이다.

 

 

その押収物リストに記載されている幸徳秋水逮捕時所持品絵葉書 安重根肖像とある画像部分省略されているが漢詩英文キャプションの文字部分だけが筆写されていた3)。

그 압수물 목록에 나와 있는 행덕추수의 체포시 소지품 중에 그림엽서 안중근의 초상이 있다. 화상 부분은 생략되어 있지만, 한시와 영문 캡션의 문자 부분만이 필사되어 있었다(그림 3).

 

神崎清明治学院大学沖野岩三郎文庫巻物6 から,『証拠物写筆写されていたものと漢詩英文キャプションの絵葉書つけたこれによって沖野岩三郎文庫巻物られているものが幸徳秋水逮捕時押収された絵葉書同種のものと判断したのである

간자키 기요시는 메이지가쿠인대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의 두루마리 제6권에서 증거물사에 필사된 것과 같은 한시와 영문 캡션 그림엽서를 발견했다. 이에 따라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의 두루마리에 붙어 있는 것이 고토쿠추스이가 체포 시에 압수된 그림엽서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漢詩はこのようにかれている

한시는 이렇게 쓰여 있다.

舎生取義 殺身成仁

安君一挙 天地皆振

秋水題

 

してをなす安君一挙天地みな写真下部英文のキャプションはこのようにかれている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 몸을 죽이고 인을 이룬

안군의 거사로, 하늘과 땅이 모두 진동했다.

고 쓰인 사진의 하단 영문 캡션은 이렇게 적혀 있다.

 

JUNG-KEUN AN

The Korean Martyr who killed Prince Ito at Harbin. As seen in this picture, the cut off Ring-Finger of the left hand represents the oath of a regicide, according to the old custom of the Koreans. The characters of the upper corners of the picture is facsimile of the Poem written by D. KOTOKU, a prominent Japanese Anarchist, praising the brave conduct of the martyr.

 

安重根안중근

ハルビンで伊藤公爵暗殺した朝鮮殉教者であるこの写真られるように朝鮮習慣によって切断された左手薬指弑逆宣誓をあらわしている

하얼빈에서 이토 공작을 암살한 조선의 순교자이다. 이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의 오래된 관습에 의해 절단된 왼손 약지는 시해의 선서를 나타내고 있다.

 

写真上部された文字卓越した日本無政府主義者幸徳伝次郎いた漢詩複写殉教者勇敢行動賞賛している。(8

사진의 상부에 기록된 문자는 탁월한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코토쿠 덴지로가 쓴 한시의 복사로 순교자의 용감한 행동을 칭찬하고 있다. (8)

 

神崎清この絵葉書について画像掲載した著書この暗黒裁判には,「明治42 10 26ハルビン駅頭韓国統監伊藤博文をピストルで暗殺した朝鮮人革命家安重根写真サンフランシスコ平民社岡繁樹った絵葉書,「秋水題という署名入りの漢詩印刷してあった」(9した

칸자키 기요시는, 이 그림엽서에 대해서, 화상을 게재한 저서 이 암흑 재판에는, 메이지 421026, 하얼빈 역두에서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암살한 조선인 혁명가 안중근의 사진으로, 샌프란시스코 평민사의 오카 시게키가 만든 그림엽서에, 추수제라고 하는 서명이 들어간 한시가 인쇄되어 있었다(9)라고 적었다.

 

しかし神崎清著書紹介したされた明治学院発行沖野岩三郎寄贈書簡内容紹介にはこの記述内容反映されずとしている神崎清情報明治学院大学図書館わっていなかったか神崎清著書記載見落としたのであろう

그러나, 칸자키 키요시가 저서에서 소개한 후에 나온 메이지 학원 발행의 오키노 이와사부로 기증 서한 내용 소개에는, 이 기술 내용은 반영되지 않고 책의 오려내기라고 하고 있다. 칸자키 기요시의 정보가 메이지가쿠인 대학 도서관에 전해지지 않았던가, 칸자키 기요시의 저서의 기재를 간과했을 것이다.

 

岡繁樹絵葉書見本

오카시게키와 그림엽서 견본

 

神崎清上述のようにこの英文れて印刷したのは岡繁樹だとしているがその根拠されていない

칸자키 기요시는 상술한 바와 같이 이 영문을 넣어 인쇄한 것은 오카시게키라고 하고 있지만, 그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岡繁樹1878 高知県安芸市まれた17 上京して夜学って陸軍士官学校受験したが失敗1899 万朝報入社して記者となったここで幸徳秋水堺利彦木下尚江などとったが主筆松井柏軒って退職せざるをなくなり幸徳秋水堺利彦世話でアメリカにった10)。1902 3 15 横浜サンフランシスコにいたのが4 3 それ以後サンフランシスコで金門印刷所経営しながらサンフランシスコ平民社活動していた11)。

오카시게키(岡繁樹)1878년에 고치현 아키시(安芸市)에서 태어났다. 17세에 상경해 야학에 다니며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했지만 실패. 1899년에 만조보(萬朝報)에 입사해 기자가 되었다. 여기서 코토쿠 아키미즈(幸徳秋水),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키노시타 나오에(木下尚江) 등과 알게 되었지만, 주필인 마츠이 가시와켄(松井柏軒)을 구타해 퇴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코토쿠 아키미즈나 사카이 토시히코의 보살핌으로 미국에 건너갔다(10). 1902315일 요코하마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이 43. 그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금문(金門)인쇄소를 경영하면서, 샌프란시스코 평민사(平民社)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1).

 

1905 筆禍事件禁錮5 けた幸徳秋水刑期えて出獄すると11 14 横浜から伊予丸乗船してサンフランシスコにったサンフランシスコでは同行した幸徳幸衛ともども岡繁樹世話になった4)。ところが翌年4 18 にサンフランシスコ大地震きたそのため幸徳秋水6 5 香港丸乗船して23 横浜らざるをなくなったしかし幸徳幸衛勉強をするために帰国せずそのままサンフランシスコにった12)。こうした関係幸徳秋水帰国後も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との書簡葉書でやりりをしていた

1905년에 필화 사건으로 금고 5개월의 형을 받은 코토쿠 추스이는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자 1114일에 요코하마에서 이요마루(伊予丸)에 승선하여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동행한 조카 코토쿠 코우에(幸徳幸衛)와 친구 오카시게키(岡繁樹)의 신세를 졌다(그림 4). 그런데 이듬해 418일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코토쿠 추스이는 65일에 홍콩환(香港丸)에 승선해 23일에 요코하마에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조카 고토쿠 유키에(幸徳幸衛)는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귀국하지 않고 그대로 샌프란시스코에 남았다(12). 이러한 관계로, 코토쿠 추스이는, 귀국 후에도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岡繁樹)와의 사이에서 서한이나 엽서로 교환을 하고 있었다.

 


そのやり
りの1910 5 月後半岡繁樹から幸徳秋水宛安重根絵葉書見本られていたこの事実上述証拠物写押収記録されている書簡によって確認できる幸徳秋水大石誠之助ててったこの書簡大石誠之助新宮逮捕された押収されたものでこの書簡末尾サンフランシスコの同志った絵葉書見本同封すると幸徳秋水いている

그 교환 속에서 19105월 후반에 오카 시게키로부터 코토쿠 아키스이 앞으로 안중근의 그림엽서의 견본이 보내져 있었다. 이 사실은 상술한 증거물사속의 압수기록에 남아 있는 서한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코토쿠 추스이가 오이시 세이노스케에게 보낸 이 서한은 오이시 세이노스케가 신구에서 체포되었을 때 압수된 것으로, 이 서한의 말미에 샌프란시스코 동지가 만든 그림엽서의 견본을 동봉하자 코토쿠 추스이가 쓰고 있다.

 

封入絵葉書桑港同志って見本をよこしたバクニンとクラボトキンのも出来ている安重根のは日本製のは発売禁止になったからぐやられるだろう

봉입된 그림엽서는 샌프란시스코의 동지가 만들어 견본을 보낸 것 외에 바쿠닌과 크라보토킨도 되어 있다, 안중근의 것은 발매 금지되었으니, 이것도 곧 당할 것이다.

 

幸徳秋水湯河原逮捕されたのは1910 61 であった和歌山新宮では6 3 日早朝から幸徳秋水関係者住居家宅捜索されたこの時点では幸徳秋水らの逮捕はまだじられておらず4 になって大阪毎日新聞幸徳秋水逮捕記事ったそして6 5 大石誠之助逮捕された沖野岩三郎3 家宅捜索けており検事による事情聴取もあったが逮捕はされなかったその6 月末から7 にかけて成石平四郎崎久保誓一高木顕明峯尾節堂らが々と逮捕されたしかし沖野岩三郎だけは最後まで逮捕されなかった

코토쿠추스이가 유가와라에서 체포된 것은 191061일이었다. 와카야마의 신구에서는 63일 이른 아침부터 코토쿠 추스이의 관계자의 주거가 가택수색되었다. 이 시점에서는 코토쿠 아키미즈등의 체포는 아직 보도되지 않고, 다음 4일이 되어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코토쿠 아키미즈 체포의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65일에 오오이시 세이노스케가 체포되었다. 오키노 이와사부로도 3일에 가택 수색을 받고 있어 검사에 의한 사정 청취도 있었지만 체포는 되지 않았다. 그 후, 6월말부터 7월에 걸쳐, 세이시 헤이지로, 사키쿠보 誓一, 타카기 아키아키, 미네오 세츠도 등이 차례차례 체포되었다. 그러나 오키노 이와사부로만은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

 

沖野岩三郎後日書いたいたづら」(13この前後状況についてしている。「いたづらロシアを舞台にして登場人物てロシアかれた創作戯曲になっているが実際には1910 6 新宮での状況描写したものである

오키노이와사부로는, 후일 쓴 이타즈라쓰기(いたづら)(13), 이 전후의 상황에 대해 쓰고 있다. '이타즈라기'는 러시아를 무대로 하여 등장인물도 모두 러시아명으로 쓰여진 창작 희곡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9106월의 신구에서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れは千九百十年六月三日であったはまだぐうぐうとされたのでつてると

남편은 천구백십 년의 63일 아침이었다. 그는 아직도 쿨쿨 자고 있다가 난 뒤에 나가 보니,

 

『M町裁判所檢事ユリー・スワロシツチユといふきな名刺突付けられて同行警官十數名家庭からまで捜査された天井裏から床下までべられたけれどもにはれが家宅捜査であるかといふともれなかった

M마치 재판소 검사 유리 스와로시츠치유라고 하는 커다란 명함을 내밀어, 동행의 경관 십수명 때문에 그의 가정은 구석구석까지 수사되었다. 천장 뒤에서 마루 밑까지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편이 무엇 때문에 가택 수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家庭捜査んだ警察署一室檢束されて々に警察署樓上でユリー・スワロシツチユに思想上質問をせられただけで放還された其日町内友人十何名一齊家宅捜査けたので町内はまるで突付いたやうなぎであった

가정 수사가 끝난 후 그는 S읍 경찰서의 한 방에 검속되어, 해질녘 경찰서 누상에서 유리 스와로시츠치유에게 사상상의 질문을 받은 것만으로 방환되었다. 그날은 이 동네에서 그의 친구 열 몇 명이 한꺼번에 가택 수사를 받았기 때문에 동네는 마치 벌의 집을 들킨 소동이었다.

 

れが家宅捜査だったか全然判らなかったが翌日新聞めてれがペテルブルグでドミトリーの一派澤山爆弾製造して冬宮はうとした事件關連してゐるのだといふれたそしてドミトリーは其月一日郊外同志捕縛されたのであつた

그는 남편이 무엇을 위한 가택수사였는지 전혀 몰랐지만, 다음날 신문을 보고 처음으로 남편이 페테르부르크에서 드미트리 일파가 사와야마의 폭탄을 제조해 겨울궁을 습격한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드미트리는 그 달의 하루에 교외 동지의 집에서 포박된 것이었다.

 

沖野岩三郎大逆事件での逮捕れたがこれについて沖野岩三郎自身東京旅行からった大石誠之助1909 1 新宮いた新年会出席しなかったためであろうと推測している14)。成石平四郎崎久保誓一高木顕明峯尾節堂参加したこの新年会,「沖野まないからばないでおこうという大石誠之助一言沖野岩三郎にはいがからなかった捜査当局筋立てではこの新年会大逆事件謀議われた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たため沖野岩三郎逮捕れたというのである大石誠之助成石平四郎刑死特赦無期刑になった高木顕明峯尾節堂獄死崎久保誓一だけが18 年後仮釈放生還できた沖野岩三郎裁判中地元新宮にとどまって被告家族などの救援支援活動にあたった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대역 사건에서의 체포를 면했지만, 이것에 대해서 오키노 이와사부로 자신은, 도쿄 여행에서 돌아온 오이시 세이노스케가 19091월에 신구에서 연 신년회에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14). 세이시 헤이지로, 사키쿠보 쇼이치, 타카기 아키아키, 미네오 세츠도가 참가한 이 신년회에, 오키노는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부르지 말자라고 하는 오오이시 세이노스케의 한마디로,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는 권유가 걸리지 않았다. 수사 당국의 소식통에 의하면, 이 신년회에서 대역 사건의 모의가 행해졌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체포를 면했다고 하는 것이다. 오오이시 세이노스케와 세이시 헤이지로는 형사, 특사로 무기형이 된 타카기 아키아키와 미네오 세츠도는 옥사, 사키쿠보 쇼이치만이 18년 후에 가석방으로 생환할 수 있었다.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재판중은 현지의 신구에 머물러 피고 가족등의 구원·지원 활동에 임했다.

 

6 5 逮捕された大石誠之助押収された幸徳秋水からの書簡桑港同志とあるのは岡繁樹のことである

65일에 체포된 오이시 세이노스케가 압수된 유키노리 아키스이로부터의 서한에 구와항의 동지라고 하는 것은 오카시게키이다.

 

すなわち幸徳秋水6 1 逮捕時所持していた安重根絵葉書サンフランシスコで岡繁樹作成して見本として幸徳秋水ってきたものでありそのうちの一枚幸徳秋水大石誠之助ったのである

, 유키토쿠추수가 61일 체포 시에 소지하고 있던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오카시게키가 작성하여 견본으로 유키토쿠추수에게 보내온 것이며, 그 중 한 장을 유키토쿠추수는 오이시 세이노스케에게 보낸 것이다.

 

上述のように神崎清沖野文庫にある安重根絵葉書について,「岡繁樹英文れて印刷したもの断定したのはこの5 26 日付書簡根拠なのであろうしかし大石誠之助押収物リストのには同封されていたはずの絵葉書見本記載がない他方その絵葉書じものが沖野岩三郎保管していた資料って今日までえられているのであるそのについては神崎清言及していない

상술한 바와 같이 칸자키 기요시가 오키노문고에 있는 안중근의 그림엽서에 대해 오카 시게키가 영문을 넣어 인쇄한 것이라고 단정한 것은, 526일자의 서한이 근거인 것일 것이다. 그러나 오이시 세이노스케의 압수물 목록 중에는 동봉되어 있었을 그림엽서 견본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한편, 그 그림엽서와 같은 것이 오키노 이와사부로가 보관하고 있던 자료 속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칸자키 키요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絵葉書見本写真

그림 엽서 견본의 사진

 

この岡繁樹製作した絵葉書見本由来についてえてみたい

이 오카시게키(岡繁樹)가 제작한 그림엽서 견본의 유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この絵葉書見本使われている写真1909 11 28 大阪毎日新聞兇漢安重根無名指として掲載された写真じものである

이 그림엽서 견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진은 19091128오사카 마이니치 신문한 안중근의 무명 손가락으로 게재된 사진과 같다.

 

 

大阪毎日新聞紙面画像右側にはこのような解説挿入されている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지면의 이미지 오른쪽에는 이런 해설이 삽입돼 있다.

 

兇漢安重根冩眞本紙げしが今茲ぐる冩眞其筋秘密發表されざるものにして左手無名指切斷されあるを特徴とす

한안중근의 진은 에 본지에 게시가 지금 빙의 진은 그 방면에 있어서 비밀에 부쳐 아직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것으로서 왼손의 무명지가 절단되어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伊藤博文暗殺時安重根薬指無名指切断していたことは拘束された段階から日本新聞じられていた1909 11 4 日付東京朝日新聞安應七素性 二日京城特派員發記事では

이토 히로부미 암살 당시 안중근이 약지(무명지)를 절단했다는 사실은 구속 초기부터 일본 신문에 보도됐다. 1909114일자 도쿄아사히신문'야스오시치(安應七)의 내력 2일 경성 특파원 발생'의 기사에서는

 

昨春之等一味徒黨四人とも十人とも)伊藤公殺害せんと其決心はん左手無名指切落したるあり今回犯人安重根矢張左手無名指切落せり

작년 춘지등 일당(4명 모두 10명이라고도 함)이 이토오코오를 살해하려고 작심을 맹세하고 왼손의 무명 손가락을 절락한 일이 있어 이번 범인 안중근도 역시 왼손 무명 손가락을 절락시키고

 

えている。『大阪毎日新聞これより1909 11 10 にすでに安重根写真紙面掲載していた6これはハルビンの日本領事館った拘束された腰縄姿安重根写真をトリミングしたもので切断されたっていない11 28 めて掲載された上掲せている写真解説では,「其筋秘密発表されざるものとされているこの2 写真ハルビンの日本領事館られていたものかとわれるいずれにせよ安重根のこの2 写真政府機関捜査当局から新聞社などの外部11 月中流出していた

라고 전하고 있다.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이것보다 앞서, 19091110일에 이미 안중근의 사진을 지면에 게재하고 있었다(그림 6). 이것은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에서 찍은 뒷짐에 구속된 요승 차림의 안중근의 사진을 트리밍한 것으로, 절단된 손가락은 찍히지 않았다. 1128일에 재차 게재된 상기의 손가락을 보이고 있는 사진의 해설에서는, 그 부분에 있어서 비밀에 부쳐 아직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 두 장의 사진은 하얼빈(ハルビンの日本)의 일본 영사관에서 같은 시간에 찍혔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안중근의 이 두 장의 사진은, 정부 기관이나 수사 당국으로부터 신문사등의 외부에 11월중에 유출되고 있었다.

 

 

切断された左手薬指については共犯関係解明観点から統監府でも関心っていた1909 11 27 旅順監獄での統監府境警視尋問する安重根供述のように記録されている

절단된 왼손의 약지에 대해서는 공범 관계의 해명이라는 관점에서 통감부에서도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091127일 뤼순감옥에서의 통감부경시 심문에 대한 안중근의 진술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十三断指目的大韓国独立メニシテ独立スルマテハ如何ナル方法手段ヲモハス敢行スルナリ断指シタルハ昨年十二月今年正月カトハリ金姓方前述宿屋ニテ切断セリ断指当時民心散乱又自分スルモノナキヨリ自分国家熱心他人民心ムルタメ断指シタルモノナリ伊藤スノミノ目的ニアラス日本皇帝ヲモ政策レルヲ社会公布破壊セントスルモノアリ目的ヨリテタル結果伊藤シタルナリ15

十三断指目的大韓国独立めにして独立するまては如何なる方法手段をもはす敢行するなり断指したるは昨年十二月今年正月かとはり金姓方前述宿屋にて切断せり断指当時民心散乱又自分するものなきより自分国家熱心他人民心むるため断指したるものなり伊藤すのみの目的にあらす日本皇帝をも政策れるを社会公布破壊せんとするものあり目的よりてたる結果伊藤したるなり15

13.단지의 목적은 대한국의 독립을 기하기 위해서, 독립하기까지는 어떠한 방법 수단도 감행할 생각이나 단지는 작년 12월이나 금년 정월이라고 생각하는 하리김성방 전술의 여관에서 절단·단지의 당시는 민심 산란하고 또 자신을 믿는 것보다 자신은 국가를 위해 진진하는 열심을 타인에게 나타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단지된 것이므로, 이토를 죽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일본 황제도 속이고 정책의 잘못을 사회에 공포하고 이를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목적에 의해 나온 결과 이토를 죽인 것이다

 

日本では江戸時代から指切りげんまんなどとあるように約束しとしてまた改心すためにとすという行為があったしかし遊女渡世人などの尋常ではない行為特殊集団内での行為とされていた16)。そうしたこともあって,「とすことが日本社会でも好奇られていたことは事実であろう

일본에서는 에도시대부터 '손가락 자르기 겐만' 등과 같이, 굳은 약속의 증거로서, 또 개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손가락을 떨어뜨린다는 행위가 있었다. 그러나, 유녀나 도세인등의 심상치 않은 행위, 특수한 집단내에서의 행위라고 여겨지고 있었다(16). 그러한 일도 있어서, 손가락을 떨어뜨리는것이, 일본사회에서도 강한 호기의 눈으로 보여지고 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朝鮮社会では,「断指近親者すための行為としてあったことが朝鮮王朝実録されており断指ったものが顕彰されたもあった17)。しかし,「暗殺盟約として旧慣があった事実確認されていないただ安重根自身日本侵略対抗して独立める決意しだとしているのである

조선사회에서는 '단지'가 부모나 근친자의 병을 고치기 위한 행위였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고, 단지를 한 것이 현창된 예도 있었다(17). 그러나 '암살의 맹약으로서' 손가락을 자르는 '구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안중근 자신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독립을 요구하는 굳은 결의의 증거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安重根写真絵葉書

안중근 사진그림엽서

大阪毎日新聞掲載された安重根二枚写真両方とも絵葉書になったものが現存している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실린 안중근의 두 장의 사진은 둘 다 그림엽서가 된 것이 현존하고 있다.

 

 

つは韓国個人所有している絵葉書7絵葉書1 とする2015 3 月末から6 月初旬まで大韓民国歴史博物館かれた光復70 周年特別展 響安重根出会울림안중근을 만나다)」展示されたものである写真大阪毎日新聞1909 11 28 掲載した切断した薬指せるポーズの写真使っている写真面下部

하나는 한국에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그림엽서(그림7:그림엽서1), 20153월말부터 6월 초순까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복 70주년 특별전'에서 안중근을 만나다(울림, 안중근을 만나다'에서 전시된 것이다. 사진은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19091128일에 게재한 절단한 약지를 보여 주는 포즈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다. 사진면 하부에

 

伊藤公暗殺せし安重根

이토공을 암살한 안중근

韓人古来より暗殺盟約として無名指切断するの旧慣ある右手

ママ

撮影せしものなり

한국인은 예로부터 암살의 맹약으로서 무명지를 절단하는 오랜 관행이 있다. 오른손

마마

을 촬영하는 것이다

 

とキャプションがけられている

라고 캡션이 붙여져 있다.

 

1910 年当時絵葉書写真面文字むことがかった1906 までは絵葉書のおもてには住所宛名しかけず通信文写真部分くことになっていた1907 年以降はおもて1/3 通信文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が写真面にもくことが絵葉書写真面けるように背景部分消去されていたこの絵葉書背景されているおもてには

1910년 당시의 그림엽서는 사진면에 문자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1906년까지는 그림엽서의 앞면에는 주소와 주소밖에 쓰지 못하고, 통신문은 사진 부분에 쓰게 되어 있었다. 1907년 이후에는 표면 아래 1/3에 통신문을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사진면에도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아 그림엽서는 사진면에 글씨를 쓸 수 있도록 배경 부분이 지워져 있었다. 이 그림엽서도 배경이 지워져 있다. 표면에는

 

郵便はかきから

Union Postale Universelle CARTE POSTALE

우편엽서(오른쪽부터)

Union Postale Universelle CARTE POSTALE

 

記載があるアルファベット部分1908 制定された国際基準準拠しているという意味万国郵便連合 葉書表記この時期のほとんどの絵葉書にはこの文字印刷されている

의 기재가 있다. 알파벳 부분은 1908년에 제정된 국제 표준을 준수한다는 뜻의 '만국 우편 연합'이다 엽서'의 표기로, 이 시기의 대부분의 그림엽서에는 이 문자가 인쇄되어 있다.

 

 

もうつの絵葉書佐賀県立名護屋城博物館所蔵しているもの8絵葉書2 とするである写真,『大阪毎日新聞1909 11 10掲載した写真元写真使われているこれも背景部分消去処理されている写真面下部

또 하나의 그림엽서는 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그림8: 그림엽서2)이다. 사진은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19091110일에 게재한 사진의 원래 사진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도 배경 부분이 소거 처리되어 있다. 사진면 하부에

 

伊藤公暗殺者)(安重根

(이토공 암살자) (안중근)

 

かれておりおもて記載

라고 적혀 있고, 뒷면에 기재된 것은

 

郵便はかきから

CARTE POSTALE Union Postale Universelle

京城岩田冩眞舘製版部印刷から

우편엽서(오른쪽부터)

CARTE POSTALE Union Postale Universelle

경성 이와타 사진관 제판부 인쇄(오른쪽부터)

 

印刷されている通信文ける1/3 のところに区切れられている

라고 인쇄되어 있다. 통신문을 쓸 수 있는 1/3 부분에 구분선이 들어가 있다.

 

絵葉書2 についてはおもて京城岩田冩眞舘製版部製作者がわかる表記があるしかし絵葉書1 についてはそうした表記がなく製作者不明だがデザインや配色から京城岩田写真館絵葉書2 とはらかに別系統のものである

그림엽서2는 표면에 '경성 이와타 사진관 제판부'라고 제작자를 알 수 있는 표기가 있다. 그러나 그림엽서1에 대해서는 그러한 표기가 없어 제작자를 알 수 없지만, 디자인이나 배색으로 보아 경성 이와타 사진관의 그림엽서2와는 분명히 다른 계통의 것이다.

 

 

沖野岩三郎文庫っている絵葉書写真9この絵葉書1 写真同一のものである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에 남아 있는 그림엽서의 사진(그림 9)은 이 그림엽서1의 사진과 동일하다.

 

それにえて英文のキャプションThe cut off Ring-Finger of the left hand represents the oath of a regicide, according to the old custom of the Koreans

それにえて英文のキャプションThe cut off Ring-Finger of the left hand represents the oath of a regicide, according to the old custom of the Koreans

 

絵葉書1 韓人古来より暗殺盟約として無名指切断するの旧慣という日本語キャプションの記述内容一致している

는 그림엽서1'한국인은 예로부터 암살의 맹약으로서 무명지를 절단하는 오랜 관행'이라는 일본어 캡션의 기술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すなわちこの絵葉書1 沖野文庫巻物絵葉書そして幸徳秋水見本として大石誠之助ったとされる絵葉書密接なつながりをっているものと推測される

, 이 그림엽서1과 오키노 문고의 두루마리 그림엽서, 그리고 코토쿠 아키스이가 견본으로서 오오이시 세이노스케에게 보냈다고 하는 그림엽서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こうしたことから絵葉書1 幸徳秋水漢詩んで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宛った可能性えられるこの仮説について安重根処刑経緯日米間郵便事情時間れなどを考慮しつつ検証してみたい

이러한 것으로부터, 그림엽서 1에 코토쿠 추스이가 한시를 써 넣어,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 앞으로 보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설에 대해서, 안중근의 처형 경위나, 일미간의 우편 사정을 포함한 시간의 흐름 등을 고려하면서 검증해 보고 싶다.

 

絵葉書見本製作

그림엽서 견본 제작

まず安重根裁判処刑について時系列整理しておく

우선 안중근의 재판과 처형에 대해 시계열로 정리해 둔다.

 

旅順関東都督府地方法院死刑判決されたのが2 14 そして2 19 安重根上訴しないとしたことで死刑確定した安重根死刑確定2 21 日本新聞じられた旅順監獄安重根死刑執行されたのは3 26 である

뤼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선고된 것이 214, 그리고 219일에 안중근이 상소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사형이 확정되었다. 안중근의 사형 확정은 221일 일본 신문에 보도되었다.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된 것은 326일이다.

 

前述のように湯河原滞在していた幸徳秋水5 26 日付大石誠之助宛にサンフランシスコで岡繁樹作成した絵葉書見本同封して書簡ったその書簡末尾には安重根のは日本製のは発売禁止になったともかれている

전술한 바와 같이, 유가와라(湯河原)에 체재하고 있던 코토쿠 슈스이는 526일자로 오오이시 세이노스케 앞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오카 시게키가 작성한 그림엽서 견본을 동봉해 서한을 보냈다. 그 편지 말미에는 '일본제 안중근 사진은 발매가 금지되었다'고도 적혀 있다.

 

安重根死刑執行されて1 月以上過ぎた1910 4 29 東京朝日新聞刺客冩眞發賣禁止という記事ている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된 지 한 달 이상 지난 1910429도쿄 아사히 신문'자객 사 참발매 금지'라는 기사가 나온다.

 

府下上澁谷下廣尾町六山口金太郎伊藤公狙撃したる韓人安重根肖像繪葉書印刷んに賣却たるが一昨日其筋より發賣禁止されたり

부하카미시부야시모히로오쵸로쿠 야마구치 킨타로는 이토공(伊藤公)을 저격한 한국인 안중근의 초상을 그림엽서에 인쇄해 성행하고 있지만 그저께 그쪽에서 발매를 금지당하거나

 

湯河原にいた幸徳秋水,「日本製安重根絵葉書販売されていたことを承知していてこの4 29 記事にしてそれが発売禁止になったことを,「安重根のは日本製のは発売禁止ったものとえられるすなわち山口金太郎作成販売していた絵葉書絵葉書1 幸徳秋水はこれを入手したことがあるとの推測

유가와라(湯河原)에 있던 코토쿠 추스이는 '일본제' 안중근의 그림엽서가 판매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고, 429일의 기사를 보고 그것이 발매 금지된 것을 알았고, 그래서 '안중근의 것은 발매 금지'라고 써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 야마구치 긴타로(山口金太郎)가 작성,판매하고 있던 그림엽서가 그림엽서1, 코토쿠 슈스이는 이를 입수한 적이 있다는 추측이 성립된다.

 

もう絵葉書1 安重根写真23 東京市内使われたとわれる事例がある

또 하나, 그림엽서1의 안중근 사진이 2-3월에 도쿄 시내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사례가 있다.

 

 

1910 4 1 日発行新韓自由鐘3という雑誌資料っているただしっているのは雑誌実物ではなく情報収集のために東京入手した新韓自由鐘3 大韓帝国内部警務局日本語訳して筆写したものであるこの新韓自由鐘当時東京留学していた朝鮮人学生結社少年会していた回覧雑誌明治学院普通部っていた李光洙12編集担当していた李光洙1910 3 明治学院卒業しており3 のメンバーがいでしたとわれる18)。

191041일 발행된 <신한자유종(新韓自由鐘)> 3호라는 잡지 자료가 남아 있다. , 남아 있는 것은 잡지의 실물이 아니라 정보 수집을 위해 도쿄에서 입수한 <신한자유종> 3호를 대한제국 내부경무국에서 일본어로 번역하여 필사한 것이다. <신한자유종>은 당시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학생의 결사 <소년회(少年会>가 내고 있던 회람 잡지로, 메이지 학원 보통부에 다니던 이광수가 1·2호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19103월에 메이지학원을 졸업했으며, 3호는 다른 멤버가 인수해 낸 것으로 보인다(18).

 

この3 獄中安重根氏として安重根姿かれている10)。

이 제3호에 옥중에 있는 안중근씨로서 안중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그림 10).

 

これは上述のように大韓帝国内部警務局日本語した筆写したものであり画像原画模写である回覧誌では写真転載す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スケッチか写真られていたとえられる絵葉書写真部分られていた可能性もある東京在住朝鮮人留学生安重根のこのポーズの絵葉書1 入手していた可能性がある

이것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대한제국 내부 경무국에서 일본어로 번역했을 때에 필사한 것이며, 화상도 원화의 모사이다. 회람지에서는 사진을 전재할 수 없기 때문에 스케치나 사진이 붙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림엽서의 사진 부분이 붙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도쿄에 거주하는 조선인 유학생이 안중근의 이 포즈의 그림엽서1을 입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すなわち安重根絵葉書1 東京1910 2 3 には市販されていたものとえられるのである

즉 안중근의 그림엽서1은 도쿄에서 19102-3월에는 시판되고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幸徳秋水絵葉書1 購入して安重根死刑判決確定したことがじられた2 21 日以降,「舎生取義 殺身成仁すなわち,「ててをとりしてをなすことになった安重根への称賛漢詩をその絵葉書写真面これを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宛投函したという想定無理矛盾はない

코토쿠 추스이는 그림엽서1을 구입하여 안중근의 사형판결이 확정된 것이 보도되었던 221일 이후에 '사생취의(舎生取義) 살신성인(殺身成仁)‘ ,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 몸을 죽이고 인()을 이룬다'라는 안중근에 대한 칭찬의 한시를 그림엽서의 사진 면에 써 넣어, 이것을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 앞으로 투함했다고 하는 상정에 무리나 모순은 없다.

 

当時横浜からサンフランシスコまでは20日近くかかった郵便物ばれるので東京投函した絵葉書が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くまでに20 数日から1 月弱はかかっていたことになる

당시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배로 20일 가까이 걸렸다. 우편물도 배로 운반되기 때문에, 도쿄에서 투함한 그림엽서가 샌프란시스코의 오카시게키에 도착하기까지, 20일에서 1개월 미만은 걸렸던 것이 된다.

 

幸徳秋水漢詩かれた絵葉書3 月末にサンフランシスコにあったことが確認できる資料されている

사실 행덕추수의 한시가 적힌 그림엽서가 3월 말 샌프란시스코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다.

 

安重根1910 3 26 処刑されるとサンフランシスコ在住朝鮮人団体国民会発刊していた週刊新聞新韓民報1910 3 30 日付紙面安重根追悼記事掲載したそしてそこには幸徳秋水漢詩った絵葉書写真掲載されていた11)(19)。

안중근이 1910326일 처형되자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조선인단체 국민회가 발간한 주간신문 신한민보는 1910330일자 지면에 안중근의 추모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행덕추수의 한시가 담긴 그림엽서 사진이 실려 있었다(그림 11)(19).

 

 

この事実から逆算すると幸徳秋水東京絵葉書1 入手それに漢詩んで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あてに2 月中旬くとも2月下旬には投函した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ある

이 사실로부터 역산하면, 코토쿠 추스이는 도쿄에서 그림엽서 1을 입수해, 거기에 한시를 써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 앞으로 2월 중순, 늦어도 2월 하순에는 투함했다고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新韓民報編集発行人だった崔正益などと岡繁樹とのつながりは確認できないしかし3月末時点でこの幸徳秋水漢詩かれた安重根写真岡繁樹手元にしかなかったわけで,『新韓民報掲載された写真はサンフランシスコ平民社岡繁樹提供したものということになる

신한민보의 편집 발행인이었던 최정익 등과 오카 시게키와의 연결고리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3월말의 시점에서 이 행덕추수의 한시가 쓰여진 안중근의 사진은 오카 시게키의 수중 밖에 없었던 것으로, 신한 민보에 게재된 사진은 샌프란시스코 평민사의 오카 시게키가 제공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

 

ところで幸徳秋水3 22 湯河原天野屋旅館菅野スガと投宿した。『通俗日本戦国史執筆のためである投宿後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った絵葉書っている

그런데, 코토쿠 아키미즈는, 322일에 유가와라의 아마노야 여관에 칸노 스가와 함께 투숙했다. 통속 일본전국사의 집필을 위해서이다. 투숙 후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岡樹樹)에게 보낸 그림엽서가 남아 있다.

 

其後御無沙汰申譯ありません小生相変らず非常逆境にて東西放浪漸昨今當所落付きました幸衛事昨年来一方ならぬ御厄介感謝致します今日右御礼までそのユツクリきます矢野川からも詳細承りました諸君へよろしく御伝声下さい小生今此処でチヨツトした著述をしてります出来ましたらります

그 후로는 격조했습니다. 소생도 여전히 비상한 역경으로, 동서 방랑점에 이르렀습니다, 고우에사 작년 이래 한 번도 아닌 폐를 끼쳐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우에 감사 인사까지, 그 중에서 유츠쿠리 쓰겠습니다, 야노가와로부터도 자세한 내용을 받았습니다, 제군에게 잘 전해 주십시오, 소생은 지금 여기서 절절한 저술을 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보내겠습니다.

 

日本相州湯河原天野屋方にて 幸徳秋水20

일본 소슈 유가와라 아마노야가타에서 코토쿠 슈스이(20)

 

日付かれていないが文面から3 月末から4 月初あたりに投函した葉書かとわれるここでは漢詩んでったはずの安重根絵葉書についてらの言及もないつまり幸徳秋水からは自分った絵葉書についてらかの依頼えばサンフランシスコでの絵葉書作成などをしていたわけではなかったものとわれる

날짜는 적혀 있지 않지만, 문면으로부터 3월말에서 4월초 쯤에 투함한 엽서라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한시를 써 보냈을 안중근의 그림엽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 코토쿠 추스이로부터는 자신이 보낸 그림엽서에 대해 어떠한 의뢰(예를 들면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그림엽서 작성 등)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岡繁樹幸徳秋水漢詩った絵葉書3月中旬頃るとその写真新韓民報提供するとともに幸徳秋水漢詩安重根写真複製したものに日本語キャプションを英訳してそれに幸徳秋水紹介する英文自分経営する金門印刷所絵葉書作成したのであろう4 後半幸徳秋水湯河原天野屋からった絵葉書って幸徳秋水居所がわかった岡繁樹作成した絵葉書見本として天野屋幸徳秋水宛った

오카시게키는 행덕추수의 한시가 들어있는 그림엽서를 3월 중순경에 받으면 그 사진을 신한민보에 제공함과 동시에 행덕추수의 한시와 안중근의 사진을 복제한 것에 일본어 캡션을 영역하고 거기에 행덕추수를 소개하는 영문을 더해 자신이 경영하는 금문인쇄소에서 그림엽서를 작성했을 것이다. 4월의 후반에, 코토쿠 아키스이가 유가와라 아마노야로부터 보낸 그림엽서를 받고 코토쿠 아키스이의 거처를 알게 된 오카 시게키는, 스스로 작성한 그림엽서를 견본으로서 아마노야의 코토쿠 아키스이 앞으로 보냈다.

 

幸徳秋水がそれをれるのは5 20 日前後であるその一枚5 26 和歌山新宮大石誠之助書簡とともにった

행덕추수가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것은 520일 전후이다. 그 한 장을 526일에 와카야마 신구의 오오이시 세이노스케에게 서한과 함께 보냈다.

 

大石誠之助オレゴン州立大学医学部卒業モントリオール大学やインドのムンバイ大学への留学経験もある英語圏足掛かりがある人物であった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からられてきた英文キャプションりの安重根絵葉書見本をどのように活用すべきか大石誠之助のアイデアやアドバイスに幸徳秋水期待したのかもしれない

오이시 세이노스케는 오리건 주립 대학의 의학부를 졸업하고 몬트리올 대학이나 인도의 뭄바이 대학으로의 유학 경험도 있는 영어권에 발판이 있는 인물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오카시게키가 보내 온 영문 캡션이 들어간 안중근의 그림엽서의 견본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오오이시 세이노스케의 아이디어나 어드바이스에 코토쿠 아키미즈는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この時点,「見本幸徳秋水手元一枚大石手元一枚あったことになるところが幸徳秋水書簡同封してったとする安重根絵葉書大石誠之助押収品リストにはげられていない

이 시점에서, 견본은 코토쿠추스이의 수중에 1, 오이시의 수중에 1매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런데 행덕추수가 서한에 동봉해 보냈다는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오이시 세이노스케의 압수품 목록에 올라 있지 않다.

 

そしてその絵葉書沖野岩三郎巻物表装されて今日わっているのである

그리고 그 그림엽서는 오키노 이와사부로의 두루마리에 표장되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沖野岩三郎による保管

오키노 이와사부로에 의한 보관

 

当時新宮しくしていた大石誠之助沖野岩三郎とはしばしば機会があった家宅捜索ける前日6 2 沖野岩三郎来訪した明治学院関係者一緒大石誠之助いにっているそのあるいはそれ以前大石誠之助沖野岩三郎にこの絵葉書見本手渡した可能性えられる3 日早朝から沖野岩三郎自宅徹底した捜索われ長時間にわたって調べもなわれたしかし沖野岩三郎逮捕れた裁判にかけられることがなかったため沖野岩三郎については押収品リストは存在しないそのためどのようなものが沖野岩三郎手元にあったのかはわからない

당시 신궁에서 친하게 지내던 오이시 세이노스케와 오키노 이와사부로와는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가택 수색을 받기 전날인 62일도,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내방한 메이지 학원의 관계자와 함께 오오이시 세이노스케를 만나러 가고 있다. 그 때인가, 혹은 그 이전에, 오오이시 세이노스케가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 이 그림엽서 견본을 건넸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3일 이른 아침부터, 오키노 이와사부로의 자택도 철저한 수색이 행해져 장시간에 걸쳐 조사도 행해졌다. 그러나 오키노 이와사부로(沖野岩三三郎)는 체포를 면했다. 재판에 회부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오키노 이와사부로에 대해서는 압수품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어떠한 것이 오키노 이와사부로의 수중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でこそ幸徳秋水安重根称賛する漢詩いた絵葉書てきたら大変なことになる見逃されるわけがないとわれがちだが幸徳秋水所持していた安重根絵葉書大逆事件とのわりで問題に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押収品のリストでは安重根肖像のところは省略されている重要視されなかったからであろうまた裁判でもこの絵葉書げられることはなかった

지금은 행덕추수가 안중근을 찬양하는 한시를 쓴 그림엽서가 나오면 큰일이 난다, 놓칠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행덕추수가 소지하고 있던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대역 사건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압수품 목록에는 안중근의 초상 부분은 생략돼 있다.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재판에서도 이 그림엽서가 거론되는 일은 없었다.

 

安重根絵葉書4 月末になって製造販売じられたが所持じられていたわけではない6 3 家宅捜索たった警察官気付かなかったのかもしれないしづいたとしても押収されたり没収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のかもしれない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4월 말에야 제작·판매가 금지됐지만 소지가 금지된 것은 아니다. 63일에 가택 수색에 임한 경찰관이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눈치챘다고 해도 압수되거나 몰수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安重根絵葉書東京だけではなく統監府干渉下かれていた大韓帝国首都京城でも1910 公然京城街頭展示されていたという証言がある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동경뿐만 아니라 통감부의 강한 간섭 아래 놓여 있던 대한제국의 수도 경성에서도 1910년 봄에 공공연히 경성의 거리에 전시되어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1926 昌慶宮日本人3 せた刃物ったわれ一人死亡もう一人重傷うという事件きた4 25 大韓帝国最後皇帝であった純宗李坧くなりその弔問出向いた日本人朝鮮総督斉藤実誤認されて襲撃された事件であるったのは29宋学先(ソンハクソン)この事件金虎門(クモムン)事件ばれている事件翌日1926 4 29 日付宋学先供述調書所轄鍾路警察署から京城地方法院検事正あてにられているその宋学先

1926년에 창경궁 앞에서 일본인 3명을 태운 차가 칼을 든 남자에게 습격당해 한 명이 숨지고 다른 한 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425,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죽고, 그 조문에 간 일본인이 조선총독 사이토 미노루로 오인되어 습격당한 사건이다. 습격한 것은, 29세의 송학선으로, 이 사건은 김호문 사건이라고 불리고 있다. 사건 다음 날인 1926429일자로 송학선의 진술조서가 관할 종로경찰서에서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게 보내져 있다. 그 중에서 송학선은

 

幼時本町絵葉書書店陳列しありし伊藤公暗殺犯人安重根写真鮮人等賞賛りたるを21

어릴적 혼마치에 엽서 서점에 진열되어 있던 아리시 이토 쿠미 암살범 안중근의 사진에 대해 선인등의 칭찬이 자자했던 것을 떠올리며 (21)

 

べたとある裁判でもかった安重根写真たことをべている22)。'

라고 말한 바 있다. 재판 중에서도 어렸을 때 안중근의 사진을 본 것을 말하고 있다(22). '

 

京城本町には本町2 丁目日之出商行という絵葉書額縁専門があった1906 創業自社絵葉書製造販売をするとともに内地各種絵葉書っており店頭絵葉書展示していた宋学先陳述によれば1910 本町日之出商行店頭安重根絵葉書展示されていてそれを朝鮮人賞賛しながらていた123 宋学先もその居合わせ安重根憧憬くようになったという

경성의 본 마을에는 혼마치 2가 모퉁이에 히노데상행이라는 그림엽서나 액자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가 있었다. 1906년의 창업으로, 자사에서 그림엽서의 제조·판매를 함과 동시에 내지의 각종 그림엽서도 취급하고 있으며, 매장에서 그림엽서를 전시하고 있었다. 송학선의진술에 의하면,1910년혼마치히노데상행店頭之出商行의점두에안중근의그림엽서가전시되어있어,그것을조선인이칭찬하면서보고있었다. 12~3세의 송학선도 그 자리에 있으면서 안중근을 동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安重根処刑された3 26 日以降安重根絵葉書京城発売しようとした日本人写真館発売禁止された1910 3 29 日付朝鮮語日刊紙大韓毎日申報,「安眞發售との見出しの記事日本人写真業者安重根氏写真複写して内外国人販売するという内容えているところが2 日後3 31 日付には

안중근이 처형된 326일 이후, 안중근의 그림엽서를 경성에서 발매하려던 일본인 사진관이 발매가 금지되었다. 1910329일자 조선어 일간지 대한매일신보는 안진발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인 사진업자가 안중근의 사진을 복사해 내외국인에게 판매한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2일후인 331일자에는

 

安眞發賣禁止

안진발매 금지

 

日本人岩田菊田写真館などが安重根氏写真複写販売するというのはすでに報道したところであるが内部内務省ではこれを治安妨害するものとして4 日前発売禁止したという

일본인 이와타(岩田기쿠타(菊田) 사진관 등이 안중근씨의 사진을 복사 판매한다는 것은 이미 보도한 바 있으나, 내부(내무성)에서는 이를 치안을 방해하는 것으로 4일 전에 발매를 금지했다고 한다

 

という記事掲載されているこの記事内容しいとすれば京城岩田写真館菊田写真館安重根写真販売しようとしてそれがぜられるのは1910 3 月末それ以前京城本町街頭安重根写真絵葉書展示されていたということになる

라는 기사가 실리고 있다. 이 기사 내용이 맞다면, 경성에서 이와타 사진관이나 키쿠타 사진관이 안중근의 사진을 판매하려고 해서 그것이 금지되는 것은 19103월말로, 그 이전에 경성의 혼마치의 거리에 안중근의 사진(그림엽서)이 전시되어 있었다는 것이 된다.

この岩田写真館とは絵葉書2 にある京城岩田冩眞舘製版部であるこの当時店主岩田鼎南大門通店舗えていた絵葉書2 がこの販売じられたものである可能性宋学先った本町絵葉書書店陳列されていたのは場所製作時期からいって絵葉書2 ではなかろうむしろ未使用絵葉書1現在韓国国内されていることをわせると東京2 には販売されていた絵葉書1 日之出商行仕入れて店頭いていたとみることができる

이와타 사진관은 그림엽서 2에 있는 경성 이와타 신관 제판부이다. 이 당시는, 점주인 이와타 타다시는 남대문통에 점포를 두고 있었다. 그림엽서2가 이때 판매가 금지된 것일 가능성은 높다. 송학선이 말한 혼마치 그림엽서 서점에 진열되어 있던 것은 장소나 제작의 시기로부터는 그림엽서2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사용하지 않는 그림엽서1이 현재 한국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을 고려하면, 도쿄에서 2월에는 판매되고 있던 그림엽서1을 히노데상행이 매입해 매장에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併合前のこの時期併合後朝鮮内地では々な対応なっていた併合直前韓国京城東京とでは安重根絵葉書取扱にもらかないがあった東京では安重根絵葉書規制されることもなく4 月末までは販売されていたさらに東京られた安重根絵葉書京城でも一番のメインストリートである本町通絵葉書専門店店頭かれていた時期もあったのである

병합 이전인 이 시기에도 병합 이후에도 조선과 내지는 여러 가지 대응이 달랐다. 병합 직전의 한국 경성과 도쿄는 안중근의 그림엽서 취급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도쿄에서는 안중근의 그림엽서가 별다른 규제 없이 4월 말까지는 판매되고 있었다. 게다가 도쿄에서 만들어진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경성에서도 가장 메인 스트리트인 혼마치도리의 그림엽서 전문점 매장에 놓여 있던 시기도 있었다.

 

おわりに

결론

 

幸徳秋水東京安重根絵葉書1 入手それに安重根える漢詩んで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てて投函したそれをった岡繁樹幸徳秋水漢詩えた安重根獄中写真複写英文キャプションきの絵葉書ってそれを見本として湯河原天野屋滞在する幸徳秋水のもとにった

코토쿠 추스이는 도쿄에서 안중근의 그림엽서 1을 입수하고, 거기에 안중근을 찬양하는 한시를 써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에게 투함했다. 그것을 받은 오카 시게키는, 코토쿠 추스이의 한시를 곁들인 안중근의 옥중 사진을 복사해, 영문 캡션 첨부의 그림엽서를 만들어, 그것을 견본으로서 유가와라 아마노야에 체재하는 코토쿠 추스이의 곁으로 보냈다.

 

それはちょうど安重根旅順監獄処刑される時期なり当局によって大逆事件がフレームアップされていく時期ともたまたまなっていた

그것은 마침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처형되는 시기와 겹쳐 당국에 의해 대역 사건이 프레임 업 되어 가는 시기와도 우연히 겹쳐 있었다.

 

絵葉書1 販売禁止されたものの沖野岩三郎大石誠之助からかった幸徳秋水漢詩かれたサンフランシスコ絵葉書見本押収されることもなく沖野岩三郎によって保管され日本敗戦大逆事件関係資料つとして表装されて明治学院寄贈されたのである

그림엽서 1의 판매는 금지되었지만, 오키노 이와사부로가 오이시 세이노스케로부터 맡은 코토쿠추스이의 한시가 그려진 샌프란시스코제의 그림엽서 견본은 압수당하지도 않고 오키노 이와사부로에 의해 보관되어 일본의 패전 후 대역 사건의 관계 자료의 하나로서 표장되어 메이지 학원에 기증되었던 것이다.

 

沖野岩三郎1922 5 朝鮮満洲(中国東北部)旅行ている5 9 釜山上陸馬山鎮海慶州群山木浦全州清州忠州って京城そして仁川開城って今度京城から元山咸興京城平壌義州そして安東奉天撫順大連旅順っているこのについて沖野岩三郎翌年薄氷みて』(23出版して朝鮮中国東北部での体験している朝鮮人する日本人横柄差別的態度への批判随所垣間見られ31 独立運動にも関心しているしかし満洲最後旅順っているがこの裁判そして処刑された安重根への言及くない旅順での関心はもっぱら自身非戦論えた日露戦争についてけられている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19225월에 조선과 만주(중국 동북부) 여행을 떠났다. 59일 부산에 상륙하여 마산·진해·경주·군산·목포·전주·청주·충주를 돌아 경성으로, 그리고 인천·개성을 들러 이번에는 경성에서 원산(元山), 함흥(咸興), 경성(京城), 평양(平平壌), 의주(義州), 그리고 안동(安東), 봉천(奉天), 무순(撫順)과 대련[大連/여순]으로 돌고 있다. 이 여행에 대해서,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이듬해 살얼음을 밟아 봐(23)를 출판해 조선이나 중국 동북부에서의 체험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거만하고 차별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3·1독립운동에도 강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만주로 들어가 마지막에는 뤼순에 들르지만 이곳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된 안중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뤼순에서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이 비전론을 주창한 러일전쟁에 대한 것이다.

 

沖野岩三郎安重根絵葉書保存けたのは幸徳秋水大石誠之助への追憶追悼意味からで大逆事件わる記録として書簡類巻物6 表装されたものであろう

오키노 이와사부로가 안중근의 그림엽서를 계속 보존한 것은 코토쿠추스이와 오이시 세이노스케에 대한 추억과 추도의 의미에서, 대역사건에 관련된 기록으로서 서한류 두루마리의 제6권에 표장된 것일 것이다.

 

しかしその一方この絵葉書今日まで保存されたことによって日本朝鮮半島との関係,「日本対朝鮮」「日本対韓国という国家レベルでの対立構造としてるのではなく国家権力りかざす侵略わんとするそれに々という構図でこの絵葉書られ今日までえられている事実々がぶべきことはいのである

그러나 한편으로 이 그림엽서가 오늘날까지 보존됨으로써 일본과 한반도와의 관계를 '일본 대 조선', '일본 대 한국'이라는 국가적 차원의 대립구조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휘두르는 자·침략을 행하려는 자와 그에 항거하는 사람들이라는 구도 속에서 이 그림엽서가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많은 것이다.

 

1神崎清この暗黒裁判革命伝説3)』芳賀書店 1967しい経緯本文中後述する

 

2ユンビョンソク윤병석)「安重根写真안중근의사진)」『韓国独立運動史研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37 2010

都珍淳韓国安重根日本知識人たちの平和論比較してぜず”“なるもの千葉十七幸徳秋水徳富蘆花石川啄木夏目漱石」『2017 年第4 回国際学術会議龍谷大学所蔵安重根遺墨等関係資料展示予稿集 東アジア地域平和つめなおすための歴史認識2017

 

3SBS朝鮮独立れた主役 日本人独立闘士たち2011 8 15 日放送MBC安重根義挙105 年 終わらない戦争2014 8 13 日放送

 

4野口存彌沖野岩三郎踏青社 1989

 

5明治学院大学図書館沖野岩三郎文庫目録1982

 

6この鉛筆かれた数字巻物表装された書簡葉書にもまれており表装すときに順序えとしてまれた番号であろうただ表装されたものをみてみるとてが番号通りにんでいるわけではない

 

7大逆事件記録刊行会証拠物写1964 はしがき

 

8神崎清前掲書 170

 

9神崎清前掲書 168

 

10荒畑寒村寒村自伝上巻 岩波文庫1975 194

 

11加藤哲郎反骨在米ジャーナリスト岡繁樹1936年来日偽装転向」『インテリジェンス4 20045

 

12幸徳秋水顕彰する秋水通信23 2017 12

 

13沖野岩三郎きてゐる大阪屋号商店 1925

 

14野口存彌沖野岩三郎踏青社 1989

 

15韓国国史編纂委員会統監府文書7 巻 文書番号271 旅順監獄での安重根陳述內容

 

16三田村鳶魚娯楽江戸恵風館 1925

 

17) 『顕宗改修実録顕宗11 5 13 日条重普又陳定平甲士朴大有文川鄕吏全茂績斷指活其父母宜蒙褒奬上曰令該曹特行旌表洪重普がまたして定平甲士朴大有文川郷吏全茂績断指してその父母けたので褒賞して奨励すべし国王曰担当部署をして善行すべし。)」

 

18佐藤飛文解説明治学院歴史資料館資料集8 2011

 

19) 『新韓民報1910 3 30 日付紙面現在ソウルの安重根記念館展示されている

 

20幸徳秋水全集編集委員会幸徳秋水全集9 1982 515 絵葉書岡繁樹遺族高知文学館寄贈したされている

 

21韓国国史編纂委員会データベース国内抗日運動資料 京城地方法院検事局文書 検察事務する記録3京鍾警高秘第4769 号 吊侯者殺害する

 

22) 『時代日報1926 7 16 日付平素から安重根崇拝

 

23沖野岩三郎薄氷みて大阪屋号書店 1923

 

 

 

(1) 칸자키 키요시 이 암흑재판(혁명전설3)하가서점 1967. 자세한 경위는 본문중에서 후술한다.

 

(2) 윤병석, 안중근의 사진, 한국독립운동사연구372010

도진순한국의 안중근과 일본 지식인들의 평화론 비교 - "합치고 동하지 않음" "닮고 틀리는 것" 지바17·유키토쿠추스이·도쿠토미로카·이시카와 타쿠키·나쓰메 소세키」『2017년 제4회 국제학술회의·류코쿠대학 소장 안중근 유묵 등 관계 자료 전시 예고집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다시 바라보기 위한 역사인식' 2017

 

(3) SBS 조선독립의 숨은 주역 일본인 독립투사들' 2011815일 방송, MBC '안중근 의거 105년 끝나지 않은 전쟁' 2014813일 방송

 

(4) 노구치 다마야 오키노 이와사부로답청사 1989

 

(5) 메이지가쿠인대학도서관오키노이와사부로문고목록1982

 

(6) 이 연필로 쓰여진 숫자는 두루마리에 표장된 다른 서한이나 엽서에도 쓰여져 있어, 표장에 낼 때에 순서의 기억으로서 써진 번호일 것이다. 단지, 표장된 것을 보면 모든 것이 번호대로 나란히 있는 것은 아니다.

 

(7) 대역사건기록간행회 증거물사1964 엽서

 

(8) 칸자키 키요마에 게제서 170

 

(9) 간자키 기요시 앞에 게제서 168

 

(10) 아라하타 한촌한촌자전상권 이와나미문고 1975194

 

(11) 카토 테츠로 "반골의 재미 저널리스트 오카 시게키의 1936년 일본 방문과 위장 전향" "인텔리전스" 4(20045)

 

(12) 고토쿠추수를 현창하는 모임 추수통신23(201712)

 

(13) 오키노 이와사부로 나는 살아있다오사카야호 상점 1925

 

(14) 노구치 다마야 오키노 이와사부로답청사 1989

 

(15) 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 문서 제7권 문서번호 271 뤼순감옥에서의 안중근 진술내용

 

(16) 미타무라연어 [오락의 에도] 에후칸 1925

 

(17) 현종개수실록현종 11513일 조 "중보또진정평갑사박대유문천향리전무적단지활치부모의몽포장上曰令해당조특행정표(洪重普)가또주하여"정평갑사박대유와문천향리전무적이단치하여그부모를살렸으니포상하고장려하라". 국왕이 말하기를 "담당부서로 하여금 특히 선행을 기려 세상에 널리 나타내도록 하라"."

 

(18) 사토 히문 해설메이지학원 역사자료관 자료집82011

 

(19) 신한민보1910330일자 지면은 현재 서울 안중근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20) 행덕추수 전집 편집위원회 행덕추수 전집91982515 페이지. 그림엽서는 오카 시게키의 유족이 고치 문학관에 기증한 가운데 남아 있다.

 

(21) 한국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국내 항일운동 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검찰사무에 관한 기록3"경종경고비 제4769호 매후자 살해에 관한 건

 

(22) 시대일보 1926716일 평소 안중근 숭배

 

(23) 오키노 이와사부로 살얼음을 밟고오사카야호 서점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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