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20210301-명치학원대학-국제학연구-58-오키노 이와사부로沖野岩三郎문고의 안중근 그림엽서 by 아키즈키秋月望노조미-31-43

沖野岩三郎文庫安重根絵葉書 by 秋月望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의 안중근 그림엽서 by 아키즈키 노조미

 

はじめに 서론

明治学院大学図書館沖野岩三郎文庫ハルビン駅頭伊藤博文暗殺した安重根絵葉書所蔵されている切断した左手薬指せるポーズの写真上部漢詩まれ下部英文キャプションが印刷された絵葉書である

메이지가쿠인대학 도서관의 오키노 이와사부로(沖野岩三郎) 문고에는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 그림엽서가 소장돼 있다. 절단한 왼손 약지를 보여주는 포즈의 사진 상단에 한시가 쓰여 있고 하단에 영문 캡션이 인쇄된 그림엽서이다.

 

 

1967 刊行された書物1めて紹介されその後韓国日本論文やシンポジウムでもげられており2),韓国のテレビ何度取材してドキュメンタリーの放映している3)。

1967년에 간행된 책(1)에 처음 소개되었고, 그 후 한국이나 일본의 논문이나 심포지엄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으며,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국도 몇 번인가 취재해 다큐멘터리에서 방영하고 있다(3).

 

しかしこの絵葉書由来については詳細検討はなされておらずにテレビ放映には根拠のない推論られる本稿ではこの絵葉書についてこの絵葉書作成されるに過程沖野岩三郎手許されていた経緯について関係資料提示しつつ検証する

그러나, 이 그림엽서의 유래에 대해서는 상세한 검토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텔레비전 방영 중에는 근거가 없는 추론도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 그림엽서에 대해 이 그림엽서가 작성되기에 이르는 과정과 오키노 이와사부로의 손아귀에 남아 있었던 경위에 대해 관련 자료를 제시하면서 검증한다.

 

沖野文庫書簡類

오키노 문고의 서간류

 

沖野岩三郎1876年和歌山県日高郡寒川村まれた役場書記山林労働者などを1890 和歌山師範学校入学卒業後小学校教員となり寒川小学校校長めた1901 受洗してクリスチャンとなり1904 上京して9 明治学院神学部入学した明治学院在学中同期入学賀川豊彦らと日露戦争反対して非戦論主張した1907 卒業同時和歌山県日本基督教会新宮教会牧師となり新宮在住医師社会運動家大石誠之助らと親交んだ1910大逆事件まれるが沖野ういところで逮捕れた1917大逆事件をテーマに執筆した小説宿命大阪朝日新聞懸賞小説入選以後文筆活動小説童話評論随筆紀行など数多くの作品発表した4)。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1876년 와카야마현 히다카군(日高郡) 사무카와무라(寒川村)에서 태어났다. 동사무소의 서기나 산림 노동자등을 거쳐, 1890년에 와카야마 사범학교에 입학, 졸업 후에는 초등학교 교원이 되어 사무카와(寒川) 초등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1901년에 수세하여 크리스천이 되었고, 1904년에 상경해 9월에 메이지 학원 신학부에 입학했다. 메이지 학원 재학중, 동기 입학의 카가와 토요히코(賀川豊彦)등과 러일 전쟁에 반대해 비전론을 주장했다. 1907년 졸업과 동시에 와카야마현의 일본기독교회 신구교회 목사가 되어 신구(新宮) 거주 의사이자 사회운동가인 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10년의 대역 사건에 휘말리지만, 오키노는 위기에서 체포를 면했다. 1917년에 대역 사건을 테마로 집필한 소설 숙명(宿命)오사카아사히신문의 현상 소설에 입선해, 이후 문필 활동에 들어가, 소설, 동화, 평론, 수필, 기행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4).

 

沖野戦後1952 蔵書28 自著4 原稿書簡などを資料明治学院寄贈したこのうち一般書籍類大学図書館蔵書として閲覧されたが8 つの巻物表装された書簡類特別貴重資料として貴重書庫保管されているこの書簡類については1969 1 図書館内沖野岩三郎寄贈書簡内容紹介作成され1982 11 明治学院大学図書館から刊行された沖野岩三郎文庫目録にそれが再録されている5)。

오키노는, 전후 1952년에, 장서 28상자, 자저 4상자와 원고, 서한등을 포함한 자료를 메이지 학원에 기증했다. 이 중 일반 서적류는 대학 도서관의 장서로서 열람에 제공되었지만, 8개의 두루마리로 표장된 서한류는 특별 귀중 자료로서 귀중 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이 서한류에 대해서는, 19691월에 도서관내에서 오키노 이와사부로 기증서한 내용소개가 작성되어 198211월에 메이지가쿠인 대학교 도서관으로부터 간행된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목록에 그것이 재록되어 있다(5).

 

書簡葉書などを表装した8 巻物それぞれに18 巻数されており6 8には一九一年事件記載されているこのうち6 には沖野岩三郎・ハル夫妻発行していた雑誌サンセット発行発禁わる書類大逆事件裁判関連した控訴申立書弁護士平出修からの書簡崎久保誓一大石誠之助からの書簡葉書などが表装されている8 崎久保誓一大石誠之助から沖野岩三郎にあてた獄中書簡中心である

서한·엽서 등을 표장한 8권의 두루마리는 각각 1~8권의 권수가 기록되어 있고, 6권과 제8권에는 표에 1910년 사건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중 제6권에는 오키노 이와사부로·하루(ハル)부부가 발행하고 있던 잡지 선셋(サンセット)의 발행이나 발금에 관련된 서류, 대역 사건의 재판에 관련된 항소 신청서나 변호사 히라데 오사무(平出修)의 서한, 사키쿠보 세이치(崎久保誓一), 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의 서한, 엽서 등이 표장되어 있다. 8권은 사키쿠보 쇼이치(崎久保誓一), 오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에서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 보낸 옥중 서한이 중심이다.

 

625cm全長1670cmその1040cmあたりに幸徳秋水漢詩かれ英文キャプションのった絵葉書まれている1)。この右側には崎久保誓一1929 から1930にかけて沖野岩三郎った6 葉書られている

6권은 폭 25cm, 전체 길이 1670cm, 1040cm쯤에, 행덕추수(幸徳秋水)의 한시가 쓰여져, 영문 캡션이 들어간 그림엽서가 붙여져 있다(그림 1). 이 오른쪽에는 사키쿠보 쇼이치(崎久保誓一)1929년부터 1930년에 걸쳐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 보낸 6장의 엽서가 붙어 있다.

 

崎久保誓一1911118大逆罪死刑判決けたが翌日天皇特赦無期懲役減刑され秋田刑務所服役して1929仮釈放された巻物のこの部分6 葉書仮釈放後崎久保から沖野られたもので葉書表裏剥離して両面べて表装してあるこの葉書びにられている安重根絵葉書写真面のみが表装されている

사키쿠보 맹세이치는 1911118일에 대역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다음날의 천황 특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아키타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1929년에 가석방되었다. 두루마리의 이 부분 6장의 엽서는 가석방 후에 사키쿠보에서 오키노로 보내진 것으로, 엽서의 앞뒷면을 박리하여 양면을 나란히 표장하였다. 이 엽서의 줄에 붙어 있는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사진면만 표장되어 있다.

 

 

絵葉書左側には,「東京牛込富久町113 大石誠之助から紀伊國新宮町キリスト教会沖野岩三郎られた封筒191116日付獄中にて聖書んだ感想という書簡られている東京牛込富久町113東京監獄住所ここに収監されていた大石誠之助124幸徳秋水らと処刑された大石誠之助から沖野岩三郎られた最後手紙120日付書簡8 最後表装されている

그림엽서 뒤(왼쪽)에는 도쿄 우시고메 도미히사쵸 113 오이시 세이노스케에서 기노쿠니신구쵸 기독교회 오키노 이와사부로앞으로 보낸 봉투와 191116일자 옥중에서 성경을 읽은 소감이라는 서한이 붙어 있다. 도쿄 우시고메 토미히사쵸 113은 도쿄 감옥의 주소로, 이곳에 수감되어 있던 오이시 세이노스케는 124일에 코토쿠 아키미즈(幸徳秋水)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오오이시 세이노스케로부터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120일자 서한은, 8권의 마지막에 표장되어 있다.

 

この6 安重根絵葉書については,「沖野岩三郎寄贈書簡内容紹介では,「安重根をたたえる幸徳秋水)」となっているが,「とあるのはりである

이 제6권의 안중근 그림엽서에 대해서는 오키노 이와사부로 기증 서한 내용 소개에서는 안중근을 기리는 코토쿠추스이(幸徳秋水)의 시(책 오려내기)라고 되어 있지만, 책 오려내기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この内容紹介作成された1969 より196466 年頃大逆事件資料調査のために沖野岩三郎文庫調べた神崎清がこの絵葉書発見1967 刊行した神崎清この暗黒裁判革命伝説3)』(芳賀書店 1967絵葉書画像掲載していた2)。撮影条件かったためか非常画質いものだが写真右下47との鉛筆6っており沖野岩三郎文庫写真同一のものであることが確認できる

'내용 소개'가 작성된 1969년보다 전인 1964~66년경에 대역 사건의 자료 조사를 위하여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를 조사한 칸자키 기요시(神崎清)가 이 그림엽서를 '발견'하여 1967년에 간행한 칸자키 기요시 '이 암흑 재판(혁명 전설 3)'(하가서점(芳賀書店) 1967)에 그림엽서의 화상을 게재하고 있었다(그림 2). 촬영 조건이 나빴기 때문인지, 매우 화질이 나쁜 것이지만, 사진 오른쪽 아래에 47이라는 연필의 기입(6)이 찍혀 있어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의 사진과 동일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幸徳秋水漢詩とキャプション

코토쿠 추수이의 한시와 캡션

 

1910 6 1 幸徳秋水湯河原逮捕された幸徳秋水はカバンに安重根絵葉書所持していたことがっている

191061일 코토쿠 추수이(幸徳秋水)가 유가와라(湯河原)에서 체포되었을 때 유토쿠 추수이는 가방에 안중근의 그림엽서를 소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大逆事件裁判にあたっては大審院書記手書きで被告たちの押収物についての一覧リストを作成した大逆事件秘密裁判だったためこの押収物リストもしく管理され担当弁護士には公判終了後返却条件謄本貸与されていた弁護士平出修その一部複写物新宮被告家族支援などにあたっていた沖野岩三郎にもっていたという7)。戦後神崎清担当検事のところにっていたその押収物リストを入手してこれに索引けて影印刊行したのが大逆事件記録刊行会証拠物写1964である

대역사건의 재판에 있어서는, 대심원의 서기가 손으로 피고들의 압수물에 관한 일람 리스트를 작성했다. 대역 사건은 비밀재판이었기 때문에, 이 압수물 리스트도 엄격하게 관리되어, 담당의 변호사에게는 공판 종료 후의 반납을 조건으로 등본이 대여되고 있었다. 변호사 히라데 오사무(平出修), 그 일부의 복사물을 만들어, 신구(新宮)에서 피고 가족의 지원 등에 임하고 있던 오키노 이와사부로(沖野岩三郎)에게도 보냈다고 한다(7). 전후 칸자키 기요시(神崎清)가 담당 검사에게 남아 있던 그 압수물 리스트를 입수하여 이것에 색인을 붙여 영인 간행한 것이 대역 사건 기록 간행회 증거물사1964이다.

 

 

その押収物リストに記載されている幸徳秋水逮捕時所持品絵葉書 安重根肖像とある画像部分省略されているが漢詩英文キャプションの文字部分だけが筆写されていた3)。

그 압수물 목록에 나와 있는 행덕추수의 체포시 소지품 중에 그림엽서 안중근의 초상이 있다. 화상 부분은 생략되어 있지만, 한시와 영문 캡션의 문자 부분만이 필사되어 있었다(그림 3).

 

神崎清明治学院大学沖野岩三郎文庫巻物6 から,『証拠物写筆写されていたものと漢詩英文キャプションの絵葉書つけたこれによって沖野岩三郎文庫巻物られているものが幸徳秋水逮捕時押収された絵葉書同種のものと判断したのである

간자키 기요시는 메이지가쿠인대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의 두루마리 제6권에서 증거물사에 필사된 것과 같은 한시와 영문 캡션 그림엽서를 발견했다. 이에 따라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의 두루마리에 붙어 있는 것이 고토쿠추스이가 체포 시에 압수된 그림엽서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漢詩はこのようにかれている

한시는 이렇게 쓰여 있다.

舎生取義 殺身成仁

安君一挙 天地皆振

秋水題

 

してをなす安君一挙天地みな写真下部英文のキャプションはこのようにかれている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 몸을 죽이고 인을 이룬

안군의 거사로, 하늘과 땅이 모두 진동했다.

고 쓰인 사진의 하단 영문 캡션은 이렇게 적혀 있다.

 

JUNG-KEUN AN

The Korean Martyr who killed Prince Ito at Harbin. As seen in this picture, the cut off Ring-Finger of the left hand represents the oath of a regicide, according to the old custom of the Koreans. The characters of the upper corners of the picture is facsimile of the Poem written by D. KOTOKU, a prominent Japanese Anarchist, praising the brave conduct of the martyr.

 

安重根안중근

ハルビンで伊藤公爵暗殺した朝鮮殉教者であるこの写真られるように朝鮮習慣によって切断された左手薬指弑逆宣誓をあらわしている

하얼빈에서 이토 공작을 암살한 조선의 순교자이다. 이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의 오래된 관습에 의해 절단된 왼손 약지는 시해의 선서를 나타내고 있다.

 

写真上部された文字卓越した日本無政府主義者幸徳伝次郎いた漢詩複写殉教者勇敢行動賞賛している。(8

사진의 상부에 기록된 문자는 탁월한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코토쿠 덴지로가 쓴 한시의 복사로 순교자의 용감한 행동을 칭찬하고 있다. (8)

 

神崎清この絵葉書について画像掲載した著書この暗黒裁判には,「明治42 10 26ハルビン駅頭韓国統監伊藤博文をピストルで暗殺した朝鮮人革命家安重根写真サンフランシスコ平民社岡繁樹った絵葉書,「秋水題という署名入りの漢詩印刷してあった」(9した

칸자키 기요시는, 이 그림엽서에 대해서, 화상을 게재한 저서 이 암흑 재판에는, 메이지 421026, 하얼빈 역두에서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암살한 조선인 혁명가 안중근의 사진으로, 샌프란시스코 평민사의 오카 시게키가 만든 그림엽서에, 추수제라고 하는 서명이 들어간 한시가 인쇄되어 있었다(9)라고 적었다.

 

しかし神崎清著書紹介したされた明治学院発行沖野岩三郎寄贈書簡内容紹介にはこの記述内容反映されずとしている神崎清情報明治学院大学図書館わっていなかったか神崎清著書記載見落としたのであろう

그러나, 칸자키 키요시가 저서에서 소개한 후에 나온 메이지 학원 발행의 오키노 이와사부로 기증 서한 내용 소개에는, 이 기술 내용은 반영되지 않고 책의 오려내기라고 하고 있다. 칸자키 기요시의 정보가 메이지가쿠인 대학 도서관에 전해지지 않았던가, 칸자키 기요시의 저서의 기재를 간과했을 것이다.

 

岡繁樹絵葉書見本

오카시게키와 그림엽서 견본

 

神崎清上述のようにこの英文れて印刷したのは岡繁樹だとしているがその根拠されていない

칸자키 기요시는 상술한 바와 같이 이 영문을 넣어 인쇄한 것은 오카시게키라고 하고 있지만, 그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岡繁樹1878 高知県安芸市まれた17 上京して夜学って陸軍士官学校受験したが失敗1899 万朝報入社して記者となったここで幸徳秋水堺利彦木下尚江などとったが主筆松井柏軒って退職せざるをなくなり幸徳秋水堺利彦世話でアメリカにった10)。1902 3 15 横浜サンフランシスコにいたのが4 3 それ以後サンフランシスコで金門印刷所経営しながらサンフランシスコ平民社活動していた11)。

오카시게키(岡繁樹)1878년에 고치현 아키시(安芸市)에서 태어났다. 17세에 상경해 야학에 다니며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했지만 실패. 1899년에 만조보(萬朝報)에 입사해 기자가 되었다. 여기서 코토쿠 아키미즈(幸徳秋水),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키노시타 나오에(木下尚江) 등과 알게 되었지만, 주필인 마츠이 가시와켄(松井柏軒)을 구타해 퇴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코토쿠 아키미즈나 사카이 토시히코의 보살핌으로 미국에 건너갔다(10). 1902315일 요코하마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이 43. 그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금문(金門)인쇄소를 경영하면서, 샌프란시스코 평민사(平民社)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1).

 

1905 筆禍事件禁錮5 けた幸徳秋水刑期えて出獄すると11 14 横浜から伊予丸乗船してサンフランシスコにったサンフランシスコでは同行した幸徳幸衛ともども岡繁樹世話になった4)。ところが翌年4 18 にサンフランシスコ大地震きたそのため幸徳秋水6 5 香港丸乗船して23 横浜らざるをなくなったしかし幸徳幸衛勉強をするために帰国せずそのままサンフランシスコにった12)。こうした関係幸徳秋水帰国後も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との書簡葉書でやりりをしていた

1905년에 필화 사건으로 금고 5개월의 형을 받은 코토쿠 추스이는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자 1114일에 요코하마에서 이요마루(伊予丸)에 승선하여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동행한 조카 코토쿠 코우에(幸徳幸衛)와 친구 오카시게키(岡繁樹)의 신세를 졌다(그림 4). 그런데 이듬해 418일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코토쿠 추스이는 65일에 홍콩환(香港丸)에 승선해 23일에 요코하마에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조카 고토쿠 유키에(幸徳幸衛)는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귀국하지 않고 그대로 샌프란시스코에 남았다(12). 이러한 관계로, 코토쿠 추스이는, 귀국 후에도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岡繁樹)와의 사이에서 서한이나 엽서로 교환을 하고 있었다.

 


そのやり
りの1910 5 月後半岡繁樹から幸徳秋水宛安重根絵葉書見本られていたこの事実上述証拠物写押収記録されている書簡によって確認できる幸徳秋水大石誠之助ててったこの書簡大石誠之助新宮逮捕された押収されたものでこの書簡末尾サンフランシスコの同志った絵葉書見本同封すると幸徳秋水いている

그 교환 속에서 19105월 후반에 오카 시게키로부터 코토쿠 아키스이 앞으로 안중근의 그림엽서의 견본이 보내져 있었다. 이 사실은 상술한 증거물사속의 압수기록에 남아 있는 서한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코토쿠 추스이가 오이시 세이노스케에게 보낸 이 서한은 오이시 세이노스케가 신구에서 체포되었을 때 압수된 것으로, 이 서한의 말미에 샌프란시스코 동지가 만든 그림엽서의 견본을 동봉하자 코토쿠 추스이가 쓰고 있다.

 

封入絵葉書桑港同志って見本をよこしたバクニンとクラボトキンのも出来ている安重根のは日本製のは発売禁止になったからぐやられるだろう

봉입된 그림엽서는 샌프란시스코의 동지가 만들어 견본을 보낸 것 외에 바쿠닌과 크라보토킨도 되어 있다, 안중근의 것은 발매 금지되었으니, 이것도 곧 당할 것이다.

 

幸徳秋水湯河原逮捕されたのは1910 61 であった和歌山新宮では6 3 日早朝から幸徳秋水関係者住居家宅捜索されたこの時点では幸徳秋水らの逮捕はまだじられておらず4 になって大阪毎日新聞幸徳秋水逮捕記事ったそして6 5 大石誠之助逮捕された沖野岩三郎3 家宅捜索けており検事による事情聴取もあったが逮捕はされなかったその6 月末から7 にかけて成石平四郎崎久保誓一高木顕明峯尾節堂らが々と逮捕されたしかし沖野岩三郎だけは最後まで逮捕されなかった

코토쿠추스이가 유가와라에서 체포된 것은 191061일이었다. 와카야마의 신구에서는 63일 이른 아침부터 코토쿠 추스이의 관계자의 주거가 가택수색되었다. 이 시점에서는 코토쿠 아키미즈등의 체포는 아직 보도되지 않고, 다음 4일이 되어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코토쿠 아키미즈 체포의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65일에 오오이시 세이노스케가 체포되었다. 오키노 이와사부로도 3일에 가택 수색을 받고 있어 검사에 의한 사정 청취도 있었지만 체포는 되지 않았다. 그 후, 6월말부터 7월에 걸쳐, 세이시 헤이지로, 사키쿠보 誓一, 타카기 아키아키, 미네오 세츠도 등이 차례차례 체포되었다. 그러나 오키노 이와사부로만은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

 

沖野岩三郎後日書いたいたづら」(13この前後状況についてしている。「いたづらロシアを舞台にして登場人物てロシアかれた創作戯曲になっているが実際には1910 6 新宮での状況描写したものである

오키노이와사부로는, 후일 쓴 이타즈라쓰기(いたづら)(13), 이 전후의 상황에 대해 쓰고 있다. '이타즈라기'는 러시아를 무대로 하여 등장인물도 모두 러시아명으로 쓰여진 창작 희곡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9106월의 신구에서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れは千九百十年六月三日であったはまだぐうぐうとされたのでつてると

남편은 천구백십 년의 63일 아침이었다. 그는 아직도 쿨쿨 자고 있다가 난 뒤에 나가 보니,

 

『M町裁判所檢事ユリー・スワロシツチユといふきな名刺突付けられて同行警官十數名家庭からまで捜査された天井裏から床下までべられたけれどもにはれが家宅捜査であるかといふともれなかった

M마치 재판소 검사 유리 스와로시츠치유라고 하는 커다란 명함을 내밀어, 동행의 경관 십수명 때문에 그의 가정은 구석구석까지 수사되었다. 천장 뒤에서 마루 밑까지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편이 무엇 때문에 가택 수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家庭捜査んだ警察署一室檢束されて々に警察署樓上でユリー・スワロシツチユに思想上質問をせられただけで放還された其日町内友人十何名一齊家宅捜査けたので町内はまるで突付いたやうなぎであった

가정 수사가 끝난 후 그는 S읍 경찰서의 한 방에 검속되어, 해질녘 경찰서 누상에서 유리 스와로시츠치유에게 사상상의 질문을 받은 것만으로 방환되었다. 그날은 이 동네에서 그의 친구 열 몇 명이 한꺼번에 가택 수사를 받았기 때문에 동네는 마치 벌의 집을 들킨 소동이었다.

 

れが家宅捜査だったか全然判らなかったが翌日新聞めてれがペテルブルグでドミトリーの一派澤山爆弾製造して冬宮はうとした事件關連してゐるのだといふれたそしてドミトリーは其月一日郊外同志捕縛されたのであつた

그는 남편이 무엇을 위한 가택수사였는지 전혀 몰랐지만, 다음날 신문을 보고 처음으로 남편이 페테르부르크에서 드미트리 일파가 사와야마의 폭탄을 제조해 겨울궁을 습격한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드미트리는 그 달의 하루에 교외 동지의 집에서 포박된 것이었다.

 

沖野岩三郎大逆事件での逮捕れたがこれについて沖野岩三郎自身東京旅行からった大石誠之助1909 1 新宮いた新年会出席しなかったためであろうと推測している14)。成石平四郎崎久保誓一高木顕明峯尾節堂参加したこの新年会,「沖野まないからばないでおこうという大石誠之助一言沖野岩三郎にはいがからなかった捜査当局筋立てではこの新年会大逆事件謀議われた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たため沖野岩三郎逮捕れたというのである大石誠之助成石平四郎刑死特赦無期刑になった高木顕明峯尾節堂獄死崎久保誓一だけが18 年後仮釈放生還できた沖野岩三郎裁判中地元新宮にとどまって被告家族などの救援支援活動にあたった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대역 사건에서의 체포를 면했지만, 이것에 대해서 오키노 이와사부로 자신은, 도쿄 여행에서 돌아온 오이시 세이노스케가 19091월에 신구에서 연 신년회에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14). 세이시 헤이지로, 사키쿠보 쇼이치, 타카기 아키아키, 미네오 세츠도가 참가한 이 신년회에, 오키노는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부르지 말자라고 하는 오오이시 세이노스케의 한마디로,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는 권유가 걸리지 않았다. 수사 당국의 소식통에 의하면, 이 신년회에서 대역 사건의 모의가 행해졌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체포를 면했다고 하는 것이다. 오오이시 세이노스케와 세이시 헤이지로는 형사, 특사로 무기형이 된 타카기 아키아키와 미네오 세츠도는 옥사, 사키쿠보 쇼이치만이 18년 후에 가석방으로 생환할 수 있었다.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재판중은 현지의 신구에 머물러 피고 가족등의 구원·지원 활동에 임했다.

 

6 5 逮捕された大石誠之助押収された幸徳秋水からの書簡桑港同志とあるのは岡繁樹のことである

65일에 체포된 오이시 세이노스케가 압수된 유키노리 아키스이로부터의 서한에 구와항의 동지라고 하는 것은 오카시게키이다.

 

すなわち幸徳秋水6 1 逮捕時所持していた安重根絵葉書サンフランシスコで岡繁樹作成して見本として幸徳秋水ってきたものでありそのうちの一枚幸徳秋水大石誠之助ったのである

, 유키토쿠추수가 61일 체포 시에 소지하고 있던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오카시게키가 작성하여 견본으로 유키토쿠추수에게 보내온 것이며, 그 중 한 장을 유키토쿠추수는 오이시 세이노스케에게 보낸 것이다.

 

上述のように神崎清沖野文庫にある安重根絵葉書について,「岡繁樹英文れて印刷したもの断定したのはこの5 26 日付書簡根拠なのであろうしかし大石誠之助押収物リストのには同封されていたはずの絵葉書見本記載がない他方その絵葉書じものが沖野岩三郎保管していた資料って今日までえられているのであるそのについては神崎清言及していない

상술한 바와 같이 칸자키 기요시가 오키노문고에 있는 안중근의 그림엽서에 대해 오카 시게키가 영문을 넣어 인쇄한 것이라고 단정한 것은, 526일자의 서한이 근거인 것일 것이다. 그러나 오이시 세이노스케의 압수물 목록 중에는 동봉되어 있었을 그림엽서 견본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한편, 그 그림엽서와 같은 것이 오키노 이와사부로가 보관하고 있던 자료 속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칸자키 키요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絵葉書見本写真

그림 엽서 견본의 사진

 

この岡繁樹製作した絵葉書見本由来についてえてみたい

이 오카시게키(岡繁樹)가 제작한 그림엽서 견본의 유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この絵葉書見本使われている写真1909 11 28 大阪毎日新聞兇漢安重根無名指として掲載された写真じものである

이 그림엽서 견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진은 19091128오사카 마이니치 신문한 안중근의 무명 손가락으로 게재된 사진과 같다.

 

 

大阪毎日新聞紙面画像右側にはこのような解説挿入されている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지면의 이미지 오른쪽에는 이런 해설이 삽입돼 있다.

 

兇漢安重根冩眞本紙げしが今茲ぐる冩眞其筋秘密發表されざるものにして左手無名指切斷されあるを特徴とす

한안중근의 진은 에 본지에 게시가 지금 빙의 진은 그 방면에 있어서 비밀에 부쳐 아직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것으로서 왼손의 무명지가 절단되어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伊藤博文暗殺時安重根薬指無名指切断していたことは拘束された段階から日本新聞じられていた1909 11 4 日付東京朝日新聞安應七素性 二日京城特派員發記事では

이토 히로부미 암살 당시 안중근이 약지(무명지)를 절단했다는 사실은 구속 초기부터 일본 신문에 보도됐다. 1909114일자 도쿄아사히신문'야스오시치(安應七)의 내력 2일 경성 특파원 발생'의 기사에서는

 

昨春之等一味徒黨四人とも十人とも)伊藤公殺害せんと其決心はん左手無名指切落したるあり今回犯人安重根矢張左手無名指切落せり

작년 춘지등 일당(4명 모두 10명이라고도 함)이 이토오코오를 살해하려고 작심을 맹세하고 왼손의 무명 손가락을 절락한 일이 있어 이번 범인 안중근도 역시 왼손 무명 손가락을 절락시키고

 

えている。『大阪毎日新聞これより1909 11 10 にすでに安重根写真紙面掲載していた6これはハルビンの日本領事館った拘束された腰縄姿安重根写真をトリミングしたもので切断されたっていない11 28 めて掲載された上掲せている写真解説では,「其筋秘密発表されざるものとされているこの2 写真ハルビンの日本領事館られていたものかとわれるいずれにせよ安重根のこの2 写真政府機関捜査当局から新聞社などの外部11 月中流出していた

라고 전하고 있다.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이것보다 앞서, 19091110일에 이미 안중근의 사진을 지면에 게재하고 있었다(그림 6). 이것은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에서 찍은 뒷짐에 구속된 요승 차림의 안중근의 사진을 트리밍한 것으로, 절단된 손가락은 찍히지 않았다. 1128일에 재차 게재된 상기의 손가락을 보이고 있는 사진의 해설에서는, 그 부분에 있어서 비밀에 부쳐 아직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 두 장의 사진은 하얼빈(ハルビンの日本)의 일본 영사관에서 같은 시간에 찍혔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안중근의 이 두 장의 사진은, 정부 기관이나 수사 당국으로부터 신문사등의 외부에 11월중에 유출되고 있었다.

 

 

切断された左手薬指については共犯関係解明観点から統監府でも関心っていた1909 11 27 旅順監獄での統監府境警視尋問する安重根供述のように記録されている

절단된 왼손의 약지에 대해서는 공범 관계의 해명이라는 관점에서 통감부에서도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091127일 뤼순감옥에서의 통감부경시 심문에 대한 안중근의 진술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十三断指目的大韓国独立メニシテ独立スルマテハ如何ナル方法手段ヲモハス敢行スルナリ断指シタルハ昨年十二月今年正月カトハリ金姓方前述宿屋ニテ切断セリ断指当時民心散乱又自分スルモノナキヨリ自分国家熱心他人民心ムルタメ断指シタルモノナリ伊藤スノミノ目的ニアラス日本皇帝ヲモ政策レルヲ社会公布破壊セントスルモノアリ目的ヨリテタル結果伊藤シタルナリ15

十三断指目的大韓国独立めにして独立するまては如何なる方法手段をもはす敢行するなり断指したるは昨年十二月今年正月かとはり金姓方前述宿屋にて切断せり断指当時民心散乱又自分するものなきより自分国家熱心他人民心むるため断指したるものなり伊藤すのみの目的にあらす日本皇帝をも政策れるを社会公布破壊せんとするものあり目的よりてたる結果伊藤したるなり15

13.단지의 목적은 대한국의 독립을 기하기 위해서, 독립하기까지는 어떠한 방법 수단도 감행할 생각이나 단지는 작년 12월이나 금년 정월이라고 생각하는 하리김성방 전술의 여관에서 절단·단지의 당시는 민심 산란하고 또 자신을 믿는 것보다 자신은 국가를 위해 진진하는 열심을 타인에게 나타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단지된 것이므로, 이토를 죽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일본 황제도 속이고 정책의 잘못을 사회에 공포하고 이를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목적에 의해 나온 결과 이토를 죽인 것이다

 

日本では江戸時代から指切りげんまんなどとあるように約束しとしてまた改心すためにとすという行為があったしかし遊女渡世人などの尋常ではない行為特殊集団内での行為とされていた16)。そうしたこともあって,「とすことが日本社会でも好奇られていたことは事実であろう

일본에서는 에도시대부터 '손가락 자르기 겐만' 등과 같이, 굳은 약속의 증거로서, 또 개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손가락을 떨어뜨린다는 행위가 있었다. 그러나, 유녀나 도세인등의 심상치 않은 행위, 특수한 집단내에서의 행위라고 여겨지고 있었다(16). 그러한 일도 있어서, 손가락을 떨어뜨리는것이, 일본사회에서도 강한 호기의 눈으로 보여지고 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朝鮮社会では,「断指近親者すための行為としてあったことが朝鮮王朝実録されており断指ったものが顕彰されたもあった17)。しかし,「暗殺盟約として旧慣があった事実確認されていないただ安重根自身日本侵略対抗して独立める決意しだとしているのである

조선사회에서는 '단지'가 부모나 근친자의 병을 고치기 위한 행위였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고, 단지를 한 것이 현창된 예도 있었다(17). 그러나 '암살의 맹약으로서' 손가락을 자르는 '구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안중근 자신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독립을 요구하는 굳은 결의의 증거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安重根写真絵葉書

안중근 사진그림엽서

大阪毎日新聞掲載された安重根二枚写真両方とも絵葉書になったものが現存している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실린 안중근의 두 장의 사진은 둘 다 그림엽서가 된 것이 현존하고 있다.

 

 

つは韓国個人所有している絵葉書7絵葉書1 とする2015 3 月末から6 月初旬まで大韓民国歴史博物館かれた光復70 周年特別展 響安重根出会울림안중근을 만나다)」展示されたものである写真大阪毎日新聞1909 11 28 掲載した切断した薬指せるポーズの写真使っている写真面下部

하나는 한국에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그림엽서(그림7:그림엽서1), 20153월말부터 6월 초순까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복 70주년 특별전'에서 안중근을 만나다(울림, 안중근을 만나다'에서 전시된 것이다. 사진은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19091128일에 게재한 절단한 약지를 보여 주는 포즈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다. 사진면 하부에

 

伊藤公暗殺せし安重根

이토공을 암살한 안중근

韓人古来より暗殺盟約として無名指切断するの旧慣ある右手

ママ

撮影せしものなり

한국인은 예로부터 암살의 맹약으로서 무명지를 절단하는 오랜 관행이 있다. 오른손

마마

을 촬영하는 것이다

 

とキャプションがけられている

라고 캡션이 붙여져 있다.

 

1910 年当時絵葉書写真面文字むことがかった1906 までは絵葉書のおもてには住所宛名しかけず通信文写真部分くことになっていた1907 年以降はおもて1/3 通信文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が写真面にもくことが絵葉書写真面けるように背景部分消去されていたこの絵葉書背景されているおもてには

1910년 당시의 그림엽서는 사진면에 문자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1906년까지는 그림엽서의 앞면에는 주소와 주소밖에 쓰지 못하고, 통신문은 사진 부분에 쓰게 되어 있었다. 1907년 이후에는 표면 아래 1/3에 통신문을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사진면에도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아 그림엽서는 사진면에 글씨를 쓸 수 있도록 배경 부분이 지워져 있었다. 이 그림엽서도 배경이 지워져 있다. 표면에는

 

郵便はかきから

Union Postale Universelle CARTE POSTALE

우편엽서(오른쪽부터)

Union Postale Universelle CARTE POSTALE

 

記載があるアルファベット部分1908 制定された国際基準準拠しているという意味万国郵便連合 葉書表記この時期のほとんどの絵葉書にはこの文字印刷されている

의 기재가 있다. 알파벳 부분은 1908년에 제정된 국제 표준을 준수한다는 뜻의 '만국 우편 연합'이다 엽서'의 표기로, 이 시기의 대부분의 그림엽서에는 이 문자가 인쇄되어 있다.

 

 

もうつの絵葉書佐賀県立名護屋城博物館所蔵しているもの8絵葉書2 とするである写真,『大阪毎日新聞1909 11 10掲載した写真元写真使われているこれも背景部分消去処理されている写真面下部

또 하나의 그림엽서는 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그림8: 그림엽서2)이다. 사진은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19091110일에 게재한 사진의 원래 사진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도 배경 부분이 소거 처리되어 있다. 사진면 하부에

 

伊藤公暗殺者)(安重根

(이토공 암살자) (안중근)

 

かれておりおもて記載

라고 적혀 있고, 뒷면에 기재된 것은

 

郵便はかきから

CARTE POSTALE Union Postale Universelle

京城岩田冩眞舘製版部印刷から

우편엽서(오른쪽부터)

CARTE POSTALE Union Postale Universelle

경성 이와타 사진관 제판부 인쇄(오른쪽부터)

 

印刷されている通信文ける1/3 のところに区切れられている

라고 인쇄되어 있다. 통신문을 쓸 수 있는 1/3 부분에 구분선이 들어가 있다.

 

絵葉書2 についてはおもて京城岩田冩眞舘製版部製作者がわかる表記があるしかし絵葉書1 についてはそうした表記がなく製作者不明だがデザインや配色から京城岩田写真館絵葉書2 とはらかに別系統のものである

그림엽서2는 표면에 '경성 이와타 사진관 제판부'라고 제작자를 알 수 있는 표기가 있다. 그러나 그림엽서1에 대해서는 그러한 표기가 없어 제작자를 알 수 없지만, 디자인이나 배색으로 보아 경성 이와타 사진관의 그림엽서2와는 분명히 다른 계통의 것이다.

 

 

沖野岩三郎文庫っている絵葉書写真9この絵葉書1 写真同一のものである

오키노 이와사부로 문고에 남아 있는 그림엽서의 사진(그림 9)은 이 그림엽서1의 사진과 동일하다.

 

それにえて英文のキャプションThe cut off Ring-Finger of the left hand represents the oath of a regicide, according to the old custom of the Koreans

それにえて英文のキャプションThe cut off Ring-Finger of the left hand represents the oath of a regicide, according to the old custom of the Koreans

 

絵葉書1 韓人古来より暗殺盟約として無名指切断するの旧慣という日本語キャプションの記述内容一致している

는 그림엽서1'한국인은 예로부터 암살의 맹약으로서 무명지를 절단하는 오랜 관행'이라는 일본어 캡션의 기술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すなわちこの絵葉書1 沖野文庫巻物絵葉書そして幸徳秋水見本として大石誠之助ったとされる絵葉書密接なつながりをっているものと推測される

, 이 그림엽서1과 오키노 문고의 두루마리 그림엽서, 그리고 코토쿠 아키스이가 견본으로서 오오이시 세이노스케에게 보냈다고 하는 그림엽서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こうしたことから絵葉書1 幸徳秋水漢詩んで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宛った可能性えられるこの仮説について安重根処刑経緯日米間郵便事情時間れなどを考慮しつつ検証してみたい

이러한 것으로부터, 그림엽서 1에 코토쿠 추스이가 한시를 써 넣어,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 앞으로 보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설에 대해서, 안중근의 처형 경위나, 일미간의 우편 사정을 포함한 시간의 흐름 등을 고려하면서 검증해 보고 싶다.

 

絵葉書見本製作

그림엽서 견본 제작

まず安重根裁判処刑について時系列整理しておく

우선 안중근의 재판과 처형에 대해 시계열로 정리해 둔다.

 

旅順関東都督府地方法院死刑判決されたのが2 14 そして2 19 安重根上訴しないとしたことで死刑確定した安重根死刑確定2 21 日本新聞じられた旅順監獄安重根死刑執行されたのは3 26 である

뤼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선고된 것이 214, 그리고 219일에 안중근이 상소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사형이 확정되었다. 안중근의 사형 확정은 221일 일본 신문에 보도되었다.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된 것은 326일이다.

 

前述のように湯河原滞在していた幸徳秋水5 26 日付大石誠之助宛にサンフランシスコで岡繁樹作成した絵葉書見本同封して書簡ったその書簡末尾には安重根のは日本製のは発売禁止になったともかれている

전술한 바와 같이, 유가와라(湯河原)에 체재하고 있던 코토쿠 슈스이는 526일자로 오오이시 세이노스케 앞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오카 시게키가 작성한 그림엽서 견본을 동봉해 서한을 보냈다. 그 편지 말미에는 '일본제 안중근 사진은 발매가 금지되었다'고도 적혀 있다.

 

安重根死刑執行されて1 月以上過ぎた1910 4 29 東京朝日新聞刺客冩眞發賣禁止という記事ている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된 지 한 달 이상 지난 1910429도쿄 아사히 신문'자객 사 참발매 금지'라는 기사가 나온다.

 

府下上澁谷下廣尾町六山口金太郎伊藤公狙撃したる韓人安重根肖像繪葉書印刷んに賣却たるが一昨日其筋より發賣禁止されたり

부하카미시부야시모히로오쵸로쿠 야마구치 킨타로는 이토공(伊藤公)을 저격한 한국인 안중근의 초상을 그림엽서에 인쇄해 성행하고 있지만 그저께 그쪽에서 발매를 금지당하거나

 

湯河原にいた幸徳秋水,「日本製安重根絵葉書販売されていたことを承知していてこの4 29 記事にしてそれが発売禁止になったことを,「安重根のは日本製のは発売禁止ったものとえられるすなわち山口金太郎作成販売していた絵葉書絵葉書1 幸徳秋水はこれを入手したことがあるとの推測

유가와라(湯河原)에 있던 코토쿠 추스이는 '일본제' 안중근의 그림엽서가 판매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고, 429일의 기사를 보고 그것이 발매 금지된 것을 알았고, 그래서 '안중근의 것은 발매 금지'라고 써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 야마구치 긴타로(山口金太郎)가 작성,판매하고 있던 그림엽서가 그림엽서1, 코토쿠 슈스이는 이를 입수한 적이 있다는 추측이 성립된다.

 

もう絵葉書1 安重根写真23 東京市内使われたとわれる事例がある

또 하나, 그림엽서1의 안중근 사진이 2-3월에 도쿄 시내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사례가 있다.

 

 

1910 4 1 日発行新韓自由鐘3という雑誌資料っているただしっているのは雑誌実物ではなく情報収集のために東京入手した新韓自由鐘3 大韓帝国内部警務局日本語訳して筆写したものであるこの新韓自由鐘当時東京留学していた朝鮮人学生結社少年会していた回覧雑誌明治学院普通部っていた李光洙12編集担当していた李光洙1910 3 明治学院卒業しており3 のメンバーがいでしたとわれる18)。

191041일 발행된 <신한자유종(新韓自由鐘)> 3호라는 잡지 자료가 남아 있다. , 남아 있는 것은 잡지의 실물이 아니라 정보 수집을 위해 도쿄에서 입수한 <신한자유종> 3호를 대한제국 내부경무국에서 일본어로 번역하여 필사한 것이다. <신한자유종>은 당시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학생의 결사 <소년회(少年会>가 내고 있던 회람 잡지로, 메이지 학원 보통부에 다니던 이광수가 1·2호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19103월에 메이지학원을 졸업했으며, 3호는 다른 멤버가 인수해 낸 것으로 보인다(18).

 

この3 獄中安重根氏として安重根姿かれている10)。

이 제3호에 옥중에 있는 안중근씨로서 안중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그림 10).

 

これは上述のように大韓帝国内部警務局日本語した筆写したものであり画像原画模写である回覧誌では写真転載す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スケッチか写真られていたとえられる絵葉書写真部分られていた可能性もある東京在住朝鮮人留学生安重根のこのポーズの絵葉書1 入手していた可能性がある

이것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대한제국 내부 경무국에서 일본어로 번역했을 때에 필사한 것이며, 화상도 원화의 모사이다. 회람지에서는 사진을 전재할 수 없기 때문에 스케치나 사진이 붙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림엽서의 사진 부분이 붙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도쿄에 거주하는 조선인 유학생이 안중근의 이 포즈의 그림엽서1을 입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すなわち安重根絵葉書1 東京1910 2 3 には市販されていたものとえられるのである

즉 안중근의 그림엽서1은 도쿄에서 19102-3월에는 시판되고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幸徳秋水絵葉書1 購入して安重根死刑判決確定したことがじられた2 21 日以降,「舎生取義 殺身成仁すなわち,「ててをとりしてをなすことになった安重根への称賛漢詩をその絵葉書写真面これを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宛投函したという想定無理矛盾はない

코토쿠 추스이는 그림엽서1을 구입하여 안중근의 사형판결이 확정된 것이 보도되었던 221일 이후에 '사생취의(舎生取義) 살신성인(殺身成仁)‘ ,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 몸을 죽이고 인()을 이룬다'라는 안중근에 대한 칭찬의 한시를 그림엽서의 사진 면에 써 넣어, 이것을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 앞으로 투함했다고 하는 상정에 무리나 모순은 없다.

 

当時横浜からサンフランシスコまでは20日近くかかった郵便物ばれるので東京投函した絵葉書が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くまでに20 数日から1 月弱はかかっていたことになる

당시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배로 20일 가까이 걸렸다. 우편물도 배로 운반되기 때문에, 도쿄에서 투함한 그림엽서가 샌프란시스코의 오카시게키에 도착하기까지, 20일에서 1개월 미만은 걸렸던 것이 된다.

 

幸徳秋水漢詩かれた絵葉書3 月末にサンフランシスコにあったことが確認できる資料されている

사실 행덕추수의 한시가 적힌 그림엽서가 3월 말 샌프란시스코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다.

 

安重根1910 3 26 処刑されるとサンフランシスコ在住朝鮮人団体国民会発刊していた週刊新聞新韓民報1910 3 30 日付紙面安重根追悼記事掲載したそしてそこには幸徳秋水漢詩った絵葉書写真掲載されていた11)(19)。

안중근이 1910326일 처형되자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조선인단체 국민회가 발간한 주간신문 신한민보는 1910330일자 지면에 안중근의 추모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행덕추수의 한시가 담긴 그림엽서 사진이 실려 있었다(그림 11)(19).

 

 

この事実から逆算すると幸徳秋水東京絵葉書1 入手それに漢詩んで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あてに2 月中旬くとも2月下旬には投函した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ある

이 사실로부터 역산하면, 코토쿠 추스이는 도쿄에서 그림엽서 1을 입수해, 거기에 한시를 써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 앞으로 2월 중순, 늦어도 2월 하순에는 투함했다고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新韓民報編集発行人だった崔正益などと岡繁樹とのつながりは確認できないしかし3月末時点でこの幸徳秋水漢詩かれた安重根写真岡繁樹手元にしかなかったわけで,『新韓民報掲載された写真はサンフランシスコ平民社岡繁樹提供したものということになる

신한민보의 편집 발행인이었던 최정익 등과 오카 시게키와의 연결고리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3월말의 시점에서 이 행덕추수의 한시가 쓰여진 안중근의 사진은 오카 시게키의 수중 밖에 없었던 것으로, 신한 민보에 게재된 사진은 샌프란시스코 평민사의 오카 시게키가 제공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

 

ところで幸徳秋水3 22 湯河原天野屋旅館菅野スガと投宿した。『通俗日本戦国史執筆のためである投宿後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った絵葉書っている

그런데, 코토쿠 아키미즈는, 322일에 유가와라의 아마노야 여관에 칸노 스가와 함께 투숙했다. 통속 일본전국사의 집필을 위해서이다. 투숙 후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岡樹樹)에게 보낸 그림엽서가 남아 있다.

 

其後御無沙汰申譯ありません小生相変らず非常逆境にて東西放浪漸昨今當所落付きました幸衛事昨年来一方ならぬ御厄介感謝致します今日右御礼までそのユツクリきます矢野川からも詳細承りました諸君へよろしく御伝声下さい小生今此処でチヨツトした著述をしてります出来ましたらります

그 후로는 격조했습니다. 소생도 여전히 비상한 역경으로, 동서 방랑점에 이르렀습니다, 고우에사 작년 이래 한 번도 아닌 폐를 끼쳐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우에 감사 인사까지, 그 중에서 유츠쿠리 쓰겠습니다, 야노가와로부터도 자세한 내용을 받았습니다, 제군에게 잘 전해 주십시오, 소생은 지금 여기서 절절한 저술을 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보내겠습니다.

 

日本相州湯河原天野屋方にて 幸徳秋水20

일본 소슈 유가와라 아마노야가타에서 코토쿠 슈스이(20)

 

日付かれていないが文面から3 月末から4 月初あたりに投函した葉書かとわれるここでは漢詩んでったはずの安重根絵葉書についてらの言及もないつまり幸徳秋水からは自分った絵葉書についてらかの依頼えばサンフランシスコでの絵葉書作成などをしていたわけではなかったものとわれる

날짜는 적혀 있지 않지만, 문면으로부터 3월말에서 4월초 쯤에 투함한 엽서라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한시를 써 보냈을 안중근의 그림엽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 코토쿠 추스이로부터는 자신이 보낸 그림엽서에 대해 어떠한 의뢰(예를 들면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그림엽서 작성 등)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岡繁樹幸徳秋水漢詩った絵葉書3月中旬頃るとその写真新韓民報提供するとともに幸徳秋水漢詩安重根写真複製したものに日本語キャプションを英訳してそれに幸徳秋水紹介する英文自分経営する金門印刷所絵葉書作成したのであろう4 後半幸徳秋水湯河原天野屋からった絵葉書って幸徳秋水居所がわかった岡繁樹作成した絵葉書見本として天野屋幸徳秋水宛った

오카시게키는 행덕추수의 한시가 들어있는 그림엽서를 3월 중순경에 받으면 그 사진을 신한민보에 제공함과 동시에 행덕추수의 한시와 안중근의 사진을 복제한 것에 일본어 캡션을 영역하고 거기에 행덕추수를 소개하는 영문을 더해 자신이 경영하는 금문인쇄소에서 그림엽서를 작성했을 것이다. 4월의 후반에, 코토쿠 아키스이가 유가와라 아마노야로부터 보낸 그림엽서를 받고 코토쿠 아키스이의 거처를 알게 된 오카 시게키는, 스스로 작성한 그림엽서를 견본으로서 아마노야의 코토쿠 아키스이 앞으로 보냈다.

 

幸徳秋水がそれをれるのは5 20 日前後であるその一枚5 26 和歌山新宮大石誠之助書簡とともにった

행덕추수가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것은 520일 전후이다. 그 한 장을 526일에 와카야마 신구의 오오이시 세이노스케에게 서한과 함께 보냈다.

 

大石誠之助オレゴン州立大学医学部卒業モントリオール大学やインドのムンバイ大学への留学経験もある英語圏足掛かりがある人物であった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からられてきた英文キャプションりの安重根絵葉書見本をどのように活用すべきか大石誠之助のアイデアやアドバイスに幸徳秋水期待したのかもしれない

오이시 세이노스케는 오리건 주립 대학의 의학부를 졸업하고 몬트리올 대학이나 인도의 뭄바이 대학으로의 유학 경험도 있는 영어권에 발판이 있는 인물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오카시게키가 보내 온 영문 캡션이 들어간 안중근의 그림엽서의 견본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오오이시 세이노스케의 아이디어나 어드바이스에 코토쿠 아키미즈는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この時点,「見本幸徳秋水手元一枚大石手元一枚あったことになるところが幸徳秋水書簡同封してったとする安重根絵葉書大石誠之助押収品リストにはげられていない

이 시점에서, 견본은 코토쿠추스이의 수중에 1, 오이시의 수중에 1매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런데 행덕추수가 서한에 동봉해 보냈다는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오이시 세이노스케의 압수품 목록에 올라 있지 않다.

 

そしてその絵葉書沖野岩三郎巻物表装されて今日わっているのである

그리고 그 그림엽서는 오키노 이와사부로의 두루마리에 표장되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沖野岩三郎による保管

오키노 이와사부로에 의한 보관

 

当時新宮しくしていた大石誠之助沖野岩三郎とはしばしば機会があった家宅捜索ける前日6 2 沖野岩三郎来訪した明治学院関係者一緒大石誠之助いにっているそのあるいはそれ以前大石誠之助沖野岩三郎にこの絵葉書見本手渡した可能性えられる3 日早朝から沖野岩三郎自宅徹底した捜索われ長時間にわたって調べもなわれたしかし沖野岩三郎逮捕れた裁判にかけられることがなかったため沖野岩三郎については押収品リストは存在しないそのためどのようなものが沖野岩三郎手元にあったのかはわからない

당시 신궁에서 친하게 지내던 오이시 세이노스케와 오키노 이와사부로와는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가택 수색을 받기 전날인 62일도,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내방한 메이지 학원의 관계자와 함께 오오이시 세이노스케를 만나러 가고 있다. 그 때인가, 혹은 그 이전에, 오오이시 세이노스케가 오키노 이와사부로에게 이 그림엽서 견본을 건넸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3일 이른 아침부터, 오키노 이와사부로의 자택도 철저한 수색이 행해져 장시간에 걸쳐 조사도 행해졌다. 그러나 오키노 이와사부로(沖野岩三三郎)는 체포를 면했다. 재판에 회부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오키노 이와사부로에 대해서는 압수품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어떠한 것이 오키노 이와사부로의 수중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でこそ幸徳秋水安重根称賛する漢詩いた絵葉書てきたら大変なことになる見逃されるわけがないとわれがちだが幸徳秋水所持していた安重根絵葉書大逆事件とのわりで問題に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押収品のリストでは安重根肖像のところは省略されている重要視されなかったからであろうまた裁判でもこの絵葉書げられることはなかった

지금은 행덕추수가 안중근을 찬양하는 한시를 쓴 그림엽서가 나오면 큰일이 난다, 놓칠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행덕추수가 소지하고 있던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대역 사건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압수품 목록에는 안중근의 초상 부분은 생략돼 있다.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재판에서도 이 그림엽서가 거론되는 일은 없었다.

 

安重根絵葉書4 月末になって製造販売じられたが所持じられていたわけではない6 3 家宅捜索たった警察官気付かなかったのかもしれないしづいたとしても押収されたり没収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のかもしれない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4월 말에야 제작·판매가 금지됐지만 소지가 금지된 것은 아니다. 63일에 가택 수색에 임한 경찰관이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눈치챘다고 해도 압수되거나 몰수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安重根絵葉書東京だけではなく統監府干渉下かれていた大韓帝国首都京城でも1910 公然京城街頭展示されていたという証言がある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동경뿐만 아니라 통감부의 강한 간섭 아래 놓여 있던 대한제국의 수도 경성에서도 1910년 봄에 공공연히 경성의 거리에 전시되어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1926 昌慶宮日本人3 せた刃物ったわれ一人死亡もう一人重傷うという事件きた4 25 大韓帝国最後皇帝であった純宗李坧くなりその弔問出向いた日本人朝鮮総督斉藤実誤認されて襲撃された事件であるったのは29宋学先(ソンハクソン)この事件金虎門(クモムン)事件ばれている事件翌日1926 4 29 日付宋学先供述調書所轄鍾路警察署から京城地方法院検事正あてにられているその宋学先

1926년에 창경궁 앞에서 일본인 3명을 태운 차가 칼을 든 남자에게 습격당해 한 명이 숨지고 다른 한 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425,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죽고, 그 조문에 간 일본인이 조선총독 사이토 미노루로 오인되어 습격당한 사건이다. 습격한 것은, 29세의 송학선으로, 이 사건은 김호문 사건이라고 불리고 있다. 사건 다음 날인 1926429일자로 송학선의 진술조서가 관할 종로경찰서에서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게 보내져 있다. 그 중에서 송학선은

 

幼時本町絵葉書書店陳列しありし伊藤公暗殺犯人安重根写真鮮人等賞賛りたるを21

어릴적 혼마치에 엽서 서점에 진열되어 있던 아리시 이토 쿠미 암살범 안중근의 사진에 대해 선인등의 칭찬이 자자했던 것을 떠올리며 (21)

 

べたとある裁判でもかった安重根写真たことをべている22)。'

라고 말한 바 있다. 재판 중에서도 어렸을 때 안중근의 사진을 본 것을 말하고 있다(22). '

 

京城本町には本町2 丁目日之出商行という絵葉書額縁専門があった1906 創業自社絵葉書製造販売をするとともに内地各種絵葉書っており店頭絵葉書展示していた宋学先陳述によれば1910 本町日之出商行店頭安重根絵葉書展示されていてそれを朝鮮人賞賛しながらていた123 宋学先もその居合わせ安重根憧憬くようになったという

경성의 본 마을에는 혼마치 2가 모퉁이에 히노데상행이라는 그림엽서나 액자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가 있었다. 1906년의 창업으로, 자사에서 그림엽서의 제조·판매를 함과 동시에 내지의 각종 그림엽서도 취급하고 있으며, 매장에서 그림엽서를 전시하고 있었다. 송학선의진술에 의하면,1910년혼마치히노데상행店頭之出商行의점두에안중근의그림엽서가전시되어있어,그것을조선인이칭찬하면서보고있었다. 12~3세의 송학선도 그 자리에 있으면서 안중근을 동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安重根処刑された3 26 日以降安重根絵葉書京城発売しようとした日本人写真館発売禁止された1910 3 29 日付朝鮮語日刊紙大韓毎日申報,「安眞發售との見出しの記事日本人写真業者安重根氏写真複写して内外国人販売するという内容えているところが2 日後3 31 日付には

안중근이 처형된 326일 이후, 안중근의 그림엽서를 경성에서 발매하려던 일본인 사진관이 발매가 금지되었다. 1910329일자 조선어 일간지 대한매일신보는 안진발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인 사진업자가 안중근의 사진을 복사해 내외국인에게 판매한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2일후인 331일자에는

 

安眞發賣禁止

안진발매 금지

 

日本人岩田菊田写真館などが安重根氏写真複写販売するというのはすでに報道したところであるが内部内務省ではこれを治安妨害するものとして4 日前発売禁止したという

일본인 이와타(岩田기쿠타(菊田) 사진관 등이 안중근씨의 사진을 복사 판매한다는 것은 이미 보도한 바 있으나, 내부(내무성)에서는 이를 치안을 방해하는 것으로 4일 전에 발매를 금지했다고 한다

 

という記事掲載されているこの記事内容しいとすれば京城岩田写真館菊田写真館安重根写真販売しようとしてそれがぜられるのは1910 3 月末それ以前京城本町街頭安重根写真絵葉書展示されていたということになる

라는 기사가 실리고 있다. 이 기사 내용이 맞다면, 경성에서 이와타 사진관이나 키쿠타 사진관이 안중근의 사진을 판매하려고 해서 그것이 금지되는 것은 19103월말로, 그 이전에 경성의 혼마치의 거리에 안중근의 사진(그림엽서)이 전시되어 있었다는 것이 된다.

この岩田写真館とは絵葉書2 にある京城岩田冩眞舘製版部であるこの当時店主岩田鼎南大門通店舗えていた絵葉書2 がこの販売じられたものである可能性宋学先った本町絵葉書書店陳列されていたのは場所製作時期からいって絵葉書2 ではなかろうむしろ未使用絵葉書1現在韓国国内されていることをわせると東京2 には販売されていた絵葉書1 日之出商行仕入れて店頭いていたとみることができる

이와타 사진관은 그림엽서 2에 있는 경성 이와타 신관 제판부이다. 이 당시는, 점주인 이와타 타다시는 남대문통에 점포를 두고 있었다. 그림엽서2가 이때 판매가 금지된 것일 가능성은 높다. 송학선이 말한 혼마치 그림엽서 서점에 진열되어 있던 것은 장소나 제작의 시기로부터는 그림엽서2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사용하지 않는 그림엽서1이 현재 한국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을 고려하면, 도쿄에서 2월에는 판매되고 있던 그림엽서1을 히노데상행이 매입해 매장에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併合前のこの時期併合後朝鮮内地では々な対応なっていた併合直前韓国京城東京とでは安重根絵葉書取扱にもらかないがあった東京では安重根絵葉書規制されることもなく4 月末までは販売されていたさらに東京られた安重根絵葉書京城でも一番のメインストリートである本町通絵葉書専門店店頭かれていた時期もあったのである

병합 이전인 이 시기에도 병합 이후에도 조선과 내지는 여러 가지 대응이 달랐다. 병합 직전의 한국 경성과 도쿄는 안중근의 그림엽서 취급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도쿄에서는 안중근의 그림엽서가 별다른 규제 없이 4월 말까지는 판매되고 있었다. 게다가 도쿄에서 만들어진 안중근의 그림엽서는 경성에서도 가장 메인 스트리트인 혼마치도리의 그림엽서 전문점 매장에 놓여 있던 시기도 있었다.

 

おわりに

결론

 

幸徳秋水東京安重根絵葉書1 入手それに安重根える漢詩んでサンフランシスコの岡繁樹てて投函したそれをった岡繁樹幸徳秋水漢詩えた安重根獄中写真複写英文キャプションきの絵葉書ってそれを見本として湯河原天野屋滞在する幸徳秋水のもとにった

코토쿠 추스이는 도쿄에서 안중근의 그림엽서 1을 입수하고, 거기에 안중근을 찬양하는 한시를 써 샌프란시스코의 오카 시게키에게 투함했다. 그것을 받은 오카 시게키는, 코토쿠 추스이의 한시를 곁들인 안중근의 옥중 사진을 복사해, 영문 캡션 첨부의 그림엽서를 만들어, 그것을 견본으로서 유가와라 아마노야에 체재하는 코토쿠 추스이의 곁으로 보냈다.

 

それはちょうど安重根旅順監獄処刑される時期なり当局によって大逆事件がフレームアップされていく時期ともたまたまなっていた

그것은 마침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처형되는 시기와 겹쳐 당국에 의해 대역 사건이 프레임 업 되어 가는 시기와도 우연히 겹쳐 있었다.

 

絵葉書1 販売禁止されたものの沖野岩三郎大石誠之助からかった幸徳秋水漢詩かれたサンフランシスコ絵葉書見本押収されることもなく沖野岩三郎によって保管され日本敗戦大逆事件関係資料つとして表装されて明治学院寄贈されたのである

그림엽서 1의 판매는 금지되었지만, 오키노 이와사부로가 오이시 세이노스케로부터 맡은 코토쿠추스이의 한시가 그려진 샌프란시스코제의 그림엽서 견본은 압수당하지도 않고 오키노 이와사부로에 의해 보관되어 일본의 패전 후 대역 사건의 관계 자료의 하나로서 표장되어 메이지 학원에 기증되었던 것이다.

 

沖野岩三郎1922 5 朝鮮満洲(中国東北部)旅行ている5 9 釜山上陸馬山鎮海慶州群山木浦全州清州忠州って京城そして仁川開城って今度京城から元山咸興京城平壌義州そして安東奉天撫順大連旅順っているこのについて沖野岩三郎翌年薄氷みて』(23出版して朝鮮中国東北部での体験している朝鮮人する日本人横柄差別的態度への批判随所垣間見られ31 独立運動にも関心しているしかし満洲最後旅順っているがこの裁判そして処刑された安重根への言及くない旅順での関心はもっぱら自身非戦論えた日露戦争についてけられている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19225월에 조선과 만주(중국 동북부) 여행을 떠났다. 59일 부산에 상륙하여 마산·진해·경주·군산·목포·전주·청주·충주를 돌아 경성으로, 그리고 인천·개성을 들러 이번에는 경성에서 원산(元山), 함흥(咸興), 경성(京城), 평양(平平壌), 의주(義州), 그리고 안동(安東), 봉천(奉天), 무순(撫順)과 대련[大連/여순]으로 돌고 있다. 이 여행에 대해서, 오키노 이와사부로는 이듬해 살얼음을 밟아 봐(23)를 출판해 조선이나 중국 동북부에서의 체험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거만하고 차별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3·1독립운동에도 강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만주로 들어가 마지막에는 뤼순에 들르지만 이곳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된 안중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뤼순에서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이 비전론을 주창한 러일전쟁에 대한 것이다.

 

沖野岩三郎安重根絵葉書保存けたのは幸徳秋水大石誠之助への追憶追悼意味からで大逆事件わる記録として書簡類巻物6 表装されたものであろう

오키노 이와사부로가 안중근의 그림엽서를 계속 보존한 것은 코토쿠추스이와 오이시 세이노스케에 대한 추억과 추도의 의미에서, 대역사건에 관련된 기록으로서 서한류 두루마리의 제6권에 표장된 것일 것이다.

 

しかしその一方この絵葉書今日まで保存されたことによって日本朝鮮半島との関係,「日本対朝鮮」「日本対韓国という国家レベルでの対立構造としてるのではなく国家権力りかざす侵略わんとするそれに々という構図でこの絵葉書られ今日までえられている事実々がぶべきことはいのである

그러나 한편으로 이 그림엽서가 오늘날까지 보존됨으로써 일본과 한반도와의 관계를 '일본 대 조선', '일본 대 한국'이라는 국가적 차원의 대립구조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휘두르는 자·침략을 행하려는 자와 그에 항거하는 사람들이라는 구도 속에서 이 그림엽서가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많은 것이다.

 

1神崎清この暗黒裁判革命伝説3)』芳賀書店 1967しい経緯本文中後述する

 

2ユンビョンソク윤병석)「安重根写真안중근의사진)」『韓国独立運動史研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37 2010

都珍淳韓国安重根日本知識人たちの平和論比較してぜず”“なるもの千葉十七幸徳秋水徳富蘆花石川啄木夏目漱石」『2017 年第4 回国際学術会議龍谷大学所蔵安重根遺墨等関係資料展示予稿集 東アジア地域平和つめなおすための歴史認識2017

 

3SBS朝鮮独立れた主役 日本人独立闘士たち2011 8 15 日放送MBC安重根義挙105 年 終わらない戦争2014 8 13 日放送

 

4野口存彌沖野岩三郎踏青社 1989

 

5明治学院大学図書館沖野岩三郎文庫目録1982

 

6この鉛筆かれた数字巻物表装された書簡葉書にもまれており表装すときに順序えとしてまれた番号であろうただ表装されたものをみてみるとてが番号通りにんでいるわけではない

 

7大逆事件記録刊行会証拠物写1964 はしがき

 

8神崎清前掲書 170

 

9神崎清前掲書 168

 

10荒畑寒村寒村自伝上巻 岩波文庫1975 194

 

11加藤哲郎反骨在米ジャーナリスト岡繁樹1936年来日偽装転向」『インテリジェンス4 20045

 

12幸徳秋水顕彰する秋水通信23 2017 12

 

13沖野岩三郎きてゐる大阪屋号商店 1925

 

14野口存彌沖野岩三郎踏青社 1989

 

15韓国国史編纂委員会統監府文書7 巻 文書番号271 旅順監獄での安重根陳述內容

 

16三田村鳶魚娯楽江戸恵風館 1925

 

17) 『顕宗改修実録顕宗11 5 13 日条重普又陳定平甲士朴大有文川鄕吏全茂績斷指活其父母宜蒙褒奬上曰令該曹特行旌表洪重普がまたして定平甲士朴大有文川郷吏全茂績断指してその父母けたので褒賞して奨励すべし国王曰担当部署をして善行すべし。)」

 

18佐藤飛文解説明治学院歴史資料館資料集8 2011

 

19) 『新韓民報1910 3 30 日付紙面現在ソウルの安重根記念館展示されている

 

20幸徳秋水全集編集委員会幸徳秋水全集9 1982 515 絵葉書岡繁樹遺族高知文学館寄贈したされている

 

21韓国国史編纂委員会データベース国内抗日運動資料 京城地方法院検事局文書 検察事務する記録3京鍾警高秘第4769 号 吊侯者殺害する

 

22) 『時代日報1926 7 16 日付平素から安重根崇拝

 

23沖野岩三郎薄氷みて大阪屋号書店 1923

 

 

 

(1) 칸자키 키요시 이 암흑재판(혁명전설3)하가서점 1967. 자세한 경위는 본문중에서 후술한다.

 

(2) 윤병석, 안중근의 사진, 한국독립운동사연구372010

도진순한국의 안중근과 일본 지식인들의 평화론 비교 - "합치고 동하지 않음" "닮고 틀리는 것" 지바17·유키토쿠추스이·도쿠토미로카·이시카와 타쿠키·나쓰메 소세키」『2017년 제4회 국제학술회의·류코쿠대학 소장 안중근 유묵 등 관계 자료 전시 예고집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다시 바라보기 위한 역사인식' 2017

 

(3) SBS 조선독립의 숨은 주역 일본인 독립투사들' 2011815일 방송, MBC '안중근 의거 105년 끝나지 않은 전쟁' 2014813일 방송

 

(4) 노구치 다마야 오키노 이와사부로답청사 1989

 

(5) 메이지가쿠인대학도서관오키노이와사부로문고목록1982

 

(6) 이 연필로 쓰여진 숫자는 두루마리에 표장된 다른 서한이나 엽서에도 쓰여져 있어, 표장에 낼 때에 순서의 기억으로서 써진 번호일 것이다. 단지, 표장된 것을 보면 모든 것이 번호대로 나란히 있는 것은 아니다.

 

(7) 대역사건기록간행회 증거물사1964 엽서

 

(8) 칸자키 키요마에 게제서 170

 

(9) 간자키 기요시 앞에 게제서 168

 

(10) 아라하타 한촌한촌자전상권 이와나미문고 1975194

 

(11) 카토 테츠로 "반골의 재미 저널리스트 오카 시게키의 1936년 일본 방문과 위장 전향" "인텔리전스" 4(20045)

 

(12) 고토쿠추수를 현창하는 모임 추수통신23(201712)

 

(13) 오키노 이와사부로 나는 살아있다오사카야호 상점 1925

 

(14) 노구치 다마야 오키노 이와사부로답청사 1989

 

(15) 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 문서 제7권 문서번호 271 뤼순감옥에서의 안중근 진술내용

 

(16) 미타무라연어 [오락의 에도] 에후칸 1925

 

(17) 현종개수실록현종 11513일 조 "중보또진정평갑사박대유문천향리전무적단지활치부모의몽포장上曰令해당조특행정표(洪重普)가또주하여"정평갑사박대유와문천향리전무적이단치하여그부모를살렸으니포상하고장려하라". 국왕이 말하기를 "담당부서로 하여금 특히 선행을 기려 세상에 널리 나타내도록 하라"."

 

(18) 사토 히문 해설메이지학원 역사자료관 자료집82011

 

(19) 신한민보1910330일자 지면은 현재 서울 안중근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20) 행덕추수 전집 편집위원회 행덕추수 전집91982515 페이지. 그림엽서는 오카 시게키의 유족이 고치 문학관에 기증한 가운데 남아 있다.

 

(21) 한국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국내 항일운동 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검찰사무에 관한 기록3"경종경고비 제4769호 매후자 살해에 관한 건

 

(22) 시대일보 1926716일 평소 안중근 숭배

 

(23) 오키노 이와사부로 살얼음을 밟고오사카야호 서점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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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몬순혁명의 청년 대표자 3명이 한국을 방문합니다.

 

몬순혁명 대변인이자 방글라데시 개헌위원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Mustain Billah Zahir)씨는 대한민국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Korea Democracy Foundation: KDF)의 초청으로,

 

다카대학교 법과대학원생 사미아 악타르(Samia Akther)씨와 브라크대학 인류학과 졸업생이자 사진작가 모스피쿠르 라흐만 조한(Mosfiqur Rahman Johan)씨는 <몬순 클럽(대표, 이고은)>의 초청으로

 

114일부터 11일까지 한국을 방문합니다.

 

 

무스타인 빌라씨는 2024117(), KDF의 글로벌포럼에 참가해 주제발표를 하게 됩니다. 발표제목은 방글라데시 7월 학살과 저항의 언어입니다.

 

<몬순 클럽>은 무스타인 자히르씨의 발표문 초고를 입수해 한국어 번역을 소개합니다. (번역: 이고은,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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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대학살, 몬순 혁명, 그리고 방글라데시의 저항의 언어

by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Mustain Billah  Zahir)

 

2024년 여름, 세계는 가장 흥미진진한 운동 경기를 보기 위해 파리에 모였습니다. 세계의 이목이 각국 최고 인재들이 겨루는 올림피아드에 집중되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지만, 이 화려한 스포츠 행사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고, 방글라데시는 단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는 다른 이유로 파리에서 주목받았고, 이는 이 나라와 그 정치에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입니다.

 

방글라데시의 유일한 노벨상 수상자인 유누스 박사는 파리 올림픽에 참석, 파리의 올림픽 유치에 기여한 공로로 722'무함마드 유누스 교수 광장'이 명명되는 영예를 받았습니다.

 

 

유누스가 파리에서 젊은 선수들이 발휘하는 탁월한 재능을 지켜보는 동안, 그의 마음 한편에는 고국의 젊은 학생들이 살해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20247월 초부터 다카 거리와 대학 캠퍼스, 그리고 여러 주요 도시에는 수천 명의 시위대로 가득했습니다. 7월초 학생들이 차별적인 공무원 채용제의 개혁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이 나라 역사에 새로운 장을 쓰게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45백만 명이 넘는 방글라데시의 청년들 중에서 약 13백만 명이 교육이나 취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자리를 얻을 가능성은 정치적으로 왜곡된 공무원 채용 할당제로 더욱 희박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대학 졸업생들이 선호하는 직업을 얻는 데에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부패한 시스템의 개혁을 요구한 것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옳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총리였던 셰이크 하시나는 이 요구를 무시했고, 그녀가 늘 사용하던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녀는 지난 15년 동안 모든 반대 요구를 억압하기 위해 같은 전술을 사용했고, 세 차례나 선거조작으로 권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학생들의 근본적이고 논리적인 요구는 비방과 모독, 폭력적 공격에 부딪혔습니다.

 

 

하시나의 대응은 잔인하고 어리석었습니다. 그녀는 대량 학살을 서슴지 않았고, 어린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군대와 준군사조직에 강경 진압을 명령했고, 그들에게 "즉각 사살(shoot at sight)"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광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준군사 세력은 헬리콥터로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습니다. 경찰은 수천 명의 시위대를 체포하기 시작했고, 한밤중에 학생들을 집에서 연행했습니다. 마치 나라가 외국 침략자들에게 점령당한 것 같았습니다.

 

1,500명 이상이 사망했고, 거의 2만 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그중 일부는 파편에 맞아 시력을 잃었습니다.

 

 

7월 중순부터 날마다 나라 전체에서 무자비한 살상이 계속되었습니다. 사상자가 늘어날수록 시위대의 수는 더욱 불어났습니다. 이는 방글라데시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15년 계속된 하시나의 독재 기간 중에 처음으로 테러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갑자기 사람들의 마음에서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누스 박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동안 그는 100개 이상의 조작된 소송과 징역형으로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는 정치적 발언을 삼갔고,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정권과 그 비판자의 주장에 분명하게 거리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파리에서 그는 국제 사회에 호소했습니다. 그는 방글라데시가 겪는 참혹한 현실을 공개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범상치 않은 일이 전개되고 있으며, 이 나라가 중요한 분수령을 넘어섰다고 느겼던 것입니다.

 

존엄성 회복을 위한 Z세대의 반란

 

714일의 기자회견에서, 하시나는 시위대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자유투사들의 손자들이 (할당제의) 혜택을 받지 않으면, 누가 받겠습니까? 라자카르(Razakars)들의 손자들입니까?"

 

하시나는 시위 학생들을 라자카르들의 자손에 비교했습니다. 라자카르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당시 파키스탄군과 협력하여 자유투사들과 싸웠던 민병대입니다.

 

 

그녀의 모독적 발언은 몇 시간 만에 다카 대학 기숙사에서 시위를 촉발시켰습니다. 그날 밤, 격분한 여학생들이 기숙사 밖으로 나와 "너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라자카르, 라자카르"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습니다.

 

학생들의 저항에 대응하여 당시 아와미 연맹(AL)의 사무총장 오바이둘 카더(Obaidul Quader)는 당 회의에서, 악명 높은 자신들의 학생 조직인 방글라데시 차트라 리그(BCL)'불온한 학생들'을 충분히 제압할 것이라고 발언했습니다.

 

 

715, 카더의 발언 직후 BCL은 다카 대학에서 학생 시위대를 잔인하게 공격하며 몽둥이, 대나무 막대기, 곤봉 등으로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고, 많은 학생들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두려움을 딛고 일어선 불꽃

 

716, 영문학과 학생 아부 사예드(Abu Sayed)가 뜻밖의 행동으로 전국을 결집시켰습니다. 그는 학생 시위대에 참가하던 중 경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실탄을 피해 도망치는 동안 사예드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홀로 서서, 두 팔을 벌리고, 가슴을 활짝 열고 경찰의 사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백주대낮에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사예드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하시나가 만든 공포의 장막이 무너졌고, 아부 사예드의 용기가 전염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사람들, 특히 청년들은 총구 앞에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붉은 몬순과 물

 

사예드의 순교 이틀 후, 또 다른 용감한 학생이 다카의 시위 중심지에서 물병을 들고 달리는 모습이 영상에 포착되었습니다.

 

수학을 전공한 후 MBA 과정에 진학한 미르 마흐푸주르 라만 무그도(Mir Mahfuzur Rahman Mughdo)는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 시위대를 해산시킬 때 우타라(Uttara)에서 시위대에게 물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총알이 그의 이마에 명중해 오른쪽 귀를 뚫고 관통했습니다. 그는 15분 동안 더 숨을 쉴 수 있었지만,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에 사망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물을 나누어주던 무그도의 영상은 무슬림 사회에 뿌리내린 강력한 이미지, 즉 카르발라(Karbala) 이야기를 상기시켰습니다. 무그도의 죽음을 담은 영상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손자, 후사인 이븐 알리의 비극적인 역사를 연상시켰습니다.

 

유프라데스 강가에서 후사인 이븐 알리는 하시나와 같은 억압적인 정권에게 패배했고 부하들과 함께 학살당했습니다. 그들은 포위를 당해 며칠 동안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무그도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영상은 수백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방글라데시 전역에 퍼졌고, 무그도의 마지막 말을 전했습니다. "! 물이 필요해?"

 

사예드가 당긴 불길이 무그도의 순교로 화산처럼 폭발했고, 이는 스러진 목숨들을 위한 정의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군중들이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다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수많은 대중을 단결시켰고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즉 공포 정치를 무너뜨리고 살인적인 몰록(Moloch)으로부터 나라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저격수와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시위대에 발포하고, 어린이들까지 무차별로 사살하는 하시나 정권의 아와미 리그(AL) 깡패들과 보안군들이 바로 그 몰록이었습니다.

 

전국적 통행금지와 인터넷 차단

 

이 때쯤, 어떤 폭력도 대중의 물결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매일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자는 최후의 수단에 의존했습니다. 719, 그는 전국적으로 통행금지를 발효하고 군대를 배치했습니다.

 

 

파시스트 아와미 리그(AL)의 사무총장은 다시 한 번 카메라 앞에서 즉각 사격(shoot-on-sight)” 정책을 발표하면서 시위자는 누구든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저항운동을 완전히 진압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통행금지와 함께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접근이 차단되었습니다. 온 나라가 창살 없는 감옥이 되었습니다. 군대가 거리를 순찰했고, 외부 세계와의 소통이 단절되었습니다.

 

이 단계에서 저항운동은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했습니다. 유누스 박사는 파리에서 인터뷰를 통해 국제 사회의 주목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대담한 성명을 발표해, 정부가 군대를 동원함으로써, 마치 외적이 이 나라를 침공한 것처럼 시위자들과 맞서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자국민을 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최후의 전투

 

시위를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정권은 학생들에게 가짜 협상 게임을 제안했습니다. 정보기관은 학생 지도자들에게 협상에 참여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경찰은 시위 조직자 6명을 구속했습니다.

 

728, 경찰은 이 시위 조직자들에게 비디오 성명을 녹화하도록 강요하면서 예정된 시위 일정을 연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효과만 일으켰습니다. 학생들은 납치나 강요된 비디오 성명이 대중을 저지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같은 정부의 조치는 학생과 대중을 더욱 격분시켰습니다. 다른 시위 조직자들은 즉시 거리로 나왔고, 비디오 성명은 가짜라고 반박했습니다.

 

학생 지도자들은 전면적인 비협조 운동을 촉구했습니다. 통행금지는 무시되었고, 수천 명의 시위자들이 도심과 공원, 주요 거리와 공공장소에 모여 하시나의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파시스트 독재자의 몰락

 

84일 밤, 학생들이 다카 행진을 발표했고, 수백만 명이 여러 장소에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아침까지 수십만 명이 하시나의 관저를 향해 행진했습니다.

 

그녀는 군 헬리콥터를 타고 인도로 도주했습니다. 그녀가 도망간 뒤에는 부패와 학살과 실종, 역기능의 사법부, 그리고 경제위기 직전의 나라가 남았을 뿐입니다.

 

 

85일은 맑고 화창했고, 이 특별한 몬순의 도시 다카는 아자디!’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해방의 언어가 공기 중에 퍼졌고, 수백만의 행진자들의 얼굴에는 자유의 기쁨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믿기지 않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방글라데시 2.0의 시작

 

이틀간의 치열한 논의 끝에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몬순 혁명으로 막 탄생된 제2공화국의 운전대를 맡을 사람으로 유누스 박사보다 나은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가 아직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그들은 유누스를 믿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새로운 임시 과도정부는 202488일에 출범했고, 유누스 박사가 방글라데시 2.0의 수장으로 임명됐습니다.

 

 

이제 방글라데시는 무너진 시스템을 일으켜 세우고 트라우마를 겪은 국민을 치유해야 하는 막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파시즘의 해악이 재발하는 것을 막는 데에 필요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유와 정의, 존엄성 속에서 번영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만행, 정치적 폭력,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신뢰성 있는 책임과 회복의 메커니즘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국제적 지지와 지원, 연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외국의 친구들이 나서 주기를 원하고, 이 역사적인 여정에 참여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같은 가치와 헌신과 희망을 가지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아시아 태평양과 그 너머에서 사람들과 시민단체들과 강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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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자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Mustain Billah  Zahir)씨는 시민 참여 사상가로, 한국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KDF)의 국제 민주주의 친선대사이자, 현재 방글라데시 개헌위원으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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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문 원문)

The July Massacre, Monsoon Revolution and the Language of Resistance in Bangladesh

by Mustain Billah Zahir 

 

In the summer of 2024, the world gathered in Paris to experience the most riveting athletic performances. All eyes were on the Olympicsthe oldest Olympiad where nations vie to outshine each other with the best of their best.

 

In spite of being the world’s eighth populous country, Bangladesh usually remains unrecognisable in this magnificent sporting event. This time it was not an exception either and the country failed to secure a single medal. But Bangladesh was visible in Paris for a different reason, and it would be proved to be fateful for the nation and its polity.

 

The country’s only Nobel Laureate Dr. Yunus was in the Paris Olympics, being honoured with Place du Professeur Muhammad Yunus on July 22 to celebrate his contributions to the city's Olympic bid.

 

While Yunus was witnessing a generation of young athletes showcasing the best of their talents in Paris, at the back of his mind, he was burdened with the grim stories of young students getting killed in his homeland. From the beginning of July 2024, streets of Dhaka, university campuses and other divisional cities were filled with thousands of protesters.

 

When students took to the streets in early July, demanding reforms of the discriminatory government job recruitment, they had little idea how it was about to write a new chapter in the history of their country.

 

A country of over 45 million youth, Bangladesh has about 13 million of young people who are neither in study, and to make matters worse, they don’t have a job either. The slime chance of getting a good job was further complicated by the politically twisted discriminatory public service quota system.

 

This is unmistakably a big problem for the graduates seeking the coveted jobs. Therefore, the students were morally and politically right in demanding the reform of the corrupt system.

 

However, the then Prime Minister Sheikh Hasina was very dismissive about the movement and didn’t bother to employ her usual playbook. She has been using the same tactics to quell every opposition demand in the last 15 years and holding onto power by conducting three consecutive farcical elections. Hence, this very basic and logical demand was met with vilification, dehumanising tactics and violent attacks.

 

The response from Hasina was brutal and imbecilic. She didn’t care to let loose a monstrous killing spree, even children were not spared. She ordered a crackdown that was overseen by the army and the paramilitary forces who were given shoot at sight orders.

 

The insanity even touched the skyhelicopters used by paramilitary forces were mobilised to shoot at protestors. Police started rounding up thousands of protestors, hounding young students at midnight by picking them up from their homes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 if the country was in the grip of some foreign invaders. More than one fifteen hundred have been killed, nearly twenty thousand injured including those blinded by pellet injuries.

 

From the middle of July, day in and day out the whole country woke up to incidents of one senseless killing after the other. The more she was killing, the bigger the number of protesters grew. It was a pivotal moment in the country’s history, as for the first time in her 15 years of authoritarian rule, no amount of terror was working and suddenly fear evaporated from the minds of the people.

 

This was also true of Dr. Yunus. Despite facing over a hundred trumped up cases and a deferred jail term, he seldom talked about politics, rather maintained a stoic indifference towards the democratic backsliding, kept a sharp distance from being associated with the critics of the regime or dissident voices.

 

But, not this time. From Paris, he appealed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laid bare the facts of brutality and sought their urgent attention to what was happening in Bangladesh. He could sense that something extraordinary was unfolding and the country crossed a watershed moment.

 

> Gen-Z Revolt To Recapture Dignity

During a news conference on July 14, in response to a question Hasina made a very derogatory remark about the protesters“If the grandchildren of freedom fighters don’t receive [quota] benefits, who will? The grandchildren of Razakars?” By this aspersion, she compared the student protesters to children and grandchildren of Razakarsa militia force who collaborated with the Pakistan army and fought against the freedom fighters during the country’s Liberation War of 1971.

 

Her contemptuous comments ignited protests within hours at different dormitories of Dhaka University. That night, agitated female students took the lead, came out from the dormitories chanting the slogan “Who are you? Who am I? Razakar, Razakar.”

 

In response to students’ defiance, Obaidul Quader, the then general secretary of Awami League (AL), commented at a party meeting that their notorious student wing, BCL was enough to subdue ‘the unruly students’. On July 15, soon after Quader’s comment, BCL launched a vicious assault on student protesters at Dhaka University by beating them with rods, bamboo sticks and clubs, many were severely injured.

 

> The Spark Of The Fearlessness

On July 16, Abu Sayed, a university student studying English Literature triggered the surprising turn of events that would galvanise the whole nation. He was one amongst many protesting students attacked by the police. While others were in retreat to save themselves from the live bullets, Sayed did a very unusual thing. He stood firm, standing alone with two hands stretched out, fearlessly holding his chest open at the firing range. Within a moment, he was shot dead in broad daylight.

 

Across the nation, through social media the video footage of Sayed’s heroic posture spread like wildfire. The iron dome of fear created by Hasina began to crumblethe courage of Abu Sayed became contagious. From the next day, people, especially the youth, took to the streets en masse, standing tall and ready to sacrifice their lives in front of the guns.

 

> The Water Of The Red Monsoon

After two days of martyr Abu Sayed, another valiant student was seen on a video holding water bottles and running amidst the throng of people who gathered in one of the epicentres of the demonstration in Dhaka. Mir Mahfuzur Rahman Mughdo, a graduate in Mathematics who was doing his MBA was seen distributing water to protesters in Uttara after law enforcers fired teargas shells to disperse them. A bullet hit his forehead and pierced through his right ear. He was able to breathe for another 15 minutes. He was dead by the time his friend and fellow protesters rushed his listless body to the hospital.

 

The video of Mugdho handing out water before his death touched to the core of a deep-rooted and powerful imagery in the Muslim society, i.e., the story of Karbala. The emotional floodgate opened by Mughdo’s murder instantly electrified the memory of the tragic history of the Prophet Muhammad’s grandson.

 

On the bank of the Euphrates River Ḥussain ibn Ali was defeated and massacred along with his followers by an oppressive regime like Sheikh Hasina. While the group was under seize for days, they were denied access to water. The social media feeds of millions across Bangladesh could instantly relate to Mughdo’s last words“Water! Do you need water?”

 

The fire lit by Sayed, now became a volcano with Mugdho’s martyrdom becoming a beacon that showed the masses the only direction they could takehit the streets demanding justice for the lives lost. And it reverberated across the nation and united millions to think of the impossiblebringing down the reign of terror is not just necessary but essential to save the soul of the nation from a murderous Molochthe thugs of AL functionaries in cohort with security forces indiscriminately killing children, using snipers and even helicopters to gun down the protestors.

 

> Nationwide Curfew And Communication Blackout

By this time, it was apparent that no amount of the violence would be enough to stop the tide of the masses. Despite scores killed and hundreds injured every single day, the dictator turned to the last resorton July 19 imposed a nationwide curfew and deployed armed forces.

 

The Secretary General of the fascist AL, once again, announced on camera a “shoot-on-sight” policy to kill anyone protesting and vowed to crush the movement for once and all. In tandem with the curfew a communications blackout was imposed with the internet and social media access blocked. The entire nation was locked in what looked like an open prison, military convoys were patrolling the streets and no one could communicate with the outside world.

 

At this stage, the movement was visibly entering into the very final stage, but the outcome was not yet clear. Dr. Yunus gave an interview from Paris calling for international attention. With a bold statement, he said that by using the army the government was confronting the protestors as though a foreign enemy had invaded the country. “This is not how you deal with your own people.”

 

> The Final Battles

Unable to quell the protests, the regime set up a game of pseudo negotiation with the students. Intelligence agency mounted pressure on student leaders to engage in discussions. The police detained six movement coordinators. On July 28, the police forced these coordinators to record video statements urging student protesters to postpone all scheduled programs. But, that didn’t work, rather became counterproductive. Students made it clear that abduction or forcing students to issue video statements would not deter them.

 

This move by the government further incensed students and the masses. All other coordinators immediately took to the streets, denouncing the video statements. The student leaders called for an all-out non-cooperation movement unless their one-point demand was met. Defying curfew, protesters gathered in thousands at city centres, parks, major streets and other public places demanding Hasina’s resignation.

 

> The Fall Of the Fascist Dictator

On the night of 4th August, when students announced the march to Dhaka program, several million people started their march from different locations. By morning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were already marching towards Hasina’s official residence. She fled to India by a military helicopter leaving behind a legacy of rampant corruption, mass murder, enforced disappearances, dysfunctional judiciary and a country on the verge of economic collapse.

 

August 5th was a bright sunny day and in this distinctive monsoon Dhaka city turned into a sea of people, marching and chanting ‘Aazadi’! The language of liberation percolated in the air and the joy of freedom glowing over on the face of million marchersa great many of them were tearful and crying in disbelief.

 

> Steering Bangladesh 2.0

After two days of intense discussion the student leaders couldn’t find a better hand than Dr. Yunus to steer the wheel of the second republic bequeathed by the Monsoon Revolution. While he was still in Paris, they announced, “In Yunus we Trust!” The new interim government was sworn-in on the 8th August 2024 making Dr. Yunus the head of Bangladesh 2.0.

 

Now the country is confronted with an enormous challenge to navigate through the broken-down system and a traumatised nation. Necessary reforms are being initiated to prevent the evil of fascism resurface again. People want to flourish in liberty, justice and dignity.

 

In this regard dealing with the past atrocities, political violence and abuses of power will need a credible accountability and redress mechanism. It requires strong international support, assistance and solidarity. We would like friends across the board to come forward and be a part of this historic journey.

 

We wish to have a strong partnership with the people and civil society organizations who share the similar values, commitment and hopes for a better world in Asia Pacific and bey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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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tain Billah Zahir is a civic engagement thought leader, KDF International Democracy Goodwill Ambassador and currently serving as one of the members of the Constitutional Reform Commission in Banglade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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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all started with an email from Dhaka, the capital city of Bangladesh, from Mustain Zahir, a Bangladeshi civil rights activist, to Go-Eun Lee, a South Korean social activist.

 

 

The two were classmates at the Graduate School of Sociology at Sungkonghoe University in Seoul, Korea. Mr. Zahir, an international student from Bangladesh received his degree in 2016, and then participated in a series of projects related to 518 Gwangju.

 

Ms. Lee, Go-Eun, who majored in social movements in Bangladesh, worked on research projects at the Swedish Institute for Policy Studies for two years, and returned to Korea to work as a social activist. She has been an active participant in the <Muyong Shin> campaign since 2023.

 

 

In the email, Zahir described the situation in Bangladesh and asked for help.

 

"I'm so delighted to share that finally we got rid of the despot reigning and ravaging Bangladesh for the last 15 years! Now, we are passing through a momentous change after the successful mass uprising on 5th August 2024 that forced the autocrat to resign and flee from the country. She is now hiding in India!

 

"The student-people led Monsoon revolution has presented us with a historic opportunity to reimagine and rewrite the formation of a new political chapter. As a civil rights activist, and your friend, I'm proud to share that I have been very active during the movement and coordinated the student leaders at the forefront of this revolution. It was the best experience of my life, even though I had to go through ordeals of security crackdown and nightmarish situations!

 

"Before she left the country in the span of one month, the tyrant killed nearly one thousand people, thousands were severely injured and many more of the protesters are still traumatized. We are trying to collect the names, document the stories and wish to preserve this glorious history of our democratic struggle."

 

 

Having witnessed that the citizens of South Korea impeached then-President Park Geun-hye in 2016, and being familiar with the pro-democracy protests and sacrifices of the people of Gwangju in 1980, Mr. Zahir described South Korea as the role model for Bangladesh to redesign its politics and society.

 

"As you know in Korea C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initiating institutional mechanisms to find truths, seek accountability and instill the spirit to nurture ethos and sensibilities for the generations to come."

 

 

Mr. Zahir seems to believe that Bangladesh's monsoon revolution should learn from South Korea's experience in order to avoid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the Arab Spring that took place in the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a decade ago.

 

"Having this knowledge and exposure, I couldn’t think of any better place to seek advice and suggestions to undertake a formal approach for Bangladesh so that we can also begin a process to do similar work in preserving and cultivating the aspiration of the heroes who made the supreme sacrifice for democracy, freedom and justice."

 

 

To facilitate the exchange and cooperation of citizens from both countries, Mr. Zahir asked for four things

 

1. It would be a great help, if PSPD/May18 or other like minded organizations come forward to help us make a systematic documentation of the events.

2. Korean Civil Society members and organizations can help us to pursue the truth and accountability measures in a structured way.

3. The May18 Memorial can come forward to help us build a collaborative Museum of democratic struggle and Monsoon Revolution in Bangladesh.

4. Inviting a group of young leaders in Korea to have an immersive orientation and practical knowhow for a week to share their experience and learn from Korean civil societies to know and do the above things.

 

After receiving the email, Ms. Lee, Go-Eun asked for help from Peace MOMO, the Democracy Movement Memorial Association, and Muyong Shin, and Muyong Shin agreed to invite two student representatives from Bangladesh to Korea.

 

 

Muyong Shin formed a sister organization, <Solidarity for Bangladesh>, led by Ms. Lee, Go-Eun, and asked her to be in charge of inviting student representatives of the Monsoon Revolution. With Mr. Zahir's help, Solidarity for Bangladesh selected two student representatives.

 

Ms. Samia Akther from Dhaka University (law, graduate school) and Mr. Rahman Johan from BRAC University (anthropology, photographer) are appointed. They have been leaders of the student movement during the Monsoon Revolution and will be visiting South Korea from November 4-11 with Mr. Zahir.

 

 

While Mr. Zahir will be visiting Korea at the invitation of the Democracy Movement Memorial Project, Ms. Samia Akter and Mr. Rahman Johan's invitation was supported by Solidarity for Bangladesh.

 

The cost of their visit was calculated to be 4.5 million won, including airfare and lodging, and <Solidarity for Bangladesh> started a fundraising campaign. It decided that it would be most meaningful to have Korean citizens sponsor their invitation.

 

 

This is how <Solidarity for Bangladesh> was formed, declared support for the Monsoon Revolution, and started fundraising activities.

 

We sincerely ask the citizens of the Republic of Korea to participate in the fundraising campaign with a donation of $10 (or more) so that Ms. Samia Aktor and Mr. Rahman Johan can visit Korea and fulfill their purpose. Thank you.

 

Fundraising Account: Kakao Bank, 7979-77-26093 (SFB, Ms. Lee, Go-Eun)

Fundraising Period: October 11, 2024 - November 3, 2024

Fundraising goal: 4.5 million won (7 days and 8 nights for two student representatives of the Monsoon Revolution)

Crowdfunding: https://www.ohmycompany.com/reward/15728

 

방글라데시의 [몬순혁명]을 지지합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변화의 발걸음

www.ohmycompan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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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 text of Zahir's email)

Greetings from Bangladesh! Hope this email finds you well.

 

I'm so delighted to share that finally we got rid of the despot reigning and ravaging Bangladesh for the last 15 years! Now, we are passing through a momentous change after the successful mass uprising on 5th August 2024 that forced the autocrat to resign and flee from the country. She is now hiding in India!

 

The student-people led Monsoon revolution has presented us with a historic opportunity to reimagine and rewrite the formation of a new political chapter. As a civil rights activist, and your friend, I'm proud to share that I have been very active during the movement and coordinated the student leaders at the forefront of this revolution. It was the best experience of my life, even though I had to go through ordeals of security crackdown and nightmarish situations!

 

Before she left the country in the span of one month, the tyrant killed nearly one thousand people, thousands were severely injured and many more of the protesters are still traumatized. We are trying to collect the names, document the stories and wish to preserve this glorious history of our democratic struggle.

 

As you know in Korea C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initiating institutional mechanisms to find truths, seek accountability and instill the spirit to nurture ethos and sensibilities for the generations to come. Having this knowledge and exposure, I couldn’t think of any better place to seek advice and suggestions to undertake a formal approach for Bangladesh so that we can also begin a process to do similar work in preserving and cultivating the aspiration of the heroes who made the supreme sacrifice for democracy, freedom and justice.

 

And, this will also be an occasion to renew people to people ties between Bangladesh and Korea. In this regard, I would like to request few things:

 

1. It would be a great help, if PSPD/May18 or other like minded organizations come forward to help us make a systematic documentation of the events.

 

2. Korean Civil Society members and organizations can help us to pursue the truth and accountability measures in a structured way.

 

3. The May18 Memorial can come forward to help us build a collaborative Museum of democratic struggle and Monsoon Revolution in Bangladesh.

 

4. Inviting a group of young leaders in Korea to have an immersive orientation and practical knowhow for a week to share their experience and learn from Korean civil societies to know and do the above things.

 

These are my preliminary thoughts; I can expand on, given the interest and scope to explore a partnership. Will appreciate your kind help and advice in this regard.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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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일이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서 보내온 이메일 한 통으로 시작됐습니다. 방글라데시의 민권운동가 머스테인 자히르(Mustain Zahir)씨가 한국의 사회 활동가 이고은 선생에게 보내온 이메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의 동학입니다. 2016년 학위를 받은 방글라데시 유학생 자히르씨는 518광주 관련 프로젝트에 참가한 바 있다고 합니다. 또 방글라데시 사회운동을 전공한 이고은 선생은 졸업 후 2년간 스웨덴의 정책연구소 프로젝트를 수행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했고, 2023년부터는 <무용신> 활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메일에서 자히르씨는 방글라데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면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영어로 보내온 이메일은 한국어 식으로 의역됐고, 원문은 이 글의 맨 끝에 전재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학생과 시민들이) 15년 통치로 방글라데시를 피폐시킨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는 202485일 대규모 시위를 통해 권위주의 정부를 무너뜨렸고, 하시나 전총리가 방글라데시를 떠나 인도에 망명한 후, 우리는 역사적인 변화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몬순혁명>을 이끈 학생-시민들은 정치의 새 장을 열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민권운동가로서, 그리고 당신의 친구로서, 나도 이 혁명에 열성적으로 참가했고, 특히 이 혁명의 선봉에 선 학생 지도자들과 협력했습니다. 비록 당국의 보안단속을 피하면서 악몽 같은 상황을 견뎌야 했지만, 이 혁명은 제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습니다.

 

하시나 전총리는 방글라데시를 탈출하기 전까지 약 1개월 동안 1천여명의 시민을 사살했고, 수천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상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이들의 희생과 피해 정황을 기록함으로써, 영광의 역사로 전환되는 민주화 투쟁 과정을 밝히고 보존하려고 합니다.”

 

 

2016년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당시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하는 과정을 목격하고, 1980년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항쟁과 희생도 잘 알고 있는 자히르씨는 방글라데시의 정치와 사회를 새롭게 설계하기 위해 대한민국이 전범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시민사회는 (518광주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 소재를 찾아내고, 다음 세대의 상식과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정신을 일깨웠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한국의 경험을 잘 알고 있기에, 저는 앞으로 방글라데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조언을 얻기에 대한민국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히르씨는 방글라데시의 몬순 혁명이 10여년 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났던 아랍의 봄(Arab Spring)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한국의 경험을 배워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방글라데시의 민주화 과정을 지지하고 연대함으로써 양국 시민운동이 교류하고 협력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민주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최고의 희생을 바친 영웅들의 열망을 보존하고 고양하기 위해서 방글라데시와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협력은 방글라데시와 대한민국 사이에 시민 연대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양국 시민의 교류와 협력을 위해 자히르씨는 다음과 같은 4가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1. 참여연대나 518기념재단 등의 한국 단체들이 몬순 혁명 기록 작업에 도움을 주시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2. 한국의 시민들과 단체들이, 몬순혁명의 진실을 찾고 책임을 묻는 체계적인 방법을 자문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518기념관의 경험을 통해 <몬순혁명> 민주화투쟁 기념관이 설립되도록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4. <몬순혁명>의 젊은 지도자들을 약 1주일 동안이라도 한국에 초청해 주셔서 한국의 경험을 배우고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몬순혁명>에 대해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메일을 받은 이고은 선생은 <피스모모><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무용신>에 도움을 요청했고, <무용신>은 이에 부응해 방글라데시의 학생대표 2명을 한국에 초청하기로 했습니다.

 

 

<무용신>은 이고은 선생을 대표로 한 자매단체 <방글라데시 연대>를 구성하고, 몬순혁명의 학생대표 초청을 담당해 주시도록 부탁했습니다. 자히르씨의 도움으로 <방글라데시 연대>2명의 학생대표를 선정했습니다.

 

다카 대학교의 여학생 사미아 악터(Samia Akther, 법학 대학원)씨와 브라크 대학교의 남학생 라흐만 조한(Rahman Johan, 인류학, 사진작가)씨가 그들입니다. 몬순혁명 동안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이들은 자히르씨와 함께 114일부터 11일까지 한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자히르씨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방한하게 되지만, 사미아 악터씨와 라흐만 조한씨의 초청은 <방글라데시 연대>가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이들의 방한 경비는 항공료와 체재비를 포함 450만원으로 계산되었고, <방글라데시 연대>는 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모금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초청비용을 대한민국 시민들의 후원으로 마련하는 것이 가장 뜻이 깊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방글라데시 연대>가 구성되고 몬순혁명 지지를 선언하고 모금활동을 시작하게 된 경과입니다. 부디 대한민국의 시민들께서, 사미아 악터씨와 라흐만 조한씨가 한국을 방문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11만원(이상)으로 모금운동에 참여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후원계좌: 카카오뱅크, 7979-77-26093 (방글라데시 연대, 이고은)

모금기간: 20241011-113

모금목표: 450만원 (몬순혁명 학생대표 2명의 78일 방한 경비)

크라우드 펀딩: https://www.ohmycompany.com/reward/15728

 

방글라데시의 [몬순혁명]을 지지합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변화의 발걸음

www.ohmycompan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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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히르씨의 이메일 전문)

 

Greetings from Bangladesh! Hope this email finds you well.

 

I'm so delighted to share that finally we got rid of the despot reigning and ravaging Bangladesh for the last 15 years! Now, we are passing through a momentous change after the successful mass uprising on 5th August 2024 that forced the autocrat to resign and flee from the country. She is now hiding in India!

 

The student-people led Monsoon revolution has presented us with a historic opportunity to reimagine and rewrite the formation of a new political chapter. As a civil rights activist, and your friend, I'm proud to share that I have been very active during the movement and coordinated the student leaders at the forefront of this revolution. It was the best experience of my life, even though I had to go through ordeals of security crackdown and nightmarish situations!

 

Before she left the country in the span of one month, the tyrant killed nearly one thousand people, thousands were severely injured and many more of the protesters are still traumatized. We are trying to collect the names, document the stories and wish to preserve this glorious history of our democratic struggle.

 

As you know in Korea C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initiating institutional mechanisms to find truths, seek accountability and instill the spirit to nurture ethos and sensibilities for the generations to come. Having this knowledge and exposure, I couldn’t think of any better place to seek advice and suggestions to undertake a formal approach for Bangladesh so that we can also begin a process to do similar work in preserving and cultivating the aspiration of the heroes who made the supreme sacrifice for democracy, freedom and justice.

 

And, this will also be an occasion to renew people to people ties between Bangladesh and Korea. In this regard, I would like to request few things:

 

1. It would be a great help, if PSPD/May18 or other like minded organizations come forward to help us make a systematic documentation of the events.

 

2. Korean Civil Society members and organizations can help us to pursue the truth and accountability measures in a structured way.

 

3. The May18 Memorial can come forward to help us build a collaborative Museum of democratic struggle and Monsoon Revolution in Bangladesh.

 

4. Inviting a group of young leaders in Korea to have an immersive orientation and practical knowhow for a week to share their experience and learn from Korean civil societies to know and do the above things.

 

These are my preliminary thoughts; I can expand on, given the interest and scope to explore a partnership. Will appreciate your kind help and advice in this regard.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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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혁명으로 쫓겨난 셰이크 하시나를 살피다 보니까, 방글라데시 현대사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이 또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BNP)의 칼레다 지아(Khaleda Zia)입니다.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는 죽고 죽이는 가족사의 원한이 얽힌데다가, 이들의 정당이 정권을 다투는 주요 정당이었기 때문에, 방글라데시 현대사에서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두 여성은 1991년 이래 방글라데시의 총리를 역임했습니다. 칼레다 지아는 1991-1996년과 2001-2009, 셰이크 하시나는 1996-2001년과 2009-2024년에 방글라데시 총리였습니다.

 

칼레다 지아의 남편인 지아우르 라흐만은,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해방군 사령관을 역임한 군인으로, 1975년 쿠데타를 일으켜, 셰이크 하시나의 부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살해하고 대통령이 된 인물입니다. 지아우르 라흐만은 셰이크 라흐만의 아내와 형제들, 세 아들과 며느리들까지 모든 가족을 사살했고, 서독을 방문 중이던 셰이크 하시나와 그의 여동생 셰이크 레하나만 살아남았습니다.

 

 

쿠데타에 성공한 지아우르 라흐만은 1975년 계엄령 아래서 정부수반이 된 후, 1977년 대통령이 되어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를 창당, 이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5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젊은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1981년 사살당했습니다. 쿠데타 세력이 쿠데타를 당한 것이지요.

 

이 쿠데타로 집권한 후세인 에르샤드(Hussain Muhammad Ershad, 1930-2019)1983-1990년에 대통령으로 방글라데시를 통치했고, 재임중 창당한 자티야당(Jatiya Party)를 자신의 정치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에르샤드의 쿠데타정권은 그가 죽인 지아우르 라흐만의 아내 칼레다 지아의 BNP와 지아우르 라흐만이 죽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의 AL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1991년 총선에서 패배했고, 이 선거에서 승리한 BNP의 칼레다 지아가 총리가 됐습니다.

 

다음 총선인 1996년 선거에서 승리한 AL의 셰이크 하시나는 집권하자마자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을 죽인 1975년 쿠데타 가담자들을 체포해 주모자들을 죽였는데, 주모자의 대표격인 지아우르 라흐만을 처단하지 못한 것은, 그가 이미 에르샤드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이었지요.

 

 

셰이크 하시나는 또 정적인 칼레다 지아도 부정부패 정치인으로 몰아 5년형을 받고 복역하게 만들었는데, 올해 셰이크 하시나가 실각한 다음날 칼레다 지아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방글라데시의 세 주요 정당인 ALBNPJatiya가 쿠데타로 죽고 죽임을 당하면서 얽히고설킨 가운데 탄생한 셈입니다. AL이 중도좌파 정당이지만 좌파정당이 아니라 쿠데타의 잔재이자 민족주의 정당인 Jatiya와 연합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그것은 BNP의 기반인 민족주의 지지자들을 갈라놓기 위해서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암튼,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는 가족의 원한이 얽힌 가운데서도 지난 30년간 방글라데시의 정치를 이끌어왔다고 볼 수 있는데, 둘 다 부친과 남편의 후광으로 정치해 왔다는 공통점을 뺀다면, 칼레다 지아는 셰이크 하시나에 비해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셰이크 하시나가 축출된 지금, 석방된 칼레다 지아가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설지가 주목됩니다만, 80세에 가까운 칼레다 지아가 다시 총리에 도전할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방글라데시에는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정당들도 있지만, 존재감이 미미합니다. 가장 큰 좌파정당은 방글라데시 공산당(Communist Party of Bangladesh, CPB)인데, 총선 득표율이 1% 미만입니다. 이는 쿠데타 정권들이 공산당과 사회주의정당, 그리고 노동운동을 심하게 탄압해왔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CPB는 다른 좌파정당들과 연합하여 좌파민주전선(Left Democratic Front, LDF)을 결성, 꾸준히 총선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 오늘날 방글라데시의 정치지형은 독립운동 세력과 쿠데타 세력이 방글라데시의 세 주요정당을 구성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군소 좌파정당들이 독자적으로나 세 주요정당과 연합해서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어째 대한민국 정치 지형의 복사판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jc, 2024/10/4)

,

20247-8월의 방글라데시 몬순혁명의 성공으로 셰이크 하시나 총리는 사임하고 인도로 망명했습니다. 셰이크 하시나는 어떤 이유로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의 표적이 되었던 것일까요?

 

 

셰이크 하시나는 제1(1996-2001)와 제2(2009-2024)를 합해 20년 동안 총리로 재임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물론 세계에서도 최장기 여성 정부수반으로 기록됩니다.

 

셰이크 하시나는 방글라데시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과 2대 총리를 역임한 세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의 딸입니다. 셰이크 라흐만은 인도의 식민통치 아래서 발생했던 1757년의 벵골 독립전쟁 플래시 전투(Battle of Plassey) 이래 2백년 만에 벵골의 독립을 성취한 정치지도자로, 방글라데시의 국부로 칭송되는 인물입니다.

 

 

셰이크 라흐만은 1975년의 쿠데타로 암살됐습니다. 셰이크 하시나는 인도로 망명해 군부정권에 의해 입국 금지 당했지만, 부친 셰이크 라흐만이 설립한 방글라데시 아와미 연맹(AL)의 당수로 궐석 선출되어 1981년 귀국, 34세의 나이로 야당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중도좌파 성격의 AL 당수로 하시나는 후샤인 에르샤드(Hussain Muhammad Ershad) 군부정권의 탄압을 받았으나, 또 다른 야당 방글라데시 민족주의정당(BNP)의 칼레다 지아(Khaleda Zia)와 함께 에르샤드 군부독재에 맞섰습니다.

 

 

1991년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총선에서 승리한 BNP의 칼레다 지아가 방글라데시의 첫 여성 총리에 취임했고, 1996년 총선에서는 AL가 승리해 셰이크 하시나가 총리에 취임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도 민주화가 정착되고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시나는 첫 임기동안 긍정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인도와 관계를 개선했고, 인플레이션을 5%미만으로 묶었고, 국민총생산(GDP) 연평균 성장률을 5.5%로 유지했습니다. 식량 생산이 증가했고 빈곤율이 낮아졌고, 주택마련 기회가 늘었고, 저소득층의 수입증가 기회도 생겼습니다.

 

외자유치에 성공해 기업 성장을 도왔고, 군부독재가 독점했던 IT산업을 민영화해 가격을 낮추고 사용자를 증가시켰습니다. 소액금융과 식량지원 등의 정책으로 소외계층의 기회를 넓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셰이크 하시나는 안정과 성장을 이끈 정치지도자로 인식되었지요.

 

 

성공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AL2001년 총선에서 BNP에 패배했고, 칼레다 지아에게 정권을 넘겨야 했습니다. 2006년 총선을 앞두고 쿠데타가 발생,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는 군부정권에 의해 부패정치인으로 기소됐고, 하시나는 2008년 아들이 사는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200812월 총선에서 AL는 군부독재의 잔재인 자티야당(Jatiya Party)을 포함한 14개 정당을 연합해 총선에서 승리, 두 번째 총리임기를 시작했으나, 이때부터 그의 행보는 권위주의적 지배의 경향을 보였습니다.

 

 

2014, 2019, 2024년 총선에서 연속 압승했으나 국내외에서 부정선거로 비난받았고, 소액금융으로 빈민의 재활을 돕던 무하마드 유누스와 결별했습니다. 야당과 학생운동과 언론을 탄압했고, 2018년에는 인터넷을 통제하는 디지털 보안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경제성장이 멈추고 외채가 급증한 가운데 2022년에는 상환불능 외채가 210억달러에 달해 IMF체재에 들어갔고, 그 와중에 부정축재 스캔들에도 휘말렸습니다.

 

 

2024년 청년 실업률이 40%를 넘어선 가운데,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공무원직 30%를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공정성에 반한다는 대대적인 반발을 초래했고, 군경과 당조직까지 동원해 반정부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다가, 적어도 650명의 사망자를 낸 유혈사태를 초래한 끝에, 셰이크 하시나는 총리직을 사임하고 인도로 망명하게 된 것이지요.

 

 

좋은 집안에, 최상급 교육을 받고, 군부독재에 맞서 투쟁하고, 빈민과 여성의 인권과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셰이크 하시나가 어째서 이렇게 추락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방글라데시의 학자들이 분석, 해설할 일이겠고, 저는 권위주의 정부를 무너뜨린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에 집중해야 할 것 같군요. (jc, 2024/10/4)

 

,

방글라데시 몬순혁명은 MZ세대가 권위주의 정부를 무너뜨린 최초의 민중혁명입니다.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의 벵갈어 최대 일간지 <프로톰 알로(Prothom Alo)>, 하시나 정부가 시위대에 발포해 발생한 최초의 사망자 150명 중에서 94(64%)18-29세의 청년들이라고 보도했습니다.

 

 

또 다른 다카의 일간지 <사마칼(Samakal)>200명의 사망자 중에서 19-30세가 104(50%이상)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몬순혁명 참여자 대부분이 청년이었고, 이들이 가장 큰 희생을 치렀다는 말입니다.

 

 

 

“XYZ세대라는 용어는 미국 사회과학자들이 인구의 특징을 구별하는 별명이지만, 생애경험의 세계화로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자주 사용됩니다.

 

 

밀레니얼 세대는 Y세대의 별명으로 1981-1996년에 출생한 세대를 가리키며, Z세대는 1997년부터 2013년 출생자로 유년기부터 디지털 매체의 영향을 받은 세대입니다.

 

 

이들은 청소년기에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련 해체, 탈냉전, 9.11과 미국발 경제위기, 코로나 팬데믹 등을 경험한 세대이며, IT에 능하고 sns소통에 익숙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MZ세대는 개인주의가 강하다고 평가되며, 사회나 공동체 의식보다 소규모 동료집단에의 충성심이 강하기 때문에 사회변혁의 주체로 떠오르지 못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의 MZ세대는 그 같은 선입견을 뒤집었습니다. 이들은 하시나 정권의 야당과 언론탄압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고, 학생운동 탄압에 맞서 굳게 단결해 투쟁했습니다. 결국 올해는 학생운동이 시민운동으로 번지면서 몬순혁명을 성공시킨 것이지요.

 

 

방글라데시의 학생운동은 적어도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는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하기 전이기 때문에, 학생운동은 파키스탄 정부의 탄압에 저항했습니다. 다카대학의 저항은 워낙 격렬했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68운동과 나란히 언급되곤 했습니다.

 

 

1969년 다카대학의 학생운동가 아사드 우즈 잠만(Asad uz Zamman)이 경찰에 의해 잔혹하게 사살되자, 다카대학에는 10만명의 시위대가 운집, 피묻은 아사드 우즈 잠만의 셔츠를 장대에 걸고 시위를 계속했고, 결국 이는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1982년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후세인 무하마드 에르샤드(Hussain Muhammad Ershad)의 군부독재를 종식하는 데에도 학생운동의 기여가 컸습니다.

 

 

특히 다카대학의 학생중앙조합(Dhaka Univ. Central Students' Union)은 군부독재를 종식하기 위한 1990년 반독재운동의 선봉에 섰고, 결국 1991년의 총선을 통해 에르샤드 독재를 종식하면서, 8개정당연합의 아와미 리그(AL)가 집권할 수 있었습니다.

 

 

2022년 방글라데시 학생들은 다시 한 번 봉기했습니다. 세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정권의 부정부패와 경제실정에 책임을 물어 총리의 사임을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학생시위는 결국 20248월의 하시나 총리의 사임과 망명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다카대학을 중심으로 한 방글라데시 학생운동은 인도의 영국식민지 시기부터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로 이어지는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와 진보운동의 산실이자 동력이었습니다.

 

 

따라서 2024년의 몬순혁명을 “MZ세대의 사회변혁운동이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방글라데시의 학생운동은 적어도 1968년부터 반세기 이상 방글라데시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 온 전통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학생운동의 단호함과 MZ세대의 재기발랄함이 어우러져 성취된 몬순혁명은 실로 감동적인 역사입니다. 부디 몬순혁명이 평화적으로 안착되면서 방글라데시에서 오래 염원되어온 민주화가 이뤄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jc, 202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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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희 피디님의 최승희 선생 연구 활동에서 시작된 <무용신>의 "재일 조선동포학생 문화예술활동 지원 사업"은 "연해주 고려인 학생 문화예술활동 지원 사업"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재일조선인 학생들에게 무용신 30켤레를 전달하는 작은 시작이 다양한 이들이 함께하게 되며 더 다채로운 활동으로 이어진 결과였습니다.

 



이번에는 기존의 활동과는 다소 다른 맥락이지만, 지난 7월과 8월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난 몬순혁명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캠페인을 진행하려 합니다.

 



몬순혁명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지인의 요청으로, 몬순혁명의 학생 리더와 예술 시위에 참여했던 두 명의 학생 리더를 한국으로 초청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한국 방문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이해하고, 방글라데시에서 시작된 사회 변화를 더 민주적인 사회 건설로 이어가는 연대의 길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용신>은 그들의 한국 방문 비용을 지원하기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무용신>은 그동안 재일·재러 동포를 지원하며, 이념적 갈등으로 소외된 그들의 문화예술 활동을 돕는 일을 지속해왔습니다. 이번 캠페인은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우리가 경험한 민주화 과정이 세계 시민으로서 더 진보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고민과 맞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행됩니다.

 



혁명의 완수는 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배 세대의 많은 희생으로 이루어낸 사회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때로는 비통함과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함께하는 이웃과 선의의 시민들이 연대하여 우리는 변화를 이야기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와 더불어, 세계의 이웃 사회가 겪는 문제를 바라보고,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며 연대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방향과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글라데시 학생 리더들을 초청해 그들과 함께 연대하며 사회 진보를 고민할 단체들과의 만남을 추진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한국의 민주화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된다면, 우리 사회에도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무용신 활동가, 이고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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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목표금액: 450만원
후원금 입금계좌: 카카오뱅크 3333-26-5389095 이고은
후원금 모집기간: 2024-10-1(화) ~ 2024-10-25(수)

학생리더들의 방한은11월 초로 예정하고 있으며, 한국에서의 일정에 대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통해 공유드릴 예정입니다. 
https://link24.kr/GE6dhK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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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의 친일행각이 대한민국 시민들의 인내력을 극한으로 몰아가는 동안, 동남쪽으로 약 4천킬로미터 떨어진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서는 몬순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방글라데시 학생과 시민들이 약 2개월의 항쟁을 통해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렸고, 반민주적 통치로 20년 집권했던 셰이크 하시나 총리는 인도로 망명했습니다.

 

 

정부 전복에 성공한 방글라데시의 학생-시민세력은, 벵골만이 배출한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 무하마드 유누스를 임시과도정부 수반으로 지명해 혁명의 평화적 완수를 위해 노력중입니다.

 

아직 군부의 위협이 상존하는 가운데, 반정부 시위와 정부군의 폭력대응으로 무너졌던 질서를 회복하고, 민주국가로의 이행을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로의 첫발을 내디뎠지만, 다카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반정부 시위대를 향한 정부군의 발포로 650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광주에서처럼 방글라데시의 다카도 민주화를 위한 피를 흘리고야 말았습니다.

 

방글라데시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광주항쟁을 거울삼아 용기를 얻으면서도 그 비극을 피하기 위해 애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다카에서도 광주에 필적하는 희생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쿠데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길을 가고 있는 대한민국은 방글라데시 몬순혁명의 희망이라고 합니다.

 

비정상적인 박근혜 정권을 탄핵시킨 한국민의 평화적 혁명을 배우기 위해 몬순혁명 지도자들은 지금도 서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군부의 위협을 잠재우고, 희생자들을 수습하고, 유족들을 예우하기 위해 이들은 서울과 광주의 경험을 배우고자 합니다. 한국인들에게 몬순혁명을 알리고 싶어 합니다. 더 이상의 혼란 없이 민주주의로 이행하기 위해 대한민국 시민들의 지지와 연대와 자문을 호소합니다.

 

 

특히 박근혜 탄핵시기에 서울에 유학했던 방글라데시의 젊은이들이 한국인 동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무용신>의 이고은 선생도 그런 요청을 받은 사람 중의 한 분입니다.

 

이고은 선생은 성공회대에서 방글라데시 사회운동을 전공했고, 석사논문을 위해 다카를 두 번이나 방문했습니다. 이고은 선생의 방글라데시 동문들, 그리고 그의 논문을 읽은 다카의 젊은이들이 이고은 선생에게 이메일을 보내 지지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고은 선생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협력하는 한편, <무용신> 동료들에게 관심과 협력을 요청했고, <무용신>927일 실행위원 모임에서 몬순혁명 지지와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무용신>은 작은 모임이고, 이고은 선생을 제외하고는 방글라데시 민주화에 대한 지식도 없습니다. 하지만 민주 없는 민족, 진보운동은 열매 없는 공리공론임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몬순혁명의 학생리더들은 한국을 방문해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몬순혁명을 알리고 싶어 합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단체들로부터 몬순혁명의 평화적 완수를 위한 자문을 얻고 싶어 합니다.

 

 

이에 <무용신>은 몬순혁명 학생지도자 2명을 한국에 초청하기로 했습니다. 이들이 한국 각지를 방문하면서 몬순혁명을 알리는 데에 필요한 경비 450만원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시민의 힘으로 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모금 운동을 펴기로 했습니다.

 

방글라데시 몬순혁명 지원운동에 11만원(이상)으로 참여해 주세요.

모금기간: 2024년 10월1-25일
모금목표
: 450만원 (몬순혁명 학생리더 2명의 78일 방한 경비)

후원계좌: 카카오뱅크, 7979-77-26093 (무용신, 이고은)

 

 

몬순혁명 지지가 <무용신> 활동의 본래적 사명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계 민주사회의 일원으로서 <무용신>도 몬순혁명을 지지하고 방글라데시의 민주화를 지지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대한민국 시민들이 방글라데시의 민주화 열망에 관심을 갖고, 향후 더 많은 도움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jc, 2024/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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