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강산보>의 경성 개봉일은 도쿄보다 일주일이 늦은 1938년 1월29일이었고 개봉관은 을지로의 ‘황금좌’였다. 황금좌는 당시 주소 ‘황금정 제4정목 30번지’에 위치한 극장으로 해방 이후의 ‘국도극장,’ 지금은 ‘국도호텔’ 자리이다.
1907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진 이후 광무대(1907), 단성사(1907), 연흥사(1907), 장안사(1908), 우미관(1910)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고, 1913년에는 을지로4가에 ‘황금연예관(黃金演藝館)’이 개관됐다. 줄여서 ‘황금관’이라고 불리던 이 극장은 1917년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 1925년 ‘경성보창극장(京城普昌劇場)’으로 이름이 바뀌어 운영되다가, 1936년 11월 동양풍 르네상스식의 지상 3층 지하 1층의 대리석 극장 건물이 신축되었고, 이것이 1천명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던 ‘황금좌(黃金座)’이다.
1930년대 경성의 극장들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어 있었다. 청계천 이북의 북촌에는 동양극장(東洋劇場), 우미관(優美館), 단성사(團成社) 등이 있었고, 남촌에는 명치좌(明治座)와 황금좌(黃金座), 희락관(喜樂館) 등이 있었다. 1938년 5월호 <삼천리>에 따르면 북촌의 동양극장은 관객의 ‘거의 전부’가 조선인이었고 우미관은 ‘조선인이 9분, 일본인이 1분’, 단성사는 ‘조선인이 8분, 일본인이 2분’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남촌의 명치좌와 희락관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반반’, 황금좌의 관객은 ‘조선인 6분, 일본인 4분’이었다.
<대금강산보>가 황금좌에서 개봉된 것은 경성에서도 통용되던 일본 영화사의 배급 관행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소유한 남촌의 극장들은 각각 일본 영화사와 제휴되어 있었다. 신작 영화 개봉의 전속 계약이었다. 명치좌는 쇼치쿠(松竹), 약초극장은 도호(東寶), 경성극장은 신코(新興)의 영화를 개봉했고, 황금좌는 니카츠(日活) 영화사와 전속 계약이 되어 있었다. <대금강산보>는 니카쓰 타마카와 촬영소의 작품이었으므로 황금좌에서 개봉된 것이다.
당시 개봉관들은 토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주일 단위로 신작 영화를 상영했다. <대금강산보>는 1938년 1월29일 토요일부터 2월4일 금요일까지 황금좌에서 상영됐다. 이를 홍보하기 위한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경성일보>의 극장 광고는 1월26일 수요일부터 시작되었고 개봉일인 1월29일에 기사와 함께 가장 큰 광고가 실렸다. 신작 영화 개봉 일수가 일주일에 머문 것은 아마도 경성 영화 관람객 시장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금강산보>는 약 넉 달 후에 다시 극장가에 등장했다. 이번에는 재상영관이었다. 1938년 5월10일부터 13일까지는 신부좌(新富座)가, 5월14일부터 17일까지는 도화(桃花)극장이 <대금강산보>를 상영했다. 신부좌는 신당동의 극장이었고 도화극장은 마포의 극장이었다. 두 극장 모두 경성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극장들이었고, 이미 개봉되었던 영화를 재상영하는 이른바 2류 극장들이었다.
이상한 것은 두 극장이 <대금강산보>를 일주일이 아니라 4일씩 상영한 것인데, 이는 필름 임대료 때문이었다. 1938년 5월호 <삼천리>에 따르면 당시 외화 필름 임대료는 1주일에 2천5백원에서 4천5백원까지 다양했다. 찰리 채플린의 <거리의 등불(1931)>이 4천5백원으로 가장 비쌌고 <오케스트라의 소녀(1937)>가 2천5백원으로 가장 저렴했다.
<대금강산보>의 대여비는 3-4천원선으로 채플린 영화 급이었다. 2류 극장들은 비싼 대여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영화관이 공동으로 한편을 대여해 3-4일씩 나누어 상영했던 것이다. 신부좌와 도화극장은 1938년 10월 다시 한 번 공동으로 <대금강산보>를 대여해 상영했다. 신부좌는 10월21일부터 23일까지, 도화극장은 10월22일부터 25일까지였다.
한편 <대금강산보>는 지방에서도 상영되었다. 1938년 7월28일의 <매일신보>는 “오는 (7월) 30, 31일 양일간 당지 읍애관에서” 최승희 주연의 <대금강산보>가 상영된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대금강산보>는 1938년 내내 경성과 지방에서 상영되었다. 같은 영화가 한 해에 경성에서만 3차례, 그리고 지방에서도 상영되었던 것은 이 영화의 흥행이 좋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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