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4일자 <매일신보>에는 <대금강산보> 시사회에 이왕 전하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 정무총감과 요시다 히로시(吉田浩) 철도국장이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이 총독을 대신해 참석하고, <대금강산보>의 제작에 자금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철도국의 국장이 참석한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참석할 사람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카와 가츠로쿠(相川勝六, 1891- 1973) 외사과장이었다.

 

<대금강산보> 제작결정을 비롯해 초기의 신속한 진행은 아이카와 외사과장의 추진력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의 목적은 총독부의 재정난 타개를 위한 해외관광객 유치였지만, 적어도 그의 업무 추진 방식과 능력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그는 최승희와 최승일을 도와 음악과 원작 마련을 지원했고, 최승희가 안무를 마칠 때까지 온갖 편의를 봐주었다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똑똑하고 능력있고 강직한 경찰공무원이었다. 도쿄제국대학 법대 출신이었고 고등고시를 통과해 내무성 공무원이 되었다. 1934년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장으로 승진했지만 1936년 우시오 시게노스케(潮恵之輔, 1881-1955)의 히로타(広田弘毅, 1878-1948) 내각 입각에 반대 의견을 내는 바람에 그 보복으로 좌천되었다. 그가 조선총독부 경찰부 경무국 외사과장으로 부임한 것이 그 때문이었다. <동아일보>의 사령 보도에 따르면 그가 총독부 외사과장으로 부임한 것은 1936422일이었다.

 

아이카와 카츠로쿠, 그는 1936년 4월부터 1937년 7월까지 조선총독부 외사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최승희의 <대금강산보> 제작에 적극 협력했다.

 

그의 외사과장 재임 중인 193685일 조선 총독이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郎)로 교체되었다.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신임총독을 충실히 보좌했는지 이후 미나미 총독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19372<대금강산보> 제작 제안이 들어왔을 때 이를 적극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총독의 신임 덕분이었을 것이다.

 

최승희가 <대금강산보> 제작을 위한 음악과 원작과 안무의 준비를 마쳤을 때, 촬영을 담당할 영화사로 니카츠를 선정한 것도 그의 수완이었을 것이다. 니카츠 영화사의 재정지원 요청을 만족시키기 위해 철도국의 참여를 유도한 것이다. 그 결과 71일 니카츠 영화사가 타마카와 촬영소에 <대금강산보>의 촬영을 할당한다는 발표가 나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대금강산보>를 위해서는 불운한 일이 2가지 생겼다. 하나는 앞에서 본바와 같이 77일 중일전쟁이 터진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이카와 외사과장이 78일자로 외사과장을 물러나 미야자키현(宮崎県)의 지사로 승진, 영전하게 된 것이었다.

 

75일자 도쿄 토메이 통신의 전화통지문을 인용한 <조선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76일의 일제 각의 결정으로 지방장관 4명이 사임하게 됨으로써 부장급에서 지사로 영전할 사람이 4명이 지명되었는데 그중의 한명이 아이카와 가츠로쿠였던 것이다.

 

이례적인 것은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외사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장급으로 간주되어 지사로 승진한 것이다. 그가 우시오 시게노스케의 히로타 내각 입각을 반대했던 것이 옳았다는 점이 인정된 결과였던 것으로 보이며, 일시적인 좌천을 두 단계 승진으로 보상받은 것이다.

 

아이카와 카츠로쿠는 조선총독부 외사과장을 사임한 후 미야자키현의 지사로 영전했다. 사진은 미야자키현 종합공원에 세워진 그의 동상.

 

이후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1939년 히로시마현 지사, 1941년 아이치현 지사를 거쳐 1944년 중앙정부 후생성 차관으로 승진했다가, 일제의 2차대전 패전과 함께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1952년에는 자민당 소속으로 미야자키 지역구에서 중의원 선거에 당선된 이후 내리 8선을 달성했고, 자민당 안에서는 치안대책특별위원장으로 오래 재직했다.

 

만일 아이카와 외사과장이 조금만 더 재임했다면 <대금강산보>의 제작은 당초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지도 몰랐다. 중일전쟁으로 총독부 정책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는 계획은 빠르고 목표를 반드시 이뤄내는 역량있는 행정가였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최승희도 조바심을 내며 4달이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대금강산보>, 적어도 최승희를 위해서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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