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강산보>가 샌프란시스코와 LA에서 상영되지 못한 데에는 서류작업과 검열통과 문제 말고도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대금강산보>가 보이콧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재미 조선인 동포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해 주었다. 그런데 더 큰 규모의 재미 일본인 환영단도 출영했다. 배에서 내려 두 환영단을 마주한 최승희는 착잡했을 것이다. 어느 쪽도 실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동포들은 ‘세계의 무희’로 발돋움하는 ‘조선의 무희’를 만나고 싶어 했고, 대개 독립운동가였던 교포사회 유력인사들은 그녀와의 면담을 기대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발행한 여권으로 여행하면서 일본 공관의 상시적 감시 아래 있었던 최승희의 사정은 복잡했다.
최승희는 결국 샌프란시스코의 교포 인사들과의 면담을 거절했고, 교포단체의 환영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공연 준비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진짜 이유는 일본 공관원들에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승희의 이 같은 행동은 재미 동포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러던 중 최승희는 1월15일 일본영사관이 개최한 <일미친선의밤>에 참석했다. 주 샌프란시스코 일본영사가 마련한 이 행사는 지역의 정계와 재계 인사들뿐 아니라 언론인과 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해 최승희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일본 영사관이 특별히 마련한 행사였기 때문에 최승희는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포들과의 만남을 피하면서도 일본 영사관의 행사에 참석한 최승희가 동포들의 눈에 곱게 보일리 없었다. 더구나 <일미친선의밤>에서 최승희가 무용 감상회까지 열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포들의 분노는 증폭됐지만, 다행히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월24일 LA에 도착한 최승희는 조선인 동포들의 분위기가 심각함을 인식했다.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1월26일 LA교포들이 개최한 환영회에 참석해 한인 청년회로부터 기념금배를 증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교민들 중에 최승희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정병호(1995)와 김찬정(2003), 강준식(2012) 등의 평전자들은 이들이 반일 독립운동단체의 구성원들이며, 최승희가 ‘사이 쇼키(Sai Shoki)’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는 것부터 불만이었다고 서술했다.
이들은 LA 공연 당일 윌셔이벨(Wilshire Ebell) 극장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유태인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유태인들은 나치 독일과 동맹관계였던 일본의 상품에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 국적의 공연도 불매 대상이었으므로 최승희의 공연도 보이콧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정병호(1995)가 인용한 안제승의 증언에 따르면 “흥사단에서 나온 교포가 마이크를 갖고 와서 최승희에게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고 공표하면 공연을 후원하겠다”고 했으나 “극장에 포진한 일본 대사관원들을 의식한 최승희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나 지금이나 주미 일본 대사관은 워싱턴에 있기 때문에 안제승이 증언한 ‘대사관원들’이란 아마도 주LA 일본 ‘영사관원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이벨 극장에 다수 나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영사관 직원들에게 공연에 참석하라는 총영사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이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승희의 ‘배일 행위’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상부와 본국에 보고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도쿄에 남겨둔 딸 안승자의 안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물론 무용연구소의 앞날과 향후 자신의 무용 활동이 위협받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승희는 샌프란시스코나 LA에서 일부 조선인 교포들의 요구대로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고 선언할 수 없었다. ‘배일 행위’로 비쳐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최승희는 <대금강산보>를 상영할 수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금강산의 풍광과 최승희의 무용은 조선인 교포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내용이었겠지만, 일본 영화였기 때문에 보이콧 대상이었다. 결국 최승희는 LA에서도 <대금강산보>를 상영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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