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는 미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와 LA, 그리고 뉴욕에서의 이유가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같았다. 미국에서 격화되었던 반일 시위와 일화배척 때문이었다.

 

일부 평전 저자들은 당시의 재일 조선인과 재미 조선인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미 동포들이 최승희의 공연활동을 방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카시마 유사부로(1981[1959]:75)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승희의 이름이 사이 쇼키라고 소개된 것이나 그가 일본 영사관과 신문사에 자주 출입하고 일본공관의 행사에 참석한 것이 재미 조선인을 자극했고, 결국 조선인 동포들이 LA 이벨극장 앞에서 배일 배지를 판매하고, 뉴욕 호텔로 협박 전화를 하는 사태로 발전했다고 서술했다.

 

1938년 들어 미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반일 시위와 일화배척(일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미국의 국익이 손상되었을뿐 아니라, 미국에도 난징 대학살이 알려지면서 일본군이 저지른 비인도적인 잔혹 행위가 시민들을 격분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는 제국주의 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조선인과 재미조선인이 처해 있는 정치적·사회적 조건의 차이에서 비롯된 사고 행동의 차이, 즉 재일조선인은 재미조선인에 비해 극히 행동이 제한되어 있었는데, 소수의 재미조선인 독립지사들은 승희 등의 행위를 의심하여 승희에게 무리한 주문을 했을 것이다.” (다카시마 유사부로, 1981[1959]: 76)

 

한편 강이향(1993:136)최승희는 단지 문화선전만을 위해 온 것이 아니고 비밀지령을 띠고 정치적 선전을 위해 와있다는 말까지 떠돌았다고 서술했고, 정병호(1995:149)독립운동가들은 최승희를 한편으로는 배일적 인물로 전환시켜 보려는 작전을 펴면서 친일파로 몰았고, 최승희의 공연을 계기로 하여 반일 여론을 미국인에게 알리려는 목적으로 그리 활동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같은 서술에는 일견 수긍할 측면도 있지만, 국제적 맥락과 미국내 분위기를 도외시함으로써 재미 조선인들을 동족 예술가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몰아간 측면이 있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의 교포신문 <신한민보>에는 최승희를 비난하는 보도가 한 건도 없었다.

 

최승희의 미국 공연이 보이콧 당한 것은 단지 재미 조선인 동포들의 몰이해나 감정적 앙금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을 침공한 일본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이 악화될 만큼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의 일화배척 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했다. 미국여성들은 특히 일제 실크 스타킹 불매운동을 벌임으로써 일본의 수출에 타격을 주었다.

 

미일관계는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부터 나빠지기 시작했으나, 1937년 일본의 도발로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그해 10월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하면서 미국이 조차지를 잃게 되자 미국은 추축국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37105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른바 격리 연설(Quarantine Speech)”을 통해 침략국 일본과 이탈리아, 나치독일에게 경제적 제재를 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신호로 미국민들은 대대적인 일제 불매운동에 돌입했다. 1937109일의 <동아일보>격렬해지는 각지 일화배척운동이라는 제목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미국에서의 일본관계 상품의 제조업자중 반일적인 파에 의하여 <미국품표준보호동맹>이 결성되어 일본의 원료품 및 제조품의 영구적인 보이코트운동을 개시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기타 미국 <반전 반파시즘> 연맹과 <중국민중의 벗> 협회는 반일운동의 착수로 1일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시위대회를 개최하고 일본상품의 보이코트 등을 결의하였다. 또 미국노동총동맹(AFL)과 산업조직위원회(CLO)에서도 근간 개시되는 연차대회에서 일화배척이 문제로 될 것을 예상하고 대책협의중이라고 전한다.”

 

최승희의 공연이 취소되고 그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가 상연되지 못한 것을 최승희와 재미 조선인 교포들 사이의 갈등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서술이다. 최승희와 재미 조선인들은 서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양해도 제공하고 있었다.

 

공연 보이콧과 영화 상영의 실패는 미국 정부가 앞장서고, 미국내 노동조합을 포함한 각종 사회단체들이 총동원된 대대적이고 전국적인 일제불매운동 때문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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