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381224일이었다. 최승희를 맞는 파리의 분위기는 뉴욕과 사뭇 달랐다. 피켓을 들고 플래카드를 늘어뜨린 환영 인파는 없었지만 조선인과 일본인 교민들의 대립도 없었고, 반일 시위도 없었다. 조르주 생크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샹젤리제에 스튜디오도 마련한 최승희는 비로서 차분하게 공연 준비에 몰두 할 수 있었다.

 

유럽 첫 공연은 1939131일의 파리 <살플레옐> 극장이었고, 두 번째 공연은 26일 브뤼셀의 <팔레 데 보자르> 극장이었다. 두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최승희는 파리에서 <대금강산보>를 상영했다. 1939217일 오후9<살 드예나(Salle D'Iena)> 극장에서였다.

 

<테아트르 드예나(Théâtre d'Iéna)>라고도 불렸던 이 극장은 약 5백석 규모의 영화 상영 극장이었다. 파리16구의 살드예나 애비뉴 10번지에 위치해, 인근에 트로데카로 정원과 팔레드예나 박물관, 그리고 지금은 한국문화원도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센 강 너머로 에펠탑이 바라다 보이는 살드예나 지역은 경관이 탁월한 파리의 문화 중심지의 하나였다.

 

1939년 2월17일, 최승희는 파리 <살드예나> 극장에서 <대금강산보> 시사회를 개최했다. 이 극장은 오늘날의 샹그릴라 호텔이 되었다.

 

극장 건물은 1896년 롤랑 보나파르트 왕자의 저택으로 건축되었으나 1924년 왕자가 사망한 후 수에즈운하 회사에 매각, 1929년부터 1955년까지 극장으로 개조되었다. 이후 프랑스 정부가 매입해 국립무역회관으로 사용되다가 2005년 민간에 매각되어 2010년부터는 샹그릴라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대금강산보><살드예나> 상영은 일반 개봉이 아니라 일회 상영의 시사회였고, 프랑스와 일본 사이의 민간 문화교류단체인 <프랑코 야폰 위원회(Le Comité Franco-Japonais, 일본명 일불협회 日仏協會)>가 주최했다. 아마도 <대금강산보>의 일반 개봉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최승희가 <프랑코 야폰 위원회>에 도움을 청했고, 이 위원회는 <대금강산보>와 다른 2개의 영화를 묶어서 일본영화 시사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대금강산보> 시사회는 거의 모든 파리 일간지에 보도됐다. 상영 이틀 전인 215<르땅(Le Temps)><랭트랑지장(L'Intransigeant)>이 가장 먼저 보도했고, 16<엑셀수아(Excelsior)><르쁘띠주날(Le Petit Journal)>이 뒤를 이었다. 상영 당일인 17일에는 <르피가로(Le Figaro)><르주날(Le Journal)>, <르마탱(Le Matin)><롬리브르(L'Homme Libre)>, <랭트랑지장>이 시사회 소식을 실었다.

 

상영 다음날인 218일에는 <파리수와(Paris Soir)>, 24일에는 <라프랑스(La France)>가 이 시사회 소식을 보도했고, 310일에는 <랭트랑지장>이 영화평을 실었다. 모두 10개의 파리 일간지가 <대금강산보>의 상영을 보도한 셈인데, 특히 <랭트랑지장>은 사전 2, 사후 1, 모두 3회나 보도해 <대금강산보> 보도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215일자 <랭트랑지장>의 보도는 다음과 같았다.

 

<살드예나> 극장은 오늘날 파리16구의 문화 중심지에 위치한 5백석 규모의 영화 상영관이었다. 사진은 <살드예나> 극장의 소강당 내부의 모습이다.

프랑스-일본 위원회는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 무용가 최승희가 출연하는 일본 영화 <산의 노래(le Chant de la montagene)>를 상영한다. 최승희씨는 최근 파리에서 가졌던 공연에서 큰 성공을 거둔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천연색 영화 <도쿄(Tokio)>와 다큐멘터리 <눈의 호소(L'Appel de la Neige)>를 동시 상영한다. 이 시사회는 217일 금요일 밤 9시에 살드예나 (salle d'Iéna)에서 열린다.”

 

이로써 최승희는 ‘<대금강산보>를 해외에서 상영한다는 자신의 목표를 이뤘다. 그러나 이 시사회가 그의 목적을 달성해 준 것은 아니었다. <대금강산보>가 최승희 공연을 도운 것이 아니라 거꾸로 파리 공연을 마치고 얻어진 최승희의 유명세가 <대금강산보> 홍보에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대금강산보>의 프랑스어 제목이 <산의 노래>로 약식 번역됨으로써 금강산을 홍보한다는 조선총독부의 의도도 달성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의 제작과정이 순탄하지 못했고, 미국에서 겪었던 우여곡절을 고려하면, 끝내 <대금강산보>의 파리 상영을 이뤄낸 최승희의 추진력만큼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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