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일 분위기는 1938년 들어 더욱 격화됐다. 일본정부의 엄격한 보도 통제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난징 대학살의 참상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9371215일자 <시카고 데일리뉴스>가 난징 대학살을 처음 보도한 이래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들이 속속 보도했다.

 

심지어 일본 언론이 보도한 일본군의 영웅적 행위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공분에 기름을 부었다. 특히 19371130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111일자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이 경쟁적으로 보도한 “1백명 참수경쟁은 지금까지도 중일전쟁 중 일본군의 잔학성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었다.

 

두 신문은 토야마(富山) 부대의 무카이 토시아키(向井敏明, 26) 소위와 노다 타케시(野田毅, 25) 소위가 무석(無錫)을 점령한 후 난징(南京)에 입성할 때까지 누가 먼저 1백 명의 중국인 목을 베는지 경쟁한 사실을 보도했다. 19371213일자의 두 신문은 무카이 소위가 105, 노다 소위가 106명의 중국인의 목을 베어, 두 소위가 같은 날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연장전이 필요하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1937년 11월30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 東京日日新聞)은 일본군 소위 2명이 중국인 1백명의 목을 누가 먼저 베는지 경쟁했으며, 같은날 목표를 달성해 승부를 가리지 못했으므로 연장전이 필요하다고 보도했다.

 

종전 후 열린 전범재판에서 두 소위가 목을 벤 중국인들은 대부분 투항한 포로이거나 농민들이었음이 밝혀졌고, 결국 이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형이 집행됐다.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이후 6주 동안 학살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의 수가 약 30만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미국은 중국내 조차지를 잃고 충칭으로 쫓겨났을 뿐 아니라 곧이어 미군과 미국인들은 중국을 떠나야 했다. 미국인들은 자국의 손실과 일본군의 반인도적인 학살에 분노했다. 이에 대해 최승희 평전의 저자 김찬정(2003[2002]:196)은 이렇게 서술했다.

 

최승희가 미국에 도착하기 바로 전인 1213, 난징(南京)이 함락되면서 일본군의 중국인 대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그 사실이 일본군의 엄격한 보도 관제를 뚫고 세계 각지로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미국 대부분의 도시에서 반일 데모가 발생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일본영사관은 재외공관으로서 미국인의 대일감정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미국인의 대일감정을 개선하려고 노력한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영사관뿐 아니었다. 일본군의 잔학상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국제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 정부는 이를 무마할 방안이 필요했다. 특히 생필품과 군수물자를 크게 의존하던 미국에 대한 선무공작이 시급했다. 그 같은 공작의 하나가 예술단 파견이었고,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도 그중의 하나였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의 첫 목적지가 변경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35년 하반기부터 세계 순회공연을 기획하던 최승희의 첫 목적지는 유럽이었다. 최승희는 1937927일 도쿄극장에서 세계순업 고별공연을 가졌는데, 공연의 제목은 <최승희 도구(渡歐) 고별공연>이었다.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은 미국 정부와 시민들의 공분을 일으켜, 미국 전역을 통해 광범위한 일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최승희의 공연이 보이콧되고 그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가 상영되지 못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1014일에도 같은 극장에서 다시 한 번 고별공연을 단행했는데, 이때의 제목도 <최승희 도구(渡歐) 최후의 대중고별공연>이었다. 19371120일자 <오사카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최승희는 유럽의 런던을 시발로 해서 프랑스·독일·이탈리아를 돌고 미국으로 건너가겠다고 밝혔다. 첫 목적지가 여전히 유럽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승희는 125일 히비야 극장에서 고별공연을 다시 열면서 공연 제목을 <최승희 도미(渡米) 고별공연>으로 바꿨다. 첫 목적지가 미국으로 바뀐 것이다. 2년 동안 유럽을 목표로 준비한 순회공연의 첫 목적지가 미국으로 바뀐 것은 일본정부의 요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찬정(2003: 195)의 서술대로 최승희는 일본 정부의 앞잡이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을 노리고 일본 정부가 미국으로 보낸 일본의 개라는 단정적인 소문이 난 것도 근거가 없지 않았던 셈이다. 재미 동포들이 최승희의 공연을 보이콧한 것은 최승희 자신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그의 공연을 이용해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보이콧한 것이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미국 공연이 보이콧당하고 전화협박까지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중일전쟁, 특히 19381월경 미국 전역에 퍼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의 참상에 대한 미국인의 분노 때문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승희는 미국에서 1년 동안 4회의 공연을 하는데 그쳤고, <대금강산보>는 한 차례도 상영하지 못한 채 유럽으로 떠나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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