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야폰 위원회>가 개최한 일본 영화 시사회에서는 최승희의 <대금강산보> 외에 2편의 다큐멘터리가 더 상영되었다. 흑백 다큐멘터리 <눈의 호소(L'Appel de la Neige)>와 컬러 다큐멘터리 <도쿄(Tokio)>였다.

 

<도쿄>컬러영화였다고 특별히 소개한 것은 당시 컬러 영화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테크니컬러기법으로 만든 컬러 영화로, 일본 수도 도쿄를 소개하는 내용이지만 일본 영화사가 제작한 일본 영화는 아니었고, 미국의 MGM사가 제작한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파리 일간지에 <토쿄(Tokio)>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 영화의 원제목은 <모던 토쿄(Modern Tokyo, 1935)>이며, 미국의 영화 제작자 제임스 핏츠패트릭(James A. FitzPatrick)가 출연해 해설을 맡은 상영시간 730초의 여행 다큐멘터리였다.

 

<모던 토쿄>는 핏츠패트릭의 세계여행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하나였다. 1925년 영국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소개한 이후, 1926년부터는 서유럽 국가들의 도시와 음악을 담은 짧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나갔다. 1930년 핏츠패트릭은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소개하는 7분짜리 <벚꽃 필 때의 일본(Japan in Cherry Blossom Time, 1930)>를 방영했고, 1935년 두 번째 일본 다큐멘터리 <모던 도쿄>를 제작한 것이다.

 

제임스 피츠패트릭이 진행하는 여행다큐 <트래블톡>의 첫장면과 홍보 포스터. 피츠패트릭은 1935년 도쿄를 취재해 <모던 도쿄>를 제작, 방영했다.

 

<모던 도쿄(1935)>는 도쿄가 대지진을 이겨내고 동양적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서양 문명의 영향으로 빠르게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듬해(1931) 샴 왕국과 한국을 동시에 취재해 제작한 <샴과 코리아(Siam and Korea)>를 방영하기도 했다.

 

시사회의 두 번째 다큐멘터리 <눈의 호소>는 나의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이 필름이 다큐멘터리였다고 하므로 일본 다큐멘터리의 효시라고 알려진 <유키구니(雪國, 1939)>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유키구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1937년 단행본 간행)이기도 하지만, 이시모토 토키치(石本統吉) 감독의 이 다큐멘터리 영화(1939년 개봉)로도 유명하다.

 

다큐멘터리 <유키구니>1935년 오무라 에이노스케(大村英之助)가 설립한 예술영화사(藝術映畵社)가 제작한 사회운동적 성격의 기록영화로 상영시간은 약 38분이었다. 19371월부터 1938년 봄까지 만 13개월 동안 7차례의 로케이션을 통해 촬영된 필름을 편집해 제작된 <유키구니>1939년 문부성의 표창을 받을 만큼 수준이 높았고, 오늘날까지 일본 영화사에서도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의 효시이자 전범으로 꼽히고 있다.

 

파리의 시사회에서 상영된 <유키구니>가 특별한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 촬영감독 이노우에 칸(井上莞) 때문이다. 그는 조선인으로 본명이 이병우(李炳宇). 일찍이 오오무라 에이노스케와 함께 사회주의 영화운동에 참여했으나, 1935년 창업된 <예술영화사>에 동참하면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다큐멘터리 제작에 열성을 보였다.

 

 

1939년 <예술영화사>가 제작, 개봉한 기록영화 <유키구니>, 이 다큐멘터리의 촬영 감독은 조선인 카메라맨 이병우였다.

 

<예술영화사>1935년 창립 후 한동안 관광이나 산업 관련의 문화 영화를 제작했는데, 맨 처음 제작한 여행 다큐멘터리가 <조선의 여행(朝鮮, 1935)>이었고, 이 작품의 촬영을 담당한 것도 이병우였다.

 

1938518일의 <조선일보>는 이병우가 “3년 전(=1935) 조선철도국의 초청을 받아 <조선의 여행>이라는 조선 풍경 소개영화를 촬영했으며 이때 촬영한 장면에서 최승희 여사가 주연한 <금강산보>에 이용된 것이 적지 아니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1939217일 파리 <살드예나> 극장에서 열린 일본 영화 시사회상영작 3편중에서 2편이 이병우가 촬영한 영상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랭트랑지장>의 평론가 도랑쥐는 <눈의 호소>라는 다큐멘터리가 진행은 느렸지만 현란했으며 촬영이 매우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당대 일본 최고의 카메라맨의 한 사람이었던 이병우의 촬영기술이 빛을 발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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