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야(1917)>보다 먼저 개업된 끽다점은 1909111일에 개업한 <남대문역 끽다점>이었다. 남대문역이란 지금의 서울역(1947-지금)이지만, 한동안 경성역(1923-1947)이라고 불렸고, 그 전의 명칭이 남대문역’(1900-1923) 혹은 남대문 정거장이었다.

 

일제 강점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1909년 한성에는 중구 순화동 1번지부근, 즉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자리 서남쪽에 서대문역이 있었고, 이것이 경인선(190078일 개통)의 시발점이었다.

 

경인선은 1899918일 개통되었지만 당시의 시발역과 종착역은 노량진역과 인천역이었다. 까지였다. 이때 경인선이 한성까지 닿지 못한 것은 한강을 건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강 철교 공사는 1897329일 시작되었으나 인력난과 재정난으로 지연되다가 19007월에야 완공되었고, 이에 따라 용산역과 남대문역을 거쳐 서대문역까지 연결된 것이 190078일이었다. 일제 강점 후에는 서대문역이 경성역이라고 불렸다.

 

1910년경의 남대문 정거장

 

한편 서대문역과는 별도로 1900년 남대문역이 2층의 목조건물로 신축되었고, 1919년 서대문역이 폐쇄된 후에는 남대문역이 서울로 통하는 모든 철도의 관문 역할을 했다.

 

이 남대문 역사 2층에 끽다점이 생긴 것이다. 1909113일의 <황성신문> 2면에는 다음과 같은 한 문장짜리 단신이 보도되었다.

 

“(제목) 다방개설, (본문) 남대문 정거장에는 1일부터 끽다점을 개설하였다더라.”

 

<남대문역 끽다점>은 역사 2층에 마련되었고 식당부와 끽다부가 합쳐진 형태였다. , 일식과 양식, 중식뿐 아니라 커피와 홍차를 주문할 수 있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출판한 여행 안내책자 <조선철도여행안내(1915)>에는 <남대문역 끽다점>의 내부 사진이 2장 실려 있다.

 

끽다점의 현관문을 찍은 사진에는 유리창에는 리프레쉬먼트 룸(Refreshment Room)”이라고 영문으로 쓰인 밑에 끽다점(喫茶店)이라고 한자로도 표기되어 있었다. 이 유리현관문의 윗편과 양 옆에는 꽃무늬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부채꼴 모양으로 다시 한 번 <끽다점>이라고 씌여 있었다.

 

 

끽다점 내부를 촬영한 사진에는 2인용과 4인용 테이블들이 희고 긴 테이블보에 덮여 있었고, 각 테이블 위에는 두어 개의 양념통과 함께 꽃이 꽂혀 있어 미관에도 매우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테이블 뒤편, 현관문 바로 앞에 서 있는 남자 종업원은 흰색의 상의제복에 짙은색 바지를 갖춰 입고서 예의를 갖춰 접객할 준비를 갖춘 것으로 보여, 오늘날의 고급 레스토랑을 연상시킨다.

 

<다리야(1917)> 이전에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 영업 중이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또 다른 문헌도 있다. 1916102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철원행이라는 기행문에는 승객이 남대문역을 출발하기 전에 끽다점을 방문했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14일 오후 6시발 열차를 탑승하여 철원으로 향하고저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한즉 ... 시각이 정확히 530분이므로 발차까지 30분의 여유가 있었다. ... 남은 30분을 이용해 정거장 끽다점에서 양식 2-3품을 먹으려고 들어가...”

 

<조선철도여행안내(1915)>의 사진과 <매일신보(19161020)>의 기사는 <다리야 끽다점(1917)>이 생기기 8년 전에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 영업 중이었음을 확인해 준다. 따라서 <청색지>의 노다객이 <후타미(1926)>를 경성의 첫 끽다점이라고 한 것은 오류였던 것이다.

 

<남대문역 끽다점> 이전에도 일반인에게 커피를 판매하던 끽다점이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같은 사실을 암시하는 기록도 몇 가지 남아 있다. 하지만 우선 <남대문역 끽다점>에 대한 기록들을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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