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은 “서울서 맨 처음 우리가 다점(茶店)이라고 드나든 곳은 본정 3정목(=충무로 3가), 현재(=1938년) ‘윈’ 근처에 있던 ‘이견(二見, 후타미)’이란 곳으로 이곳이 아마 경성 다방의 원조일 것”이라고 서술했다. 그의 기억은 사실이었을까?
우선 <후타미>의 “원조”여부를 살피기 전에 그 개업연도를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노다객은 “경성 다방 성쇠기”에서 <후타미>의 개업연대를 밝히지 않았지만 많은 저자들이 이를 1923년으로 명시했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서울6백사년(1996, 3권1251쪽)>도 “1923년에 명치정에는 이견(二見), 일본말로 후타미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이 문을 열었”다고 기술했다. 다만 이같은 주장에 대한 출처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후타미>의 1923년 개업설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문헌을 조사했으나 이를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없었다. 1966년 4월19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김소운(金素雲, 1907-1981)의 “다방 엘레지”라는 글에 “40년전 서울에서 커피나 홍차를 내는 끽다점이 진고개에 단 한집 있었을 뿐”이라는 회상이 전부였다. 1966년으로부터 “40년 전”이라면 1923년이 아니라 1926년이다.
과연 1926년 8월22일의 <경성일보>는 그날이 <후타미>의 개업일임을 알리는 광고를 게재했다. 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간 개업 피로 행사에 방문하는 고객에게 소정의 사은품을 증정한다고 했다. 즉, <후타미>의 개업일은 1923년이 아니라 1926년 8월22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다객이 <후타미(1926)>를 “경성 다방의 원조”라고 했을 때 그것이 경성 ‘최초’의 다방이라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1926년 이전에도 ‘다방’이나 ‘끽다점’은 많았기 때문이다.
잡지 <조선공론>은 <쇼카코오키나(1921)>와 <다리야(1917)>가 <후타미>보다 5-6년 전에 개업했다고 서술했고, 그 이전에도 <탑동 카페(1914)>와 <남대문역 끽다점(1909)>가 영업 중이었다. 조선인들도 <청향다원(1910)>, <청향원(1900)>, <홍릉앞 끽다점(1899)> 등을 개업했었다.
노다객이 <후타미>를 “원조”로 기억한 것은 호텔이나 식당, 제과점으로부터 독립되어 커피와 차를 ‘주(主)’로 파는 다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기준에서 보더라도 <후타미>가 “경성 다방의 원조”라고 보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는 문헌들이 있다.
1936년 3월24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홍차 한잔의 윤리”라는 수필에서 정우상은 “6,7년 전만해도 서울에는 순끽다점으로 변변한 것이 있는 것 같지 않아 동경서 끽다 취미를 알고 온 학생들에게 여간 큰 불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1936년으로부터 6,7년 전이라면 1930년 전후이다. 그때도 “순끽다점으로 변변한 것”이 없었다면, <후타미>가 1930년경 이미 폐업했거나 영업 방식을 바꾸었던 것일까? 혹은 정우상의 눈에는 <후타미>조차도 “순끽다점”이 아니었던 것이리라. 실제로 1927년 12월18일의 <조선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순끽다점: 시내 혼마치 3정목의 유명한 순끽다점 <후타미 티룸>은 주인 요시카와(吉川)씨가 세이요칸(精養軒) 호텔 출신으로 독특한 커피와 양과자, 샌드위치와 함께 칵테일 등을 손쉽게 제공하고 있어 부인모임으로부터 단체모임에 이르기까지 최적의 장소라고 하여 비상한 인기를 얻고 있지만, 특히 세모를 맞아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크게 힘쓰고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후타미>는 커피와 차뿐 아니라 양과자와 샌드위치, 칵테일까지 팔고 있었다. 또 <후타미>는 혼자 혹은 소수의 친구들이 음악과 대화를 즐기는 곳이 아니라 단체모임 중심으로 영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후타미>는 과자점에 병설되었던 <다리야(1917)>나 샌드위치를 판매했던 <남대문역 끽다점(1909)>과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경성역 인근에 <후타미 여관(1912)>이 영업 중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후타미 끽다점>과 <후타미 여관>의 상관관계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후타미>가 커피와 차뿐 아니라, 스낵과 주류를 판매하고, 숙박업과도 연계되었던 끽다점이라면, <후타미(1926)>를 경성 다방의 원조라고 한 노다객의 회상을 여전히 존중해야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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