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탁호텔(1902-1917)>은 한동안 조선 최초의, 최고급 호텔로 알려졌지만, 제물포의 <대불호텔(1888-1907)>이 발굴되면서 조선 최초라는 호칭을 잃었고, <조선호텔(1914-1945)>이 개업하면서 최고급이라는 수식어도 잃게 되었다.

 

<조선호텔>의 첫 이름은 <경성철도호텔>이었고,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주요 도시에 건설한 철도호텔 체인의 하나였다. <부산철도호텔(1912715)>이 가장 먼저 문을 열었고, 이어서 신의주(1912815)와 경성(19141010), 금강산의 온정리(1915810)와 장안사(191871), 평양(19221030)에도 철도호텔이 세워졌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직접 운영했던 철도호텔들 중에서 <경성철도호텔>은 특별대우를 받았다. 1914224일의 <매일신보>는 이 호텔이 완공되기도 전에 그 이름이 당국에 의해 <조선호텔>로 개칭되었다고 보도했다. <경성철도호텔><조선호텔>이 된 것은 그것이 조선 전체를 대표하는 호텔이 될 것이라는 암시였다.

 

1937년 2울19일 오후, 최승희가 <조선호텔>의 프랑스식 식당 <팜코트>의 썬룸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과연 <조선호텔>은 대지 6,750, 건평 583평으로 건축됨으로써 약 1,200평의 대지에 세워졌던 <손탁호텔>보다 5배 이상 큰 호텔이 되었다. <조선호텔>을 짓기 위해 대한제국이 출발을 선언했던 원구단의 일부를 헐어내기까지 했다.

 

<손탁호텔>은 지상 2층에 불과했으나 <조선호텔>은 지하1층 지상4층의 건물이었다. 객실 수에서도 <손탁호텔>은 귀빈용을 포함해 25개에 머물렀으나, <조선호텔>2층부터 4층까지 69개의 객실을 구비해 최대 108명의 투숙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최대였다.

 

조선 황실이 <손탁호텔>을 영빈관으로 사용했듯이 <조선호텔>은 총독부의 영빈관이었다. 이는 일본제국의 영빈관으로 사용되던 도쿄의 <데이고쿠(帝國)호텔>과 맞먹는 위상이었다. <조선호텔>조선 최초는 아니었지만, ‘최대이자 최고급호텔로 자리 잡은 것이다.

 

 

<조선호텔>1층에는 식당과 로비 라운지, 끽다점과 바, 당구실과 댄스홀, 연회실과 도서실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중 세간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았던 곳이 식당과 라운지였다. 일반인의 접근 가능성이 가장 높고 잦았기 때문이다.

 

1924년에 개업한 프랑스 식당 <팜코트(Palm Court)>는 경성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다. <팜코트> 식당에는 <선룸(Sun Room)>이라는 일광실이 있었다. 이는 호텔 건물 뒤편의 1층 베란다 부분을 유리로 둘러싸서 매우 밝고 따뜻하게 만든 곳이다. 선룸의 내부에는 야자나무 등의 열대 식물로 장식을 했으므로 이국적인 분위기까지 풍겼다.

 

<팜코트>에서는 플랑베르 스테이크와 푸아그라, 달팽이 요리 등의 정통 프랑스 요리를 주문할 수 있었고, 캐비어와 샴페인도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이 가장 즐겨한 <팜코트>의 메뉴는 프랑스식 양파수프커피였다고 한다. <팜코트>의 커피와 양파수프를 먹어보지 않았다면 경성에서 모던보이나 모던걸 대접을 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환구단쪽에서 바라본 조선호텔 후면. 호텔 1층의 유리창문이 즐비한 곳이 프렌치 레스토랑 <팜코트의 썬룸>이다.

<조선호텔>이 양식당을 개설하면서 미국식독일식러시아식도 아닌 프랑스식식당을 개업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조선호텔>을 최고급 호텔로 운영하려는 총독부 철도국의 의사결정권자들이 프랑스 요리의 세계적 명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더해 <손탁호텔>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호텔>이 개업할 무렵 손탁은 이미 조선을 떠났지만, 조선 황실과 <한성빈관>의 서양식 요리를 주도했던 손탁의 전공이 프랑스 요리였다. 손탁이 한성을 떠난 후 <한성빈관>을 인수한 사람은 프랑스인 보에르가 <손탁호텔>의 식당을 프랑스식 요리를 중심으로 이어갔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상류층 인사들과 경성 주재 외교관들은 <손탁호텔>의 프랑스식 요리에 친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팜코트 썬룸>의 커피는 프랑스식 커피가 아니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0년대 프랑스식 커피는 이미 에스프레소가 주류였다. 압착식으로 추출한 진한 커피를 작은 잔에 담아 마시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의 로만 문화에서도 유사했다.

 

<팜코트 썬룸>의 커피 제조 방식은 압착식이 아니라 여과식이었다.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드립 커피였던 것이다. <조선호텔(1914)>이 문을 열었을 때나 <팜코트(1924)>가 개업했을 때까지도 일본이나 조선에는 압착식 커피 제조법이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01년 밀라노의 루이지 베체라가 발명한 에스프레소 머신 설계도와 최초의 시제품.

 

압착식 커피 제조기가 일반에 선보인 것은 이탈리아 밀라노의 루이지 베체라(Luigi Bezzera)즉석커피 제조기(1901)”였다. 증기압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커피를 추출하는 이 기계는 1902년 특허를 얻었고, 1903년 데시데리오 파보니(Desiderio Pavoni)에 의해 상품화되었다.

 

베체라와 파보니의 에스프레소 머신은 커피 한 잔을 만드는데 채 1분도 걸리지 않았고, 주문을 받아가며 1시간에 1천 잔 이상의 커피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에스프레소 머신은 1906년 밀라노 산업박람회에 출품되었고, 참가자들에게 즉석 카페 에스프레소만들어 나눠주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은 즉각 유럽에 확산됐지만, 미국에는 1925년에야 도착했고, <팜코트>가 개업한 1924년까지도 도쿄나 경성에 전해지지 않았다. 최승희의 <팜코트 썬룸> 사진을 보면 그녀의 손에 들려진 커피 잔은 에스프레소 잔이 아니라 드립커피를 마시는 보통의 커피 잔이다.

 

1906년 밀라노 산업박람회에 선보인 베체라-파보니의 <에스프레소 머신>

최승희의 커피 사진 중에는 경부선 기차 <아카츠키>의 식당차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이 사진에서도 최승희의 커피 잔은 <선룸> 사진의 커피 잔과 같다. 당시 기차의 식당차와 <조선호텔>의 식당은 철도국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사용하던 식기가 모두 같았다.

 

<팜코트>1924년에 개업한 것은 경성 커피사에서도 중요하다. 이때부터 끽다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경성 다방 성쇠기(<청색지>, 19385월호)”<후타미(1926)><백합원(1926)><금강산(1928)>, <나카무라(1928)><메이지제과(1930)> 등의 일본인 끽다점들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고 했다. 조선인들도 <카카듀(1928)><멕시코(1929)><낙랑파라(1931)>, <플라타누(1932)><비너스(1932)><제비(1933)> 등을 개업했다.

 

1940년경 경성의 끽다점은 105개에 달했다. 주류를 파는 와 여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페’ 287개를 더하면 경성에서 커피를 파는 집이 4백개에 달했다. 이들 소규모 민영 끽다점들은 <조선호텔>의 커피 서비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모방할 것은 모방하면서 차별화를 시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급열차 <아카츠키>의 식당차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최승희.

 

<조선호텔>처럼 시내 끽다점들도 여과식으로 커피를 만들었고 아마도 <조선호텔>에 못지않은 양질의 커피를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팜코트 썬룸>은 실내에 야자나무를 배치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경성의 다른 끽다점들도 그 이국성을 모방했다. <카카듀>는 간판대신 하와이식 바가지를 3개 걸었고, <멕시코>는 옥외에 커다란 쇠 주전자를 걸었는가 하면, <비너스>는 실내 한가운데에 밀로의 비너스 상을 세웠고, <낙랑파라>는 실내의 널마루 위에 톱밥을 깔아 사막을 연출했었다.

 

한편 경성의 끽다점들은 <조선호텔>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제공했다. 음악과 지적 대화였다. 커피와 음악과 대화 속에서 떠오른 생각들은 글과 그림이 되었고, 노래와 영화가 되었다.

 

일제 당국은 경성의 끽다점들을 룸펜 집합소로 몰아가곤 했다. 신문과 잡지도 끽다점을 직업 없는 젊은이들이 시간을 낭비하는 곳정도로 폄하했고, 하루종일 의자에 붙박여서 커피를 마셔대는 끽다족을 벽에 걸린 그림이라거나 물만 먹는 금붕어라고 비아냥거렸다. 1937218일의 <조선일보>마작 구락부,’ ‘당구장과 함께 티룸건전한 시민이라면 가지 말아야할 곳으로 꼽았다.

 

<조선호텔>의 썬룸... 실내에 야자나무와 열대식물 화분을 배치해 '이국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끽다점을 배경으로 하여 태어난 문학과 예술은 암울한 식민지 시기의 증언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은 <조선호텔>25전짜리 커피대신 시내 끽다점의 10전짜리 커피를 마셔가며 글과 그림, 사진과 노래와 영화를 남겼다. 이 작품들에는 침략자에 대한 저항의 숨결과 생존을 위한 체념의 한숨이 함께 녹아들어 있었다.

 

그같은 체념과 저항의식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서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조선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삶의 흔적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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