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한성 정동에서 <손탁호텔>이 문을 열었다. 정식이름은 <한성빈관(漢城賓館)>이었지만, 이곳을 드나들던 경성의 인사들은 경영자의 이름을 따서 <손탁호텔>이라고 불렀고, 1909년부터는 그것이 정식 명칭이 되었다.

 

마리 앙투와네트 존탁(Marie Antoinette Sontag, 1854-1922)은 프랑스 알자스로렌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프로이센이 보불전쟁(1870)으로 알자스로렌을 점령한 뒤에 그녀의 국적은 독일이 되었지만, 일차대전(1914-1918) 종전 후 알자스로렌이 프랑스로 반환되었을 때 존탁은 프랑스 국적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마리 존탁은 18854, 주조선 러시아 초대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 1841-1910)가 한성에 부임할 때 그의 수행원으로 함께 입국했다. 당시 존탁은 30세의 미혼이었고 19099월 프랑스 칸으로 돌아갈 때까지 24년 동안 조선에 체류했다.

 

 

독일 국적의 존탁이 러시아공사와 동행한 것은, 베베르의 처남이 존탁의 제부였던 인척관계 덕분이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미스 손택은 베베르 처남의 처형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녀의 이름은 독일어 발음으로 존탁이었으나 조선 체류 시절에는 손탁(孫鐸), 손택(孫澤), 혹은 송다기(宋多寄) 등으로 표기되었다. 독일어 발음에 더 가까운 존탁(存鐸 혹은 尊鐸)으로 불리지 않은 것은 당시 그녀의 이름이 영어나 프랑스어 등의 다른 유럽어로 잘못 발음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베베르 공사의 한자 이름이 위패(韋貝)’였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손탁은 미모와 교양을 갖추었고, 사교성이 뛰어난데다,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와 조선어에도 능통해서 조선 왕실과 외교관들 사이에서 지명도가 높았다. 특히 프랑스 요리 실력이 탁월했던 손탁은 1886년 베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경복궁의 양식 조리사로 임명되었고, 이후 조선 왕실의 서양식 연회를 주관했다. 그의 정식 직함은 조선 황실 서양 전례관이었다.

 

 

조선 체류 초기에 러시아공사관에 기거했던 손탁은 조선 왕실을 오가며 중요한 연락 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청일전쟁 후 노골적인 침략 야욕을 드러낸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민비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 했을 때 그 다리를 놓았던 것도 손탁이었다.

 

<경성부사(京城府史, 1934)>에 따르면, 고종은 1895년 손탁에게 경운궁과 도로를 마주보는 서방 지소(地所)의 가옥을 하사했다. 정동 1번지1호의 이 한옥(대지 73)은 당시 고종이 기거했던 중명전 바로 옆이었으므로 손탁이 러시아 공사관에 기거할 때보다 더 쉽게 고종과 민비를 알현할 수 있었다.

 

특히 1894년 베베르 공사의 멕시코 전임이 결정되고 신임 공사 시페이예르가 한성에 부임하자 손탁은 더 이상 러시아 공사관에 기거하기 어렵게 되었는데, 이같은 사정을 헤아린 고종이 손탁에게 집을 마련해 준 것으로 보인다.

 

<경성부사><손탁양 저택(孫鐸孃邸)>외국인들의 집회소가 되었고 청일전쟁 후 친미파 일당이 조직했던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18956월 결성)도 그 회관을 지금의 법원 앞에 건설하기까지 손탁의 집을 집회소로 삼았다고 서술했다. 미국공사 실(J.M.B Sill)과 프랑스 영사 플랑시(C de Plancy),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이 정동구락부의 외국인 회원이었고, 조선인으로는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서재필 등이 가입해 있었다.

 

일제가 민비를 살해하자 (을미사변, 1895108) 상시적으로 독살 공포에 시달리던 고종은 한식 식사를 피하고 손탁의 서양 요리에 의존할 만큼 그녀는 고종의 전속 요리사로서 큰 신임을 받았다. 고종이 일제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을 때(1896211-1897220, 아관파천)에도 손탁의 도움이 컸음은 물론이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 고종은 1898316일 손탁에게 정동 16번지의 저택(418)을 하사했다. 이를 증명하는 <러시아공관 좌변양관 하사증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황성의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 대문 왼편의 황실 소유 벽돌 건물(塼屋) 한 채(5)를 독일처녀(德國閨女) 손탁(宋多寄)에게 상사(償賜)하여 그녀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다.”

 

정동 러시아 공사관 대문 왼편은 정동 16번지로 지금의 캐나다 대사관 부지이다. 이 집은 <손탁빈관(孫澤賓館)>이라고 불렸는데, 여분의 방을 이용해 고위급 외국인들에게 숙박을 제공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영빈관의 투숙객들은 왕실과 손탁에 의해 엄격히 선별되었다.

 

 

<손탁빈관>은 정동구락부의 집회소 역할을 계속했다. 정동구락부에는 일본 외교관이나 친일파 인사가 전혀 없었는데, 이는 조선 정부와 왕실이 일제의 침략에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동구락부는 한성 주재 외교관 모임인 외교관구락부(Cercle Diplomatique et Consularire, 1892년 결성)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고종의 반일 정책을 뒷받침했다. 다시 말해 고종이 손관에게 <손탁빈관>을 하사한 것은 그의 정치적 포석이기도 했던 것이다.

 

외국인 방문이 늘고 <손탁빈관>이 협소해지자 고종은 190210월 정동 29번지(대지 1,184)2층 건물을 신축해 <한성빈관(漢城賓館)>이라고 명명했다. 이 건물은 왕실 내탕금으로 건축되었고, 조선 왕실의 영빈관으로 사용되었지만, 소유와 경영은 모두 손탁에게 맡겨졌다.

 

<경성부관내 지적목록(1917)>에 따르면 손탁은 정동에 3필지의 부동산을 소유했다. 정동 1번지1호의 <손탁양 저택>, 정동 16번지의 <손탁빈관>, 그리고 정동 29번지 <한성빈관>였다. 따라서 고종이 그녀에게 땅과 가옥을 하사한 것이 모두 세 차례였음을 알 수 있다.

 

 

<한성빈관>에는 욕실이 딸린 25개의 객실이 마련되었고, 2층에는 귀빈용 객실, 아래층에는 일반 객실과 주방, 식당, 연회장, 끽다점 등이 있었다. <한성빈관>은 정동 공사관 거리에 위치했기 때문에 많은 외교관 및 외국인들이 찾아와 손탁의 요리와 커피를 즐기며 친교를 나눴다.

 

1층에 식당과 커피숍이 있었다는 기록을 제외하면 <한성빈관>의 끽다점에 대한 더 자세한 기록은 발굴된 바 없다. <왈츠와 닥터만>의 에세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손탁호텔에서 커피를 판매했다는 명확한 기록이나 유물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치외교의 중심공간인 정동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특성과 서양인과 외교관, 정치인들이 주로 드나들었던 상황을 볼 때 손탁호텔에서 커피를 판매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손탁호텔이 경성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었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한성에는 경운궁 인근에서 영업 중이던 호텔이 4개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호텔(1898)과 팔레호텔(1901), 스테이션호텔(1901)과 임페이얼호텔(1903년 이전)이 그것이다.

 

손탁호텔이 투숙객과 방문객들에게 끽다점 서비스를 제공했다면 다른 호텔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왕실 영빈관이었던 손탁호텔의 시설이 탁월했던 것은 사실인데, 다른 호텔들에는 목욕시설이 없어 장기 투숙객들에게 불편을 주었던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러일전쟁(190428-190595)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한 뒤에도 손탁은 한동안 한성에 체류했으나, 결국 190995일 일제의 압력으로 조선을 떠났다. <한성빈관><팔레호텔>의 주인 보에르에게 매각되어 <손탁호텔>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계속했으나, 1917년에 이화학당에 매각되었다가, 1922년 완전히 헐리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손탁의 만년에 대한 서술은 엇갈린다. <조선잡기(朝鮮雜記, 1931)>의 저자 키쿠치 켄조(菊池謙讓)는 손탁이 1925년 러시아에서 객사(客死)했다고 주장한 반면, <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外人たる 朝鮮外交秘話, 1931)>의 저자 코사카 사다오(小坂貞雄)는 손탁이 호텔을 프랑스인 보에르씨에게 양도하고 막대한 돈을 쥐어 프랑스로 귀국하여 남방 '니스' 지방에 별장을 사들여 살다가 13년 전(=1918)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키피디어>의 다음과 같은 서술이 맞다면 1930년대 두 일본인의 주장은 모두 틀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손탁은) 1909년에 프랑스 칸으로 돌아갔다. 192277일 오전 8시 프랑스 칸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재 프랑스 칸의 시립천주교 묘지에 '조선황실의 서양 전례관 마리 앙트와네트 손탁'이라는 이름으로 묻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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