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5월호 <청색지>에 실린 경성 다방 성쇠기<후타미(1926)>를 끽다점의 원조라고 서술했다. 그 이전의 끽다점들은 대개 제과점이나 식당을 겸했기 때문이다. <다리야(1917)><금강산(1928)> 등은 양과자와 함께 차를 팔았고, <탑다원(1914)><청향다원(1910)>, <남대문역 끽다점(1909)>, <청향원(1900)>, <홍릉앞 끽다점(1899)> 등은 식당을 겸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커피식사뿐 아니라 숙박까지 제공하던 끽다점들이 있었다. 인천의 <대불호텔(1888)>, 경성의 <손탁호텔(1902)><조선호텔(1914)> 등의 호텔들이었다.

 

조선 최초의 호텔로 알려진 <대불호텔>은 나가사키 출신의 일본인 무역상이자 해운업자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1898)1888년 건립해 1907년까지 운영한 서양식 호텔로 알려져 있다. <인천부사(仁川府史, 1933)><대불호텔>의 건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888년 신축되기 이전의 <대불호텔>. 오른쪽 아래 <호텔 다이부츠>라고 쓰인 건물이다. 

 

 

인천개항 당시, 즉 메이지 16(=1883) 4, 부산에서 인천으로 함께 이주해 온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과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 부자는 가업인 해운업을 하기 위해 함선 매입을 시작하고, 같은 해 말에는 일본거류지 제12호지, 지금의 본정통 1-1번지에 건물을 건축했다.

 

이어 내외국인 숙박에 적당한 시설을 갖춘 여관이 없음을 파악하고, 메이지20(=1887)부터 이듬해에 걸쳐 벽돌조의 서양식 3층 가옥(본정통 1-18번지의 중화루 자리)을 새로 지었다. 상호는 호리 히사타로의 풍모를 고려하여 대불호텔(大佛ホテル)이라는 상호를 붙였다.”

 

일본어 다이부츠(大佛)”큰 부처라는 뜻이지만 창업자 호리 히사타로의 별명이기도 했다. 그는 청일전쟁 기간 중 일본 해군을 힘껏 지원했고, 전후에는 그 대가로 조선연안 해운업을 장악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그밖에도 호리 히사타로는 <호리 상회><호리 음료회사> 등의 제조업과 도소매업까지 경영하면서 인천 일본인 사회의 다이부츠, ‘거물이 되었다.

 

제물포 개항 이후 외국인들의 인천 상륙이 늘어났으나 당시의 교통수단이라고는 우마차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서울까지는 12시간이 걸렸다. 여행객들은 인천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해야 했으나 외국인들이 묵을 숙소가 부족했다. 이를 알아챈 호리 히사타로는 아들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 1870~?)와 함께 <대불호텔>을 개업한 것이다.

 

1888년 <대불호텔> 완공 직후에 촬영된 제물포 포구. 정면에 보이는 굴뚝을 가진 3층 건물이 <대불호텔>이다.

 

<인천부사><대불호텔> 개업이 1888년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일부 서양인들의 기행문에는 1887년 이전에도 <대불호텔>이 영업 중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18854월에 인천에 도착한 선교사 아펜젤러(H.G. Underwood)와 언더우드(G.H. Appenzella), 18855월에 한국에 부임한 영국영사 칼스(W.R. Carles)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당시 제물포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세운 극히 소수의 오두막집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소위고급이라는 다이부츠(大佛)나 해리스(Harris)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다이부츠의 침대들은 평평한 침상에 모포 한 장을 펴 놓은 것이 고작이었고, 해리스 호텔에서는 한 쪽 구멍에서 물이 새들어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물동이를 달아 매 두는 지경이었다.” (언더우드, 188545)

 

끝없이 지껄이고 고함치는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들 한복판에 짐들이 옮겨져 있었다. 다이부츠 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시고 있었다.” (아펜젤러, 188545)

 

나의 숙소는 일본인 거류지에서 단 한 채밖에 없는 2층집의 위층이었다. 앞의 창문을 통해서 바다의 전경이 내다보이며 마루 건너에 집주인과 그의 친구가 살고 있었다.” (칼스, 18855)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기행문을 통해 18854월에도 제물포에 <대불호텔>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펜젤러는 <대불호텔>에서 영어가 사용되고 있어 편안했다고 서술했지만, 언더우드는 해리스 호텔이나 <대불호텔>의 시설이 보잘 것 없었다고 했다.

 

1896년에 촬영된 제물포 일본인 거류지 모습. 왼쪽 3층짜리 굴뚝 건물이 <대불 호텔>, 정면의 3층 건물이 중국인 소유의 <스튜어드 호텔>이다.  

 

주목을 끈 것은 칼스의 기록이었다. 그는 18855월의 <대불호텔>일본인 거류지에서 단 한 채밖에 없는 2층집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1884113일 인천의 일본 영사 고바야시(小林)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도 호리 히사타로의 2층집이 언급되어 있었다.

 

올해(=1884)는 인천 개항 이후 인가가 점차로 늘어나 거류지 체제가 이루어진 첫해로 거류민들은 집집마다 일장기를 내걸고 인천에서 처음 맞는 천장절을 축하했습니다. 정오 12시부터 무역상들 가운데 수십 인이 뜻을 모아 제12호지 호리 히사타로의 누각 위에서(第十二號地堀久太郞樓上)’ 입식 연회를 열고 세관 관리를 비롯한 내외 동업자들을 초대하였는데, 참석한 사람이 수십 명에 달했습니다.”

 

일본 건축에서 누각이란 목조 2층집을 가리키므로 고바야시 영사가 언급한 호리 히사타로의 누각은 칼스 공사가 숙박했던 일본인 거류지에서 단 한 채 밖에 없는 2층집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호리 히사타로는 1887<대불호텔>을 신축하기 전에도 같은 상호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같은 사실은 미해군 장교에 의해 확인된 바도 있다. 미국군함 주니아타호(USS Juniata)의 군의관 조지 우즈(George W. Woods, 1838-1932)188439일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막 준공된 2층 목조주택의 일본식 여관 <대불호텔>을 보았다고 일기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또 고바야시 영사의 보고서(1884113)에 따르더라도 1884년의 <대불호텔>은 누각(목조 2층 건물)이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대불호텔>의 사진을 보면 새로운 <대불호텔>3층 벽돌 건물이었다.

 

신축 <대불호텔>은 서양식 침대방 11, 일본식 다다미방 24개를 구비했는데, 침구는 훌륭했으나 식사에 대한 의견은 엇갈렸다. 아놀드 새비지-랜도어(Arnold Henry Savage-Landor, 1865-1924)<코리아 또는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95)>에서 대불호텔의 식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일주일의 대부분을 대불호텔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는 로스비프, 다음날은 무틴숍(mutinshops, 양고기로 추정됨-필자 주)이라는 정체 모를 고기 조각을 이따금 볼 수 있을 뿐이었으나, 불행하게도 너무 질겨서 셰필드(Sheffield)()의 칼로도 거의 자를 수가 없었으며, 사람의 치아나 턱이 아무리 날카롭고 강할지라도 그 고기를 씹어 먹을 수가 없었다.”

 

프랑스인 이뽈리트 프랑탱도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2002)>에서 그 호텔의 시설들은 겉보기엔 그럴싸하게 보였으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실로 비참할 정도로 초라했다. 한국의 다른 여관들보다는 훨씬 뛰어났지만, 호텔 지붕은 비가 줄줄 샐 정도였다. ... 침대는 훌륭했으나, 요리에 대해서는 차마 여기에 기록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라고 평했다.

 

그러나 <온땅에 복음(Gospel in All Lands)>이라는 기독교 잡지에 게재된 한국에서 우리의 사명(Our Mission in Korea, 1885)”이라는 기고문에서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대불)호텔의 객실은 넓고 편안했지만 추웠다. 테이블에 앉자 잘 조리된 맛있는 외국음식이 차려졌다.”고 기록했다.

 

<대불호텔>은 1907년경 폐업한 뒤 10년 가까이 방치되었다가, 1918년 중국인 상인들에게 매각되어 중국 요리점 <중화루>가 되었다.

 

이 호텔들이 끽다점을 구비했다거나 커피를 팔았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이들이 근대식 호텔이었고, 주 고객이 서양인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끽다점을 운영했거나 적어도 식사와 함께 커피를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왈츠와 닥터만>의 에세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메뉴판 등 유물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대불호텔에서 커피가 판매되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아쉽지만 서양식 식사가 제공된 호텔인 만큼 커피가 판매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대불호텔은 개업 후 10여 년간 호황을 누렸으나 경인철도가 개통(1899918)되자 서울까지 이동시간이 2시간 이내로 줄어들면서 경영난을 겪다가 1907년경 문을 닫았다. 호텔 건물은 1918년 중국 상인들에게 매각되어 중국 요리점 중화루(中華樓)로 바뀌었다. (*)

 

<대불호텔> 건물은 인천시 중구 중앙동에 재현되어,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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