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과 남승룡, 그리고 최승희
조선인 정체성과 자부심을 간직한 황실학교 졸업생들 중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아이콘이었던 인물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마라톤의 손기정(孫基禎, 1912-2002)과 조선무용의 최승희(崔承喜, 1911-1969)였다. 손기정과 최승희가 조선민족의 희망으로 추앙되었던 까닭은 그들이 ‘조선일’과 ‘일본일’을 넘어 ‘세계일’을 달성했기 때문이었다.
조선민족의 희망이 되기 위해 <세계일 정체성>이 중요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이기고 독립을 이루는 것이 조선인들의 궁극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극일(克日)의 희망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곧 민족의 희망이었을 수밖에 없었다.
극일을 위해서는 조선일(朝鮮一)로는 부족했다. 요즘의 ‘국내 최고’에 해당하는 ‘조선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극일의 준비단계일 수는 있겠으나 극일 자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이 ‘일본일’의 위치에 오를 경우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스포츠나 예술분야에서 일본일에 오른 사람이 많았다. 일본 예선을 거쳐 올림픽에 출전한 조선인 선수들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러나 손기정과 남승룡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조선의 희망으로 추앙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세계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일본일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유도계에서는 성인(柔聖)이라고 불리던 이선길은 일본유도선수권대회에서 4회 우승을 차지한 바 있는 일본일의 조선인이었다. 그 역시 조선인의 희망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종목 자체가 일본 스포츠였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일본일이 극일로 간주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일’은 달랐다. 세계일의 자리에 오른 조선인은 사계의 권위자라는 일반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극일(克日)의 화신으로 해석되었다. 보스턴대학과 하버드에서 수학한 후 뉴욕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조선을 소재로 문학작품을 발표하던 문사 강용흘(姜龍訖, 1903-1972)은 조선의 문필가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영웅이자 신화였다.
세계일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조선인도 환영받았다. 권투선수 서정권은 세계챔피언 결정전에서 패배해 세계일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조선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일반 대중들도 그의 패배를 안타깝게 여겼다. 성패에 상관없이 세계일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조선인들에게는 극일의 시도로 보았던 것이다.
세계일의 가장 극적인 예가 손기정과 남승룡의 올림픽 제패였다. 그들이 조선일과 일본일을 거쳐 세계일에 이르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기록되고 전파되었다. 시상대에서 고개를 숙인 그들의 모습은 슬픔을 넘어 분노로 번졌고 조선의 신문들은 그들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극일을 하고도 극일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조선의 슬픔이자 분노였던 것이다.
경쟁 종목이 아닌 무용에서 최승희가 추구한 세계일은 세계적 무용가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었다. 최승희의 목표는 이사도라 던컨과 마리 뷔크만, 우다이 샹카르와 라 아르헨티나와 메일란팡 등이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이미 일본일을 달성한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에 나선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일의 열망은 손기정과 남승룡의 그것과 같았다. 극일을 하려면 세계일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여성 무용예술가 최승희의 세계일 정체성은 조선인 정체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의 조선인 정체성은 자존심을 지킬뿐 아니라 자부심을 펼치는 것이었다. 황실학교 숙명여학교 시절부터 다져온 조선인 정체성은 결국 일본일을 넘어 세계일을 지향하게 만든 것이다.
손기정의 올림픽 우승 후 최승희는 도쿄 라디오방송과 잡지 인터뷰 등에서 “일본이 우승해서 기쁘다, 그러나 조선인이 이겨주어서 더욱 기쁘다”고 말했던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최승희는 여기에 덧붙이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말이 한마디 더 있었을 지도 모른다. “대한제국 황실학교 출신들이 이겨주어서 더더욱 기쁘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둘 다 양정학교 졸업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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