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보래관과 욱관이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한 이후 많은 연극장들이 차례로 그 뒤를 따랐다. 1915년 12월19일 행좌의 극장주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는 시설이 노후된 연극장을 폐관하고, 주변의 땅을 더 사들여 총 120평의 대지 위에 르네상스 러시아풍과 일본풍의 절충양식으로 2층짜리 현대식 행관(幸館, 1916-1930)을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개관했다.
1922년 홋카이도 하코다테 출신의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 1892-)는 행관을 인수하는 한편 영화배급회사 <사쿠라바상회(サクラバ商會)>를 설립해 부산 지역을 포함하여 전 조선과 만주까지 영화 배급망을 구축했다. 그는 행관을 <제1행관>, 영도의 수좌(壽座, 1924-1945)를 임대해 <제2행관>으로 직영하면서, 일본의 도호영화제작소, 연합영화예술가협회, 동아키네마주식회사 등과 특약을 맺어 경성, 안동, 대련 등에도 출장소를 두어 영화 배급업무를 확대했다.
극장도 부산 <행관> 외에 경성의 <중앙관>, 평양의 <평양키네마>, 안동의 <전기관> 등은 임대 계약관으로, 울산의 <상반좌>, 대구의 <대송관>, 대전의 <대전관>, 목포의 <희락관>, 군산의 <희소관>, 이리의 <이리좌>, 원산의 <원산극장>, 해주의 <해주좌>, 청도의 <낙락관>, 대련의 <제국관>, 무순의 <보관>을 직영순업부로 운영했다.
사쿠라바 후지오는 영화 상영을 극장에만 국한하지 않고, 부산호텔이나 초량의 철도클럽, 신문사와 도청 등의 각 관청과 회사에까지 출장하여 영화 영사업을 개시하여 영업 전략을 다변화해 나갔다.
1929년 7월18일 행관은 부산 최초로 발성영화 상영시설을 갖추고 마키노 영화사가 제작한 발성영화 제1회작 <돌아오는 다리>를 상영하여 발성영화 상영관 시대를 열었다. 1927년 최초의 발성영화 미국의 <재즈싱어>가 나온 이후 2년만의 일이었으며,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만들어지기 6년 전의 일이었다.
행관은 행좌(1903-1915) 시기부터 소화관(1931-1945) 시기에 이르기까지 부산지역 극장사의 등뼈와 같은 존재였다. 가장 먼저 세워진 극장이면서, 대형극장화(1916년)에 성공했고, 발성영화 상영(1929년)의 선두주자 역할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배급망을 확대함으로써 전조선과 만주까지 영업했던 극장이기 때문이다.
행관은 1930년 11월10일의 화재로 소실됐다. <사쿠라바상회>의 지하실 영화필름 저장소에서 발생한 화재는 극장까지 전부 태웠고, 약 3천권의 필름을 포함, 30여만원의 피해를 입혔다. 부산부 당국으로부터 같은 장소의 극장 재건축을 허가받지 못한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는 1931년 12월31일 남빈정2정목 22번지(지금의 중구 창선동2가 47번지)에 새로운 활동사진 상설관 소화관(昭和館쇼와칸, 1931-1945)을 개관했다.
대지 164평에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소화관은 연건평이 344평, 무대만도 25평의 널찍한 극장이었다. 관람석도 861석(1932, 「부산상공안내」)으로, 층별로 등급석을 구별해 1층에는 2등석 475석(남자 135석, 여자 65석, 가족 275석), 2층에는 1등석 226석(남자 71석, 여자 35석, 가족 120석), 3층에는 3등석 160석(남자 48석, 여자 48석, 가족 64석)을 배치했다.
행관(1916-1930)과 함께 부산 극장가를 모양지었던 극장들은 13개를 헤아렸다. 행관의 개관 당시에는 이미 부산좌(1907-1923)와 변천좌(1912-1916), 동양좌(1912-1918)와 질자좌(1912-1918), 욱관(1912-1916)과 보래관(1914-1945)와 초량좌(1914-1917) 등의 7개 극장이 영업 중이었고, 행관 이후에 개관되어 동시에 존재했던 극장들로는 상생관(1916-1945)과 국제관(1920-1929), 유락관(1921-1932)과 태평관(1922-1943), 수좌(1924-1945)와 중앙극장(1930-1945) 등의 6개관이 있었다.
부산 최초의 극장인 행좌(1903-1915)와 최초의 발성영화 상연관 행관(1916-1930), 그리고 부산 최대극장 소화관(1931-1945)의 역사를 합친다면 이는 부산극장사의 등뼈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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