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부산에서 무용 공연은 주로 세 극장에서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국제관(1920-1929)><부산공회당(1928-1945)><부산극장(1934-1945)>이 그것이다.

 

<국제관>에서 공연했던 일본인 무용가로는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와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있다. 후지마 시즈에는 1925114<국제관>에서 조선에서는 최초로 신무용 공연을 열었고, 이시이 바쿠무용단도 19263월에 경성과 인천, 대구 공연에 이어 부산공연(3/27-8)을 국제관에서 가졌다. 그밖에도 19281020일의 <부산일보><도쿄무용연구소>의 신인 무용가들이 <국제관>에서 공연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최승희는 <국제관>에서 무용공연을 가진 적이 없다.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던 1929년 말에는 <국제관>이 이미 화재로 소실되어 없어졌기 때문이다.

 

 

19284월 개관한 <부산공회당>15백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공연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무대와 조명 시설이 좋았기 때문에 정상급 무용가들의 공연이 주로 부산공회당에서 열렸다. 특히 <국제관(1920-1928)>이 화재로 소실된 직후에는 무용공연이 대부분 부산공회당에서 열렸다.

 

특히 1930년에는 배구자와 최승희, 이시이 바쿠와 조택원 등이 부산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열었다. 111일에는 배구자가, 1930524일에는 최승희, 112일에는 이시이 바쿠가 부산공회당에서 공연회를 가졌다. 이후에도 1931217-18일과 193641, 1941425일에는 최승희가, 1932715일에는 이시이 바쿠가, 193451일과 193678일에는 조택원이 <부산공회당>에서 공연을 가진 바 있었다. 1934111일 이시이무용단에 복귀한 최승희와 이시이 바쿠가 함께 공연한 것도 <부산공회당>이었다. 최승희가 <부산공회당>에서 공연한 것은 5회로 다른 무용가들에 비해 가장 많았다.

 

 

이 같은 정상급 무용가들 외에도 1931418일에는 <일본음악과 무용의밤><부산공회당>에서 열렸고, 193235일에도 아트협회 주최로 조선호 모금을 위한 <음악무용의 밤>이 개최되었다. 1934224일에는 일본의 천재무용가로 불리던 카와바타 후미코(川畑文子, 1916-2007)의 공연이 <부산공회당>에서 열렸고, 1939112일에도 대구소녀들의 무용발표회가 <부산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1934년에 부산부 서정1정목 9번지에 개관한 <부산극장(釜山劇場후산게키조, 1934-1945)>은 당초 일본 가부키 공연 전용의 대극장으로 문을 열었기 때문에 주로 일본식 연극과 무용 공연이 열렸다.

 

1936919일에는 후지마 시즈에가 <부산극장>에서 공연했고, 같은 해 1221일에도 <일본음악과 무용의밤>이 열렸다. 1939326일에는 <상이군인 위안 무용대회><부산극장>에서 열렸고, 19391122일에는 연예보국(演藝保國)”이라는 기치아래 <청원소패무용 합동의 헌금대회><부산극장>에서 열리기도 했다. 1941118일에도 <상이군인 유가족위안 연극과 무용의 밤>이 열렸고, 19411129일에는 <백의용사를 위한 연극과 무용의 밤><부산극장>에서 열렸다. 1942519일에도 <소패와 무용의 밤><부산극장>에서 열렸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부산의 무용 공연은 <국제관><부산공회당><부산극장>에서 열렸고, 1929<국제관>이 폐관된 이후 1930년대와 40년대에는 주로 <부산공회당><부산극장>이 무용공연을 개최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두 극장의 무용공연에도 차이가 있었다. <부산공회당>은 대체로 서양식의 신무용이나 최승희와 조택원의 조선무용 공연이 열렸고, <부산극장>에서는 일본 전통 악기를 사용하는 일본 무용이 주로 공연되었던 것이다.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은 일본무용계에서는 신무용으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이시이 바쿠의 평을 빌자면, 일본 전통 무용의 색깔이 진하게 유지된 신무용이었기 때문에 일본 전통식 <부산극장>에서 주로 공연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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