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328일 개최되었던 이시이무용단 부산공연 발표곡 12작품은 321-23일의 경성공연 레퍼토리와 거의 같았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또 대부분 일 년 전인 1925428일부터 51일까지 도쿄 아사쿠사(浅草)의 쓰키지(築地)소극장에서 열렸던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귀조(歸朝)1회무용시공연>에서 발표된 작품들이었던 것이었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에 보도된 부산공연 발표곡은 다음의 12곡이었다.

 

 

1: (1) 무용시 <멜랑콜리(メランコリイ, 1922, 北野丸키타노마루)>, (2) 무용시소곡 <법열(法悅호에츠, 1913, 도쿄)>, (3) 무용시 <꿈꾸다(みる유메미루, 1922, 베를린)>, (4) 극적무용 <갇힌 사람(はれたる토라와레타루히토, 1922, 베를린)>, (5) 어린이무용(童踊) <개구장이(わんぱく小僧완파쿠고조, 1926)>, (6) 무용시 <산을 오르다(야마오노보루, 1925, 무사시사카이)>.

 

2: (7) 무용극 <명암(明闇민야미, 1913, 도쿄)>, (8) 무용시 <솔베이지의 노래(ソルヴエーヂの, 1924, 뉴욕)>, (9) 표현파풍의 무용시 <마스크(マスク, 1924, 뉴욕)>, (10) 무용시 <고뇌하는 그림자(ましき나야마시키카게, 1921, 도쿄)>, (11) 무용시극 <젊은 판과 님프(きパンとニンフ와카키판토닌후, 1913, 도쿄)>, (12) 번외 <일본무용(1926)>.

 

이중 <개구장이(1926)><산을 오르다(1925)>, 번외의 <일본무용(1926)>을 제외한 모든 작품은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귀조제1회무용시공연>에서 발표된 작품들이었다. 이중 <법열(1913)><명암(1913)>, <젊은 판과 님프(1913)>3작품은 이시이 바쿠가 야마다 코사쿠와 협력해 무용시 운동을 시작하면서 창작한 작품들이었고, <고뇌하는 그림자(1921)>는 이시이 바쿠가 구미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에 만든 작품이었다.

 

 

한편 <멜랑콜리(1922)><꿈꾸다(1922)>, <갇힌 사람(1922)><솔베이지의 노래(1924)>, <마스크(1924)> 등의 5작품은 이시이 바쿠가 구미 순회공연 중에 창작한 작품들이다. 따라서 부산 공연 12개 작품 중 8개는 구미 순회공연까지 창작된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반면, <산을 오르다(1925)>192510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같은 쓰키지 소극장에서 개최되었던 <2회 신작무용시발표회>의 발표곡이었다. 이는 구미 순회공연에서 돌아와 무사시사카이(武蔵境)에 무용연구소를 개소한 다음에 창작한 것으로, 이후 이시이 바쿠의 전 무용경력을 통해 가장 유명한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1926년에 초연된 <개구장이>는 만주와 조선 순회공연에 참가한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가 공연할 수 있도록 창작한 작품으로 보이며,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일본무용>은 만주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관객들을 위해 창작한 일본색 짙은 작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시이 바쿠의 부산공연에서는 입단 3일차의 최승희가 맡을 역할은 없었을 것이다. 공연 준비에 참가하거나, 공연 중 대기실에서 의상과 소품 등을 위한 심부름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직접적인 참가방법이 없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최승희가 부산공연을 선용하는 최적의 방법은 공연을 관찰하면서 무용과 무용공연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는 것이었을 것이다.

 

최승희는 부산공연 레퍼토리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최승희와 이시이 바쿠는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 없지만, 최승희가 배운 점이 많았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 무용 작품들이 스승에 의해 창작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이시이무용단에서 안무가는 이시이 바쿠뿐이었고, 나머지 3명은 그가 창작한 작품을 익혀 공연하는 무용수였다. 심지어 구미 순회공연에 동행했던 코나미조차도 안무가가 아니라 무용수에 머물렀다.

 

대구와 부산에서의 초기 공연 관람을 통해 최승희는 무용가 중에서도 안무가와 무용수가 구별된다는 사실, 그리고 안무가를 겸한 무용가야말로 자신이 지향하는 진정한 무용가라는 점을 깨달았을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가 비교적 초기부터 안무가가 되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입단 직후부터 공연을 내부에서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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