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바쿠의 첫 부산공연의 첫 발표작품은 <멜랑콜리(メランコリイ, 1922)>였다. 1927년 7월에 발간된 <이시이 바쿠 팜플렛1집(1927)>에는 이 작품이 이시이 바쿠가 유럽행 여객선 키타노마루(北野丸) 선상에서 안무한 작품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시이 바쿠는 1922년 12월4일, 그의 처제(=아내의 여동생)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와 함께 고베에서 기타노마루(北野丸)에 승선해 프랑스로 향했다. 그의 첫 해외 순회공연이었다. 이 즈음 이시이 바쿠는 오랜 무명 시절 끝에 대중적 성공을 이뤄냈고, 마침내 무명의 설움을 벗어나 돈도 벌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이시이 바쿠는 아사쿠사 오페라의 대중적 인기보다 순수예술무용을 추구하기로 하고 유럽으로 떠났다.
이시이 바쿠가 고향 아키타(秋田)을 떠나 도쿄로 상경한 것은 1909년 3월,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평론가 오마치 케이게츠(大町桂月, 1869-1925), 음악가 코마츠 코츠케(小松耕輔, 1884-1966) 등을 찾아가 문학수업과 음악수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대중소설 작가 코츠기 텐가이(小杉天外, 1865-1952)의 문하에서 잠시 문학수업을 했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1911년 2월 <제국극장>이 모집한 관현악 단원 모집에 응모한 이시이 바쿠는 25명의 한 명으로 합격, 바이얼린 주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시이 바쿠는 입단 2달 만에 무단결근을 이유로 해고됐다. 딱한 사정의 친구를 위해 관현악단에서 대여 받은 바이올린을 전당포에 맡겼다가 되찾아오지 못했고, 악기가 없어 연습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11년 8월 이시이 바쿠는 제국극장에 다시 채용되었다. 이번에는 관현악부가 아니라 가극부였다. 제국극장은 극장 건물이 완성되기 전부터 여배우 양성소를 설치했고, 1기생 모리 리츠코 등의 활약으로 흥행에 성공한 데 힘입어, 이번에는 가극부, 즉 오페라단을 창단한 것이다.
4백여명이 응모해 15명이 채용된 가극부 1기생 중에 이시이 바쿠가 포함되었고, 이후 4년 동안 성악과 무용, 연기 등을 연습하면서 공연에 출연했다. 재정난을 이유로 가극부가 관현악부와 병합되어 양극부로 개칭된 후, 발레 교사로 초빙된 로지와의 갈등으로 이시이 바쿠는 1915년 양극부를 자퇴했다.
이후 이시이 바쿠는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음악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 1886-1965)와 극작가 오사나이 카오루(小山内薫, 1881-1928)와 교류하면서 일본의 신무용을 개척했다. 두 사람은 제국극장에서 실망과 실패를 경험한 이시이 바쿠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고, 이들의 우정은 평생 계속되었다.
이시이 바쿠의 신무용 첫 발표는 1916년 6월2-4일 제국극장에서였다. 오사나이 카오루가 창단한 극단 <신극장>의 제1회 발표회에서였다.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의 음악에 자신의 안무를 곁들인 신무용 작품 <일기의 한쪽(日記の一頁)>과 <이야기(ものがたり)>를 발표했다. 관객과 언론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관객은 29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부분 초청인사들이었다. 언론의 반응도 냉담했다.
이시이 바쿠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곧이어 6월26일부터 3일간, 혼고자(本郷座)에서 열린 <신극장> 제2회 공연에서 <명암(明闇)>을 발표했고, 9월에는 우치노마루의 보험협회강당에서 열린 <신극장> 제3회 공연에서 창작무용 <유모레스크(ユーモレスク)>, <젊은 판과 님프(若きパンとニンフ)>, <파란 불꽃(青い焔)> 등을 발표했다. 관객과 언론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했다. 일본 전통무용도 아니고 서양식 발레도 아닌 새로운 양식의 무용 공연이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생소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연이은 실패 후 1916년 10월 이시이 바쿠는 생활을 위해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무용 강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다카라즈카의 오락무용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시이 바쿠는 1917년 2월24일 오사카의 긴마츠자(近松座)에서 <근대성악무용대회>를 열고 도쿄에서는 실패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다시 상연했다. 이번에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사카의 성공에 힘입은 이시이 바쿠는 도쿄로 돌아와 카마쿠라(鎌倉)와 쇼난(湘南), 오이소(大磯)와 히라쓰카(平塚)와 요코하마(横浜) 등지에서 <납량음악무용대회>를 성공으로 이끈 후 1917년 10월23일 도쿄가극좌(東京歌劇座)공연에서 도쿄의 관객과 평론가들의 인정을 받았다.
1917년 교토 <미나미자(南座)> 공연 중에 오바 야에코(大場八重子)를 만났고 도쿄에 돌아와 결혼했다. 혼인신고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19년 2월1일로 되어 있다.
<도쿄가극좌> 좌장으로 흥행에 성공한 후 이시이 바쿠는 1918년 9월 <도쿄가극좌>를 떠나 <도쿄오페라좌>를 새로 결성, 활동을 계속했다. 이때 아내 야에코의 여섯 살 연하의 여동생 코나미(小浪)가 입단해 재능을 발휘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도쿄오페라좌>가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할 무렵 이시이 바쿠는 폐침윤(肺浸潤)을 진단받아 치바현립병원에 입원해 1년 동안 폐렴 치료를 받았다. 1920년 봄에 치바(千葉) 현립병원을 퇴원한 이시이 바쿠는 <도쿄오페라좌>에 복귀했지만 그때부터는 도쿄 공연보다 지방 순회공연에 주력하기로 결정하고 홋카이도로 떠났다.
홋카이도 첫 공연은 하코다테(函館) 공연이었다. 입원 중에 구상한 돌도라(ドルドラ)곡 <추억>, 세자르크이(セザールクイ)곡 <오리엔탈>, 사이토 주산(斉藤住三)곡 <도성사의 환상>, 야마다 코사쿠 곡 <포엠> 등 예술성 높은 신작 무용을 선보였다. 닷새에 걸친 하코다테 공연은 연일 대만원이었고, 구시로(釧路)에서도 성황을 이뤘다. 홋카이도 공연 후 이시이 바쿠는 도호쿠(東北), 호쿠리쿠(北陸), 간사이(關西) 등의 순회공연을 계속했고, 어디에서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고된 순회공연 때문인지 이시이 바쿠는 다시금 건강을 해쳤다. 오사카 공연 중 숙소에서 빈혈로 쓰러져 아베노(安倍野)의 조사(鳥瀉)병원에 실려 갔는데 유문협착증(幽門狭窄症) 진단을 받았다. 재기 불능일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즉각 수술을 받았는데 집도한 조사 박사는 “강한 정신력 덕분인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치하했다.
바쿠는 수술 후에도 한 달 동안 입원치료를 해야 했지만, 퇴원하자마자 <도쿄 오페라좌>로 돌아와 큐슈(九州)와 산요(山陽)지방 공연을 계속했다. 순회공연 도중 아내 야에코는 도쿄에 돌아가 1921년 3월30일 장남 이시이 칸(石井歓, 1921-2009)을 출산했다. 당시 이시이 바쿠는 36세, 야에코가 25세였다.
신작 구상을 위한 시간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이시이 바쿠는 1921년 5월 고베의 취락좌(聚楽座) 공연을 마지막으로 <도쿄 오페라좌>를 해산하고, 도쿄 아사쿠사 마츠바쵸(松葉町)의 집에 돌아와 처제 이시이 코나미(石井小浪)를 상대로 창작무용에 전념했다.
그는 이때부터 무용의 본고장 유럽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선배이자 스승인 야마다 코사쿠는 “바쿠씨의 창작 무용은 유럽의 일류 극장에서도 통용될 것”이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시이 바쿠는 1922년 12월4일 이시이 코나미를 대동하고 고베항에서 기타노마루(北野丸)에 승선해 프랑스로 향했다.
여행 중에도 이시이 바쿠는 창작을 쉬지 않았고, 그 항해 중에 창작한 작품이 부산공연의 첫 작품이었던 <멜랑콜리>였던 것이다. 이시이 바쿠의 키타노마루 항해는 1922년 12월4일 고베항에서 시작되어 1922년 1월14일 마르세유에 도착했으므로, 이 42일간의 어느 시점이 <멜랑콜리>의 창작시기일 것이다.
<이시이 바쿠 팜플렛 1집>에는 이 작품이 에드워드 그리크(Edvard Grieg, 1843-1907)의 피아노 독주 작품 <멜랑콜리(Melankoli)>을 배경음악으로 하여 안무된 작품이며, 그 정조는 “우울하고, 눈 내리는 무거운 하늘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와도 같은, 북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포착하기 어려운 흔들리는 허무한 환상”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서술되었고, “미키 로후(三木露風, 1889-1964)의 시 <황야(荒野)>에서 힌트를 얻은 무용시”라는 주석도 달려 있다.
그러나 <멜랑콜리>의 영상이나 사진, 추가적인 작품설명 등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이 없으므로 이 작품의 모습을 짐작하거나 재현할 방법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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