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근교 애국열사릉에 세워진 묘비에는 최승희가 19111124일 출생해 196988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승희의 공식 생몰일이다. 하지만 여기에 새겨진 날짜들이 그 석비처럼 단단하고 확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선 최승희의 사망일과 사망 경위 및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이 있지만, 어떤 것도 정설로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최승희의 사망일에 대한 확정은 분명한 자료 혹은 결정적 증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반면 최승희의 탄생일에 대해서는 그동안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남북한과 중국,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최승희 탄생 1백주년 행사들도 모두 19111124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최승희가 활동하면서 제자를 키웠던 모든 지역에서 이날은 최승희의 출생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19111124일로 확정된 것은 숙명여학교 학적부 덕분이다. 거기에 명치44(=1911) 1124일 경성 출생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호적이나 여권 기록, 북한 시절의 주민등록이나 가족관계 기록이 있다면 더 확실해 지겠지만, 학적부의 기록만으로도 그의 생년월일을 특정하는 데에 그다지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필자는 최근 최승희의 생년월일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계 각처에 흩어진 최승희의 삶과 춤에 대한 기록을 수집, 검토하는 과정에서, 그의 출생연도가 1912년이며, 출생일이 1224일 혹은 1227일이라는 문헌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승희와 안막이 세계 순회공연 중이던 1940, 멕시코에 입국하면서 제출한 입국신고서에는 최승희의 생년이 1912, 나이가 28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외국에 입국할 때에 제출하는 입국신고서는 출입국 관리에 의해 여권 정보와 대조되고 확인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1912년생의 28라는 기록은 최승희의 여권 기록과도 일치했을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여권에는 그의 출생년도가 1912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에 이르게 된다.

 

 

최승희가 스스로 1912년생이라고 밝힌 기록은 더 있었다. 19395월 브뤼셀에서 두 번째 공연을 준비하면서 최승희는 벨기에 당국으로부터 노동허가서를 발급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이 노동허가서에 나타난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19125이었다. 이 역시 최승희의 여권기록과 대조되었을 것이므로, 최승희의 여권에 나타난 출생연도는 “1912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조금 더 확실해 진다.

 

한편 출생연도와는 별도로 출생일이 1124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나타났다. 192999일자 <중외일보>의 인터뷰 기사에는 섯달 수무일햇날(=섣달 스무 이렛날)이 생일이라는 최양은 열아홉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어리고 순진하게 보였다는 내용이 있다. 섣달은 음력 12월이므로 최승희의 생일이 음력 1227일이었을 가능성도 제기한 것이다.

 

<중외일보>의 기자는 192998일 아침 최승희의 옥천동 자택을 찾아가 그를 인터뷰한 다음, 이를 다음날(9) 기사로 보도했다. 따라서 생일이 1227이라는 말은 최승희 본인이 직접 밝힌 것임에 틀림없고, 인터뷰한 기자의 기억이나 메모가 왜곡될 만큼 시간이 지체된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 정확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기사는 최승희가 인터뷰 당시의 나이를 밝힘으로써 그의 출생연도를 추론할 근거도 제공했다. 최승희가 192998일 현재 19세였다는 말은 이 나이가 한국식 세는 나이였음을 고려할 때 최승희의 생년월일은 19111227일로 역산될 수 있다. 19291127일이 음력 날짜였다면 양력으로는 1912214일이 된다.

 

따라서 최승희의 생년월일은 학적부의 19111124일뿐 아니라, <중외일보> 인터뷰 기사와 외국 기록에 따르면 19111227, 혹은 1912214일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진짜 생일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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