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인천 무용공연을 살피기에 앞서 19225월에 있었던 숙명여학교의 인천 수학여행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당시 숙명여고보 1학년생이었던 최승희가 이 수학여행에 참가했기 때문이지만, 이를 통해 1920-30년대의 인천의 모습, 경성 시민들이 주변 도시들을 여행하던 유형에 대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이 수학여행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경성사립숙명여학교 고등과 학생 183명과 초등과 생도 333명은 직원15인의 인솔 하에 지난 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 인천을 방문)하여 시가(市街)와 동,서공원, 그리고 관측소와 축항(築港) 및 기타 여러 곳을 순람(巡覽=차례로 관람)하고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하였다더라. (인천)”(<동아일보>, 1922529, 4)

 

사진도 없는 단신이지만 압축적이고 밀도 높은 기사이다. 이 보도 내용을 잘 살피면 당시의 숙명여학교, 경인선 기차 운행, 인천의 관광명소와 산업시설 등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있다.

 

 

우선 이 기사에서는 수학여행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의 학생 여행은 1910년대부터 수학여행이라고 불렸다. 교동(校洞)보통학교는 오늘(=19101016) 인천으로 수학여행 한다더라(<매일신보>, 19101016, 27)는 신문 보도가 있었고, 숙명여학교에서는 직원과 생도 일동 89명이 수학여행하기 위하여 지난 (19141)10일에 수원으로 내려갔더라(<매일신보>, 1914111, 3)>는 기사도 발견된다.

 

1920년대에 들어서도 <매일신보>경성여고보 고등과 학생들이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19201013, 3)고 보도했고, <동아일보>경성전수학교 직원과 생도 150명이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1921429, 4)는 기사를 냈다. 1932<부산일보>경성의 숙명여학교 생도 1,2,3학년 3백여명은 수학여행을 위해 512일 개성에 가서 전매국 출장소의 인삼 상황 등 여러 명소와 구적(舊蹟)을 견학했다(1932514, 6)고 보도했다.

 

이 기사들로 미루어 볼 때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다른 도시로 견학을 가는 여행은 당일에 돌아오는 경우에라도 수학여행이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에는 3학년 학생들을 일본이나 만주로 일주일씩 수학여행을 보냈던 적도 있는 것을 보면 숙명여학교가 각 학년 혹은 전학년 학생들을 적어도 연1회 이상 다양한 형태의 수학여행에 참여하도록 주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위의 기사들을 통해 우리는 숙명여학교가 수원(1914)과 인천(1922)과 개성(1932) 등을 자주 수학여행의 대상지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도시들은 모두 경성에서 가깝고, 철도로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역사적 유적이나 근대적 산업시설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같은 도시 안에서 소풍을 가는 것은 원족(遠足)’이라고 불렸다. <매일신보(19101016, 2)>사범학교 직원과 학생 일동은 어제(=1015) 창의문(彰義門) 밖으로 평야원족회(平野遠足會)를 행하였다고 보도했는데, 이처럼 경성의 학생들이 경성 내 혹은 교외지역으로 가는 짧은 여행을 원족이라고 불렀다. ‘원족이란 일본에서 유래한 용어로 먼 발걸음이라는 뜻이므로 주로 도보여행을 가리켰지만, 학생들은 전차나 버스를 타기도 했다.

 

 

숙명여학생들이 자주 갔던 원족 대상지는 우이동과 효창원 등이었다. 숙명여학교의 우이동 원족은 <매일신보(1913429, 5)>경성 중부 박동 사립숙명고등여학교 생도 136명은 교사가 거느리고 어제(1913428) 오전 830분 남대문을 떠나는 기차로 운동 겸 사쿠라 구경을 위하여 동소문밖 우이동으로 향하여 갔다더라고 보도한바 있었다.

 

효창원 원족에 대해서도 <매일신보(192154, 3)>오늘 4일 오전9시에 시내 사립숙명여학교에서 고등과와 보통과 학생 전부를 교원들이 영솔하고 원족을 가기로 되었다고 전하고, 보통과 1,2학급 생도들은 아직 유치하여 너무 먼 길은 가기 어려움으로 과히 멀지 않은 동물원으로 가게하고, 그 외 보통과 3학년에서부터 고등과 3년급 생도들은 효창원으로 가서 하루 동안 유쾌히 놀고 오후4시 가량 각각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더라고 보도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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