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1922529, 4)>의 숙명여학교 수학여행 기사를 통해 또 한 가지 확인된 것은 경인선의 시간표였다. 이 기사는 (5)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인천에 도착함)”했다가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를 통해 경인선의 기차들의 발착 시간과 속도를 알 수 있다.

 

우선 당시의 열차시간표를 찾았는데, 1899918일에 개통되었던 경인선의 첫 시간표는 간단했다. 노량진->인천이 하루에 2, 인천->노량진이 2편뿐이었다. 노량진행 기차는 인천에서 오전7시와 오후1시에 출발했고, 인천행 기차는 노량진에서 오전9시와 오후3시에 출발했다.

 

오전7시에 인천을 출발한 기차는 오전840분에 노량진에 도착했고, 20분 쉬었다가 9시에 다시 노량진을 출발해 1040분에 인천에 도착했다. 오후에는 1시에 인천을 출발한 기차가 240분에 노량진에 도착했고, 이 기차는 20분 휴식한 후 3시에 다시 출발해 440분에 인천에 도착함으로써 하루 운행을 마쳤다.

 

 

주목할 것은 경인선이 줄여놓은 거리이다. 이 기차는 도보로 12시간 걸리던 여행길을 1시간40분으로 줄였다. 이 속도가 지금 기준으로는 그리 빠른 것은 아니다. 최초의 경인선 거리가 33.2킬로미터였고, 이를 1시간40분에 달렸으니 그 속도는 약 시속 2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누구든 1백미터를 15초에 달린다면 그 속도가 시속 24킬로미터이다. 즉 당시의 기차는 1백미터를 15초에 달리는 사람보다 느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차 통학을 하던 학생들이 달리는 기차를 뛰어서 올라탔다거나, 만주의 열차강도 마적단이 말을 타고 기차와 나란히 달리다가 뛰어 오르는 일도 당연히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정도의 속도를 가지고도 경인선은 두 도시와 그 시민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우선 인천의 여관과 호텔들이 폐업했다. 인천항에 도착한 선객들이 바로 기차편으로 경성으로 향했으므로 인천에서 숙박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호텔이라는 <대불호텔>이 문을 닫은 것도 경인선이 개통된 직후였다.

 

그 대신 경성 시민들은 점심을 먹으러 인천에 가는 일이 많아지면서 인천의 식당들은 호황을 맞았다. 중국집 <중화루>가 유명해 진 것도 경인선 덕분이다. 경인선은 또 월미도 유원지를 경성시민의 소풍지로 만들어 주었다.

 

 

경인선의 속도가 조선인들을 놀라게 했다면 기차와 함께 도입된 시간 개념이 조선인들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노량진이나 인천에서 오전 열차를 놓치면 오후까지 기다려야 했고, 오후 기차를 놓치면 다음날까지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경인선의 개통식에서 기차를 놓친 사람이 있었다. 조선 정부의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이었다.

 

1899918일 제물포역에서 열린 경인선 개통식에는 대한제국의 고관대작들이 총출동했고, 학부대신 신기선도 당연히 참석했다. 신기선은 구한말의 어지러운 조정에서 그나마 괜찮았던 신하였다. 벼슬 팔아 돈벌이하던 고종에게 뇌물을 근절하지 못하실 경우, 나라의 명맥이 끊길 것이라고 호소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경인선 개통식의 귀빈 신기선이 기차의 발차를 코앞에 두고 사라졌다. 기차는 경적을 울렸고 출발 직전에야 비서가 화장실에서 신기선을 찾아냈다. “대감마님, 어서 나오십시오.” 그러자 신기선이 호통을 쳤다. “내가 아직 다 일을 안 보았으니 기다리라고 일러라.” 비서가 호소했다. “대감마님. 화통(=기차)이란 시간을 늦출 수가 없다고 합니다.” “잔말 말고 기다리라고 해라.” 기차는 떠났고 대한제국의 학부대신은 이 역사적 경험을 놓치고 말았다.

 

이 에피소드는 기차와 함께 시간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12간지를 사용하던 시간제가 24시간제로 바뀌었고, 한 시간도 분 단위로 세분화되었다. 그리고 그 세밀한 시간을 모두 잘 지켜야 했다. 새로 도입된 이 시간엄수의 관행은 반상천의 신분을 가리지 않았고, 고관대작이나 미관말직의 지위를 구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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