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1922529, 4)>는 숙명여학생들이 인천 수학여행을 위해 (5)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인천에 도착함)”했다가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당시의 열차시간표를 찾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경인선이 개통되었던 18999월의 열차 운행은 하루 2왕복에 불과했으나, 그 해(=1899) 121일부터는 하루 세 번 왕복, 이듬해인 1900316일부터는 하루 네 번 왕복으로 증편됐다. 6개월만에 2배로 늘어난 것이다.

 

증가세는 계속되어서 19203월에는 9, 19254월에 이르면 하루 13편에 이르렀다. 경인선 운행 20년 만에 열차 편수가 3, 25년 만에 4배로 증가한데다가, 운행 객차와 화물차의 수가 1899년의 3량에서 1925년에는 7량으로 늘어났으니 경인선을 이용한 인적, 물적 수송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1920년의 열차시각표를 보면 남대문에서 기차가 출발하는 시간은 오전 645, 9, 1042, 1210, 210, 515, 610, 750, 1010분이었다. 그런데 이 1920년 열차시각표에는 1922526일의 <동아일보>가 보도한 오전1135분에 인천에 도착하는 기차편이 없다. 오전1135분에 도착하려면 그보다 1시간40분 전인 오전955분에 출발하는 기차가 있어야 하지만, 9시발과 1042분발 기차가 있을 뿐이다. 1920년과 1922년 사이에 열차시간표가 더 증편되었다는 뜻이다.

 

한편 19253월의 열차시각표를 보면 남대문역 출발 열차가 하루 13편으로 늘었고, 출발 시각은 오전635, 740, 830, 915, 1015, 1110, 오후1240, 1445, 1620, 1740, 1835, 2035, 2230분이었다. 이중 오전830분과 오후540분 기차는 급행이었다. 급행의 운행시간은 50분으로 오전830분에 경성역을 출발하면 오전920분에 인천에 도착했다.

 

1920년과 1925년의 열차시간표를 비교해 보면 증편된 4개 열차 중에서 3개가 오전 기차라는 점이다. 첫차가 645분에서 635분으로 10분 당겨졌고, 9시 기차는 915분으로 15분 미뤄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740, 830분발 열차가 2편 증편됐다. 1110분발 기차도 새로 생겼는데, 이는 오전에 인천으로 가는 경성의 여행객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1920년대 들어서는 경인선 덕분에 인천이 경성의 1일 생활권에 완전히 포함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시간표에도 숙명여학생들이 탔던 955분발 기차는 없었다. 915분발과 1015분발 열차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1920년 이후에 955분발 열차가 생겼지만 1925년에는 그것이 감편되어 1135분발 기차가 1110분으로 당겨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19254월에 발표된 열차시각표가 하나 더 있었다. 일본 제1함대가 인천항에 입항하자 일본군의 경성행 왕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마련된 열차시간표였다. 여기에는 경성->인천 열차가 14, 인천->경성 열차가 14편으로 되어 있었다. 인천행 열차 중에서는 오후330분과 오후435분 기차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일본군의 함대 귀환 편의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830분발 급행열차의 번호가 205호이고 그 다음으로 출발하는 915분발 보통열차 번호가 207호인데 그 다음 1110분에 출발하는 보통열차 번호가 211호인 것을 보면 그 사이에 1015분발 209호 보통열차가 있었으나 감편되었다는 뜻이다. 209호가 누락된 것은 그 시간 여행자가 적어서 감편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253월 시행의 인천발 경성행 기차시간표는 6, 75, 85, 910, 1110, 오후1255, 255, 45, 515, 615, 720, 845, 1040분 등이었다. 19254월의 특별시간표에는 오후720분발 경성행 열차가 감편되었고, 그 대신 일본군의 편의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오전720분과 840분 기차가 증편되었다. 숙명여학생들이 타고 경성으로 돌아왔다고 <동아일보>가 보도한 615분발 열차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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