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12월6일 무용가 최승희는 전남 벌교에서 공연했다. 극장은 <벌교구락부>였다. 12월4일의 목포, 12월5일의 광주 공연에 이은 남도 순회공연의 일환이었다.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목포와 광주의 공연을 조사하는 중에 벌교 공연이 언급된 신문 기사가 발견된 것이다. 1931년 11월24일자 <동아일보(3면)>가 지역 모임을 소개하는 <회합> 난에 “최승희 여사 무용회 12월6일 벌교구락부에서 개최”한다고 짤막하게 보도했는데, 이 단신은 12월5일의 광주 <제국관> 공연 보도와 나란히 실려 있었다.
그러나 공연 당일(12월6일)이나 그 직후의 신문에는 후속 보도가 없었고, 그밖에도 최승희의 벌교 공연을 언급한 문헌은 더 이상 발견된 것이 없다. 최승희는 실제로 벌교에서 공연을 했을까? 혹시 기획되고 공고되었지만 연기되거나 취소된 것은 아니었을까?
무용 공연이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일은 자주 있었다. 1930년 8월25일로 예정되었던 최승희의 청주 공연은 “악사의 준비에 미비”해서 9월12일로 연기되었고, 1930년 10월30일로 기획된 대전 공연은 “주최 측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11월11일로 연기됐다. 또 1932년 5월20일로 공고되었던 인천 공연도 “회장(會場) 관계로 무기 연기”되었다가 결국 취소되었다.
신문에 공지된 공연이 취소 혹은 연기되었다면 이는 즉각 재공지되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의 돈과 시간 손실을 막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1931년 12월6일의 벌교 공연은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다는 보도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예정대로 이뤄졌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벌교 공연의 실현 여부에 의구심이 드는 것은 벌교가 소도시였기 때문이다. 벌교읍의 1930년 인구가 2만3천명이었고 일본인이 집중 거주했던 벌교포의 인구도 5천명 남짓이었던 벌교읍이 조선의 신무용 톱스타 최승희의 공연을 유치했다는 것이 믿어지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최승희는 유학에서 막 돌아온 젊은 무용가였고, 신진답게 최승희의 공연 행보는 공격적이었다. 1930년 2월1일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래 벌교 공연 직전까지 그는 네 차례의 신작발표회를 경성에서 열었고, 각 발표회 후에는 지방 순회공연을 단행했다.
1931년에만도 최승희는 부산(2월17-18일), 춘천(21일), 대구(24-25일)에서 지방 공연을 가졌고, 호남지역에서도 이리(3월1일), 전주(2-3일), 군산(4-5일), 김제(6일) 등에서 공연했다. 최승희가 전라도 공연을 가진 것은 1930년 11월9-10일의 목포 <평화관>공연 이후 두 번째였다.
이후 최승희는 정주(4월3일), 신의주(5-6일), 의주(9일), 선천(11일), 사리원(12일), 개성(14일) 등의 북선 지역에서 공연한 뒤 경성으로 돌아갔는데, 안막과의 결혼식(5월9일)이 예정되어 있었고, 곧바로 네 번째 신작무용 발표회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1931년 9월1일 경성 단성사에서 제4회 신작무용공연을 가진 후 최승희는 다시 지방공연에 나섰다. 수원(9월13일), 김천(16일), 대구(17일), 밀양(21일), 마산(22일), 진주(23일), 통영(25일) 등의 경상도 공연에 이어 해주(10월13일), 신천(14일), 개성(30일)의 북선 공연을 가졌고, 뒤이어 조치원(11월24일), 청주(25일), 대전(26일), 전주(29일), 군산(30일), 목포(12월4일, 목포극장), 광주(5일, 제국관), 그리고 벌교(6일, 벌교구락부)에서 공연을 열었던 것이다.
벌교는 빠르게 성장하는 신흥 소도시였다. 1930년의 벌교읍 인구는 2만3천명, 1940년에는 2만5천명으로 늘어나 광주(6만5천명)와 목포(6만4천명), 여수(3만7천명)와 순천(2만8천명)에 이어 전남에서 5번째로 큰 도시였다. 인구로 본 벌교는 전남에서는 나주와 강진보다 컸고, 전북의 이리와 김제보다 큰 도시였던 것이다.
최승희는 공주와 천안, 이리와 김제 등 인구가 벌교보다 작은 도시에서 공연한 바 있었고, 특히 신천과 재령, 의주와 정주와 선천 등 벌교 인구의 절반에 못 미치는 훨씬 더 작은 도시들에서도 무용 공연을 했었다.
이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최승희가 빠르게 성장하던 신흥 소도시 벌교에서 공연을 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022/5/22,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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