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최승희의 벌교 공연은 채동선과 최승일, 그리고 안막을 통해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혹시 채동선과 최승희가 직접 연결되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있었다.
1929년 9월6일 채동선은 베를린 음악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왔는데, 그보다 한 달 전인 1929년 8월 최승희도 도쿄 무용 유학을 마치고 귀경해 있었다. 채동선의 귀국 독주회는 1929년 11월28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는데, 최승희의 조선에서의 첫 번째 무대는 1929년 12월5-7일 조선극장에서 열린 찬영회 주최의 <무용,극,영화의밤> 행사였다.
이 행사에서는 박승희(朴勝喜, 1901-1964)가 이끄는 토월회의 화제작 <아리랑>이 재연되면서 화제가 되었고,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崔承一, 1902-?)의 아내 석금성(石金聖, 1907-1995)도 여주인공 봉희 역을 맡아 출연했다. 최승희는 <인도의 애수>, <황혼>, <소야곡> 등 자신의 최초 창작무용 작품을 선보여, 그의 신무용을 궁금해 하던 관객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켰다.
채동선의 독주회와 찬영회의 <무용,극,영화의밤>은 저물어가는 경성의 1929년을 장식한 두 개의 주요 예술행사였다. 독일 유학 경력의 바이얼린의 귀재 채동선 독주회가 경성의 화제가 된 것은 당연했고, 최승희도 이 연주회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시이바쿠 무용연구소 시절 클래식 음악에 대한 연구를 병행했던 최승희는 이 연주회를 직접 참관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 <무용,극,영화의밤>은 경성 유수의 무대예술인들이 총출동했던 행사였고, 몰려드는 관객들의 요청으로 이틀로 예정되었던 공연일을 하루 더 늘려야 했을 만큼 인기가 높았으므로, 채동선도 이 공연을 참관했거나 적어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이후 채동선과 최승희가 함께 출연한 공연도 있었다. 1930년 4월11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중앙유치원의 <신춘음악무용의밤> 행사였다. 1930년 4월1일자 <조선일보(5면)>에 따르면 중앙유치원은 “조선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수많은 아동을 보육하여 온” 유치원이며 “경비의 곤란”을 겪는 이 유치원을 후원하기 위해 예술인들이 공연을 조직했던 것이다.
이 공연에서는 최승희가 무용부문을 담당하는 한편, 음악부문에는 피아노의 김영환(金永煥, 1893-1978), 성악가 안기영(安基永, 1900-1980)과 현제명(玄濟明, 1903-1960) 등과 함께 바이올린의 채동선이 참여했다. 즉 최승희의 벌교 무용공연이 있기 1년 반 전에 채동선과 최승희는 같은 연주회에 참여하면서 면식을 익혔고 서로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또 김영환은 숙명여학교 시절 최승희의 음악교사였고, 안기영은 배재학당 출신으로 최승일과 동창이면서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김영환의 제자였을뿐 아니라,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28년 귀국한 후에는 이화여전의 교수로 임용되어 채동선과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초기 근대 음악가들의 명성은 당대에도 이미 자자했다. 문예지 <동광>은 1931년 6월호(통권22호)에서 “김영환씨는 피아니스트로서 우리 악단의 길을 열은 사람”이며 “고종황제 생신어연이 석조전에서 열렸을 때 어전 연주를 하여 금일봉 3천원을 받은” 경험이 있고, “‘예술가가 칼을 찰 수 없다’며 총독부 학무국 근무를 거절”한 배짱 있는 음악가라고 서술했다.
또 “안기영씨는 .. 악단의 경이”라면서 “작곡가로서도 촉망되는 바 그의 <작곡집1집>과 <2집>, 그리고 <조선민요집> 등은 ... 선진국 악단에 내놓아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평했다. 현제명씨는 “테너보다 바리톤에 가깝”지만 “안기영씨와 같이 악단의 쌍벽”이라고 치하했다.
이어 기사는 채동선씨는 “조선 안에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기술로나 예술로나 첫손을 꼽아야 할 사람”이라면서. 같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채동선을 가르친 바 있던 홍난파를 “상식 이하의 유치한 이론”을 가진 사람으로 폄하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평가를 내렸다.
최승희가 이렇게 10년 이상 연상인 쟁쟁한 음악가들과 같은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무용이라는 신예술을 개척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회를 통해 최승희는 채동선과 직접적인 예술적 교분을 갖게 되었으므로, 그로부터 일 년 반 후에 채동선으로부터 벌교 공연의 제안을 받고 이를 수락했더라도 그다지 이상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2022/5/2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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