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벌교 공연 보도에 의구심을 가졌던 것은 극장 때문이기도 했다. ‘인구 5천명의 벌교포에 무용 공연을 열만한 제대로 된 극장이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최승희는 도쿄 무용유학 시절 <이시이바쿠무용단>의 일원으로 적지 않은 공연에 출연했다. 도쿄의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이나 유라쿠자(有樂座), 호가쿠자(邦樂座)나 니혼(日本)극장 등의 주요 극장들은 수용인원 2천명 이상의 초대형이었다.

 

무용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온 후에 가졌던 4차례의 공연은 경성공회당(1,2)과 단성사(3,4)에서 열렸는데, 둘 다 객석 1천석의 대형 극장이었다. 최승희가 벌교에 앞서 공연했던 목포의 <목포극장>도 정원이 510, 광주의 <제국관>670여석 규모였다. 1930년대에 벌교에도 웬만한 규모의 무대가 마련된 극장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있었다. 그것도 수용인원 1천명의 대형극장이었다.

 

 

1930129일자 <동아일보(3)>“1천여 명을 수용할 벌교구락부 신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전남 벌교포는 5천여 인구가 거주하며 문화적 모든 시설이 거개 구비한 적지 않은 도시라면서도 시민이 모여 공사간 협의할만한 장소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채중현(蔡重鉉)씨가 금번에 구락부(俱樂部)를 당지 중앙지점인 신시장 하단에다 18백원의 적지 않은 금액으로, 건평 130여평에 1천명 이상 수용할극장 설립 공사를 벌여 근일에 끝났음으로 지난 6일 오후에 낙성식까지 거행했다고 자세히 보도했다.

 

1210일자 <부산일보(7)>벌교극장 신축이라는 제목아래 벌교의 백만장자 채중현씨가 고장에 극장이 없는 것을 유감으로 여겨” <벌교극장>을 설립했으며 “6일 낙성식과 피로연에는 일본인과 조선인 2백수십명을 초대"했는데, 이 연회에는 조선 기생의 무용등이 공연되었고 오후 6시경에 마쳤다고 보도했다.

 

1214일의 <조선일보(7)>도 벌교의 공설극장신축이라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벌교 신시장 인접지에다 4천여원의 거액을 들여 구락부식 공설극장을 신축하고 “6일 오후3시부터 낙성식과 피로연을 열었는데 주최자 채중현씨의 개회사가 있은 후 벌교면장 홍인표(洪寅杓)씨의 답사와 다수 내빈의 축사가 이뤄졌고, “여흥으로 조선명창 리화중선(李花中仙) 형제의 성악으로 다수한 내빈에게 많은 위안을 드리고 6시에 폐회했다고 전했다.

 

 

<벌교구락부> 혹은 <벌교(공설)극장>이라고 불리던 이 극장의 공사비용에 대해서는 기사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채중현씨가 사재를 털어 신시장 하단/인접지에 건설해 “126일 낙성식을 가졌다는 점은 모두 공통되므로 믿을 만한 내용이다.

 

당시 벌교에는 2개의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홍교에 가까운 상부마을의 구시장과 벌교역에 가까운 하부마을의 신시장이 그것이다. 지금의 벌교시장은 1930년대의 신시장이 확대되어 지금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홍교 근처의 구시장은 신시장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벌교극장이 신시장의 어디쯤에 설립되었는지는 다음번 현지 취재 때에 확인할 계획이다.)

 

 

한편 <벌교극장>의 규모가 1천명을 수용할 정도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경성공회당>이나 <단성사>에 맞먹는 크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다소 과장일 가능성도 있다. 경성공회당의 2층 넓이가 2백평인데 여기에 1천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벌교극장>의 건평이 130여평이었다면 <경성공회당>식 계산법으로는 대략 6백여명이 정원이었을 것이다.

 

당시 지방 극장들은 대개 지정좌석제가 아니라, 다다미식이거나 장의자를 사용했으므로 행사에 따라서는 1천명이 들어갈 수도 있기는 했겠지만, 정상적으로는 수용인원 650명의 극장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는 목포와 광주의 주요극장들보다 큰 규모였던 것이다.

 

또한 <벌교극장>의 낙성식이 1930126일에 열렸다는 점은 최승희의 벌교 공연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최승희의 공연 날짜가 정확히 그 일 년 뒤인 1931126일이었기 때문이다. , 최승희의 무용공연은 <벌교극장>의 개관1주년 기념행사였던 것이다. (2022/5/23,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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