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극장> 낙성식을 보도한 세 신문의 기사에 공통된 또 한 가지 내용은 이 극장의 설립자가 채중현(蔡重鉉)씨라고 밝힌 점이다. 특히 <부산일보>가 채중현을 벌교의 백만장자라고 소개한 것을 보면 그가 상당한 재산가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기록에 채중현이 만석꾼이라고 서술된 것을 보면 그가 벌교 지역의 대지주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채중현은 벌교의 근검조합장을 역임하고 남선무역회사의 이사로 활동하는 등 금융업과 무역업에도 종사했다. 게다가 사립 송명학교의 기성회장과 벌교유치원의 원감을 역임하는 한편, 새로 학교 부지를 기증하여 벌교소학교(지금의 벌교남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열의를 보였다.

 

교육에 대한 투자와 학교 경영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중현은 1931211일 총독부학무국으로부터 전남의 대표적 교육자로 표창을 받았다. 벌교 주민들도 19343월 소화다리 인근에 채중현 기념비를 세우고 그의 공덕을 기렸다.

 

 

지주이자 기업가, 교육후원자로서 <벌교극장>을 설립한 외에 채중현씨가 필자의 주목을 끈 것은 그가 음악가 채동선(蔡東鮮, 1901-1953)의 부친이었다는 점이다. 채중현이 <벌교극장>을 설립했을 때 그의 아들 채동선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 1년만이었다. 채중현은 아들이 고향에서 연주회를 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부친의 재력과 함께 자신의 영민함과 예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채동선은 1915년 순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성으로 유학, 경성제1고등보통학교(=경기고)에 입학, 3학년이던 1918년 홍난파에게서 바이얼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4학년이었던 1919년 만세운동에 가담해 투옥되었지만 벌교 대지주인 아버지의 힘으로 출옥, 경성제1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유학길에 올랐다.

 

1920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음악대신 영문학을 전공했다. 1924년 와세다대 졸업 후 잠시 미국생활을 했으나, 바이올린 전공으로 마음을 정하고 독일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학교에 입학,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9월 귀국한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1939년까지 4회에 걸친 개인 독주회와 다수의 작품발표회를 가졌다.

 

 

채동선의 약력을 정리하다보니 평행선처럼 떠오른 다른 인물이 있었다.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崔承一, 1902-?)이다. 강원도 홍천 출생인 최승일은 1905년경 대지주인 아버지 최준현(崔濬鉉)를 따라 상경, 배재학당에서 수학했다. 그는 1919년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학교를 중퇴하고, 1920년 도쿄의 니혼대학 미학과에 입학했는데, 1922년 집안이 경제적으로 몰락하자 니혼대를 2년 만에 중퇴하고 경성으로 돌아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 문사로 활동했다.

 

, 채동선과 최승일은 경성에서의 고등보통학교 시절, 삼일만세운동의 경험, 같은 시기의 도쿄 유학생활 경험을 공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이 1년에 1백명 미만이던 시절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를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사이에서라면 채동선이 최승일에게 최승희의 벌교 공연을 제안하고 초대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安漠, 1910-?)도 채동선과 학연이 있다. 안막은 채동선보다 9살 연하이므로 학창시절이 겹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와세다 영문학과 동창이다. 재경성 와세다대 동창회는 1930115일 채동선의 귀국독주회를 주최했고, 연주회가 끝난 뒤에는 동창회 회식이 이어졌다. 당시 경성에 체재했던 안막도 이 연주회와 회식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은 193159일로 최승희의 벌교 공연 반년 전이다. 따라서 <벌교극장> 개관1주년기념 특별행사에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유치하려는 것이 채중현의 계획이었다면, 이는 채동선을 통해 최승일이나 안막을 경유해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는 상황증거에 따른 추론이며, 이를 뒷받침할 명시적 자료는 발견된 바 없다. 그러나 최승희와 채동선의 인적 관계망을 고려하면 그가 호남 순회공연 일정을 짜면서 전주, 목포, 광주를 거쳐 벌교에서 공연을 가졌을 개연성이 충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2022/5/24,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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