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순천역 사진을 의심할 여지없는 자료로 받아들이면 많은 새로운 정보가 추가로 제공된다. 우선 최승희가 순천을 방문한 것은 공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간단히 추론될 수 있다. 그 밖의 다른 이유로 최승희가 아무 연고가 없는 순천을 방문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순천공연은 언제 이뤄진 것일까? 순천역이 문을 연 것이 1930105일이고 <최승희 자서전>의 출판일이 1937730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사진은 그 두 시기 사이에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최승희는 19333월 두 번째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193712월 세계순회공연을 떠날 때까지는 조선 지방공연을 체계적으로 단행한 적이 없다. 이시이무용단에 복귀해 그 일원으로 19341028-29일에 경성 공연을 한 적은 있지만 이때도 지방공연은 없었다,

 

19355월 이시이무용단에서 독립, 도쿄에서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한 뒤로 최승희는 도쿄와 일본 지방공연에 치중했고 조선에서 공연한 적은 없었다.

 

영화 <반도의 무희(1936)>의 촬영을 위해 1935914일 경성에 온 적은 있으나 이때도 지방공연은 물론 경성 공연도 없었다. 19364<반도의 무희> 개봉시기에 맞춰 영화 판촉을 위해 최승희는 조선과 만주 순회공연을 단행했으나 조선에서는 부산과 대구, 경성과 평양과 신의주 공연이 전부였고, 순천에서 공연했을 가능성은 없다.

 

다시 말해 최승희가 재도일한 19333월 이후에는 순천 공연을 할 기회가 없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최승희 자서전>의 순천역 사진이 촬영된 것은 순천역이 개관된 193010월부터 최승희의 재도일이 이뤄진 19333월까지의 약 2년 반의 시기로 압축될 수 있다.

 

 

한편 최승희의 공연 일정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순천 공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2년 반의 기간은 더 압축될 수 있다. 최승희가 재도일하기 전 마지막 공연은 1932519-20일의 공주 공연이었고, 521일로 예정되었던 대전 공연은 연기되었다가 취소된 바 있었다. 이후로는 다른 공연이 없었는데 이는 이시이 바쿠의 조선 공연과 출산, 그리고 늑막염 때문이었다.

 

193264-5일 이시이 바쿠가 경성공회당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때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를 만나 자신의 경성 활동이 난관에 부딪혔음을 고백했다.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공연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재정난에 빠졌던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그를 다시 도쿄로 돌아오도록 허락했는데, 당시 상황을 이시이 바쿠의 부인 이시이 야에코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이시이가 경성에 공연하러 갔을 때에 최승희를 만났는데 아기를 배어 있었다. 배가 불룩한 몸으로 안막과 같이 호텔로 찾아와 다시 이시이 선생 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간절히 부탁하기에 나는 아주 기뻤으나 이시이는 한 달 동안의 여유를 달라고 대답했다.”

 

 

이시이 바쿠의 반승락을 얻은 최승희는 재도일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해산하고 동행을 자청한 김민자를 제외한 제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3년여의 경성 생활이 쉽게 정리되지는 않았고 무엇보다도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193284일 딸 안승자를 출산한 이후에도 문제가 생겼다. 산후조리에 이상이 있었는지 최승희는 급성 늑막염에 걸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잡지 <만국부인(萬國婦人)> 193210월호에 기고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감상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이번(=1932) 가을에는 동경에 가서 그이는 남은 공부를 마저 마치고 나는 무용을 하려고 했는데 아이가 너무 어리고 또 내 몸도 완쾌되지 못한 듯싶어 내년 봄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 19325월 공주공연 이후 재도일이 이뤄졌던 19333월까지 최승희는 순천공연은커녕 다른 어떤 공연도 할 수 없을 만큼 심신이 피곤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순천공연은 순천역 준공시기인 19301025일부터 1932519일의 공주공연까지의 약 1년 반의 시기로 더 좁혀질 수 있는 것이다. (2022/6/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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