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최승희의 순천 공연은 있었다”고 필자는 믿게 되었다. 근거는 한 장의 사진이다. 1937년에 출판된 최승희의 한글판 자서전에는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34쪽 분량의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한 장의 최승희 독사진에 “순천역(順天驛)에서”라고 사진설명이 되어 있다.
그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땐 긴가민가했다. 당시 말로 하면 ‘남선(南鮮)’뿐 아니라 ‘북선(北鮮)’에도 ‘순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니 한자가 다르다. 평안남도의 순천은 ‘順川’인 반면 전라남도의 순천은 ‘順天’이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할 당시의 근거지였던 순천과 여수의 호족이었던 박영규와 김총이 왕건을 지지하면서 고려로 귀화하면서 자신들의 결정이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뜻으로 지은 지명이 순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 자서전(1937)>의 독사진은 “전라남도의 순천역”에서 찍은 것임에 틀림없다.
최승희가 순천역에서 사진 찍을 일은 한 가지 밖에 없다. 공연하러 순천에 갔다가 마중 나온 기자들에게 찍힌 사진인 것이다. 1930년대에는 공연자가 역에 도착하면 기자들이 마중을 나오기 보다는 공연자가 신문사로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공연이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언론사와 기자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시이 바쿠도 1926년의 첫 경성공연 때에는 아침 7시 기차로 경성역에 도착한 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맨 처음 한 일이 이시이 코나미와 함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를 찾아간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 형매 본사 내방”이라는 제목의 단신이라도 한 줄 신문에 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자의 지명도가 높아지고, 특히 정상급 공연자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공연자가 언론사에 찾아가기 전에 기자들이 역으로 마중을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에 신문사 내방 사진이 실리면 아직 정상급 공연자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고, 기자들이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가는 공연자는 정상급이라는 뜻이다.
1927년 10월24일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이시이 바쿠와 함께 경성 공연을 왔을 때는 기자들이 경성역으로 나가 이시이 바쿠-최승희 일행을 맞았다. 그때 경성역(=서울역)에서 찍은 이시이 일행의 사진이 10월25일자 <매일신보(2면)>와 <경성일보(2면)>에 실렸다. <매일신보>는 최승희가 가족들과 찍은 사진을 실었고, <경성일보>는 이시이바쿠와 최승희를 포함한 무용단의 사진을 게재했다.
그런데 이 <경성일보>의 사진이 잘못 소개된 적이 있다. 정수웅의 <최승희(2004: 63쪽)>에서 이 사진을 1927년 11월 이시이무용단 일행이 순천역에 도착한 사진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정수웅은 이 사진의 중앙에 있는 체크무늬 외투여 여성이 최승희라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 사진은 순천역 사진이 아니라 경성역 사진이었다.
1927년 11월 이시이 바쿠와 최승희가 순천에서 공연할 수 없는 일정이었다. 1927년 10월31일의 <매일신보>는 이시이-최승희 일행이 25일부터 27일까지 주야간 공연을 합쳐서 “경성에서 전후 다섯 번 공연을”한 후에 “30일 밤 본사 주최 대전(大田) 무용시 공연회에 출연하고자 30일 아침 열시 경성역발 열차로 남행”하였고, “대전서 즉시 조선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가 구주(九州)에 순회공연”을 하게 된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또 12월1일자 <매일신보(3면)>도 이시이무용단이 “경성, 원산, 대전”공연을 마치고 “구주(九州, 큐슈) 사국(四國, 시코쿠) 지방순업을 마치고 동경에 돌아왔다”고 전했다. 10월30일 대전 공연을 마친 이시이 무용단은 곧바로 시모노세키로 건너가 모지, 후쿠오카, 쿠루메, 노가타, 사세보, 나가사키, 쿠마모토, 가고시마 등의 큐슈 공연을 이어갔고, 그 후에도 마츠야마, 도쿠시마, 다카마츠, 우와지마, 고치 등의 시코쿠 지방공연을 마친 후, 11월말 도쿄의 무사시노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시이 무용단이 순천에서 공연할 일정이 없었다는 말이다. (2022/6/4,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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