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희 선생은 이번 <최승희 나주공연>과 <나주의 극장들> 조사에 참가해 주신 홍일점이다. 역시 첫 나주 방문에서 홍양현 선생의 소개로 처음 인사했는데, 원래 말이 없으신가보다, 하는 착각을 했다. 에코왕곡에서 머무는 동안 말씀이 거의 없으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순형 선생님네 스마트 하우스를 구경하고 정찬용 선생 댁으로 이동할 때 김순희 선생의 차를 얻어타게 됐는데, 아마도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접대 차원이었겠으나, 얼마나 이야기를 구성지고 재미있게 하시는지 깜짝 놀랐다.
게다가 김순희 선생의 전라도 말이 일품이었다. 나는 전라도말에는 여성 앨토 목소리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 편견은 열여덟살 때 생겼다. 대학 시험을 떨어지고 2차 시험을 회피하기 위해 무전여행을 떠났었는데, 광주 검찰청에 근무하시던 외삼촌에게서 여비를 뜯어내기 위해서 충장로 우다방 앞에서 검찰청 가는 길을 물었었다. 그때 들었던 친절한 대답은 둘째 치고 나는 그분의 앨토성 전라도 액센트에 뻑~ 가고 말았다. 재수를 앞둔 비감한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당연히 작업을 걸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내게는 전라도말이 프랑스어보다 아름다웠는데, 단, 여성의 앨토성 액센트여야 했다.
그런데 김순희 선생의 목소리가 딱 그랬다. 운전하시면서 친구 분과 전화통화를 하실 때나 나주가 어떤 곳이고, 자신이 왜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셨는데, 내가 열여덟살 때 들었던 딱 그 목소리였다. 그때 그분이 다시 나타나신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김순희 선생의 또 다른 특징은 자뻑이다. 자신이 이쁘고 아름답고 총명하다는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계셨다. 한때 나주 최고의 미인이었는데, 지금은 3위로 내려앉은 것을 대단히 애석하게 여기셨다. 순위를 누가 매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자신이 그렇게 믿고 사신다는 데야 어쩔 도리는 없다. 실제로 이쁘신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이쁘고 총명하다는 점을 자신감의 근거로 당당하게 내세우시는 모습이 특이했다. 이런 현상을 전문용어로 깔때기 혹은 자뻑이라고 부르는데, 나한테도 익숙한 개념이다.
나는 대학 1학년때 빵꾸(F) 났던 학점을 때우느라고 복학한 뒤에 심리학 개론을 재수강해야 했는데, 그때 담당교수가 장병림 교수님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당시 수업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고, 특히 마지막 수업에 하셨던 말씀 중의 한 구절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제군들, (헐, 실제로 ‘제군’이라는 말을 쓰셨다.^^), 살다보면 힘든 일이 많을 거다. 그럴 때마다 ‘이만하면 괜찮다’고 큰소리로 자꾸 말해라. 그러면 진짜로 괜찮아질거야.”
이게 무슨 말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아마도 자성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의 일종이 아닌가 나중에 짐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주문이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 굴곡과 구비가 많은 삶을 살아오면서도 ‘이만하면 괜찮지’ 하면서 지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이만하면 잘한 거지’ 하면서 자뻑의 경지를 업그레이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남들한테 하지는 못했고, 언제나 혼잣말이었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김순희 선생은 그런 자뻑 멘트를 남들에게도 서스럼없이 날리신다.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고는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이다. 정찬용 선생 댁에서 바비큐 파티 하는 동안에도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앉으신 김순희 선생이 간간이 날리는 자뻑 멘트에 감탄하느라 고기 맛을 몰랐다.
<최승희 나주공연>과 <나주의 극장들> 조사연구를 도와주시도록 김순희 선생께 부탁을 드린 것은 물론 그윽한 앨토성 전라도 액센트나 심각한 수준의 자뻑 때문은 아니다. 김순희 선생의 나주 네트워크가 매우 넓고 촘촘하고 끈끈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주제로 질문을 하든지 김순희 선생은 ‘그건 이러저러한 분이 잘 아실텐데, 소개해 드릴까요’ 하고 대답하곤 하셨다. 그게 뻥이 아니라면(실제로 뻥이 아니었다) 처음 방문하는 낯선 곳에서 조사연구를 하는 연구자에게는 꼭 필요한 가이드였다. 그래서 초면의 실례를 무릅쓰고 조사팀에 참가해 주시기를 부탁드렸던 것이고 다행히 승낙해 주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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