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춤, 즉 최승희류 조선무용의 첫 작품은 그동안 <에헤야 노아라(1933)>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필자는 <에헤야 노아라>에 앞서 적어도 8개의 조선무용 작품이 창작되어 공연된 적이 있었음을 알아 낼 수 있었다.

 

193021일의 <1회 무용발표회(경성공회당)>에서 <영산무(음악 조선고곡 영산회상)>가 초연되었고, 1930330일에 열린 <1회 창작무용 발표회(단성사)>에서는 <농촌소녀의 춤(음악 조선민요)>가 발표됐다. 19301021일의 <2회 신작무용 발표회(단성사)>에서도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 음악 보허자)><정토의 무희(음악 조선정악)>가 초연되었다.

 

 

<향토무용: 농부(음악 조선민요)>193127<2회 최승희 무용발표회(단성사)>에서 초연됐고, 193151일의 <3회 최승희신작무용 발표회(단성사)>에서도 <우리의 캐리카추어(음악 가야금산조)>, <봄을 타고 가는 시악씨들>, <향토무용(음악 대취타)>가 초연됐다.

 

, 19335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열린 <근대여류무용가대회>에서 <에헤야 노아라>가 발표되기 전에도 이미 적어도 8개의 조선무용 작품이 창작, 공연된 바 있었고, 그중 가장 먼저 발표됐던 <영산무(1930)>야말로 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에헤야 노아라>가 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춤이라고 알려져 왔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런 이름붙이기를 시도했던 것이 일본의 평론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공연된 최승희 조선무용 작품은 <에헤야 노아라>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보다 먼저 창작된 8개의 조선무용 작품들은 모두 경성에서 초연되었다. 그중 <영산무>19349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열린 <1회 최승희 무용발표회>에서 <에헤야 노아라>, <승무>, <검무>와 함께 발표되었지만, 이미 돌풍을 일으킨 <에헤야 노아라>와 새로운 관심을 얻은 <승무><검무>에 눌려 <영산무>는 그다지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영산무>가 호평을 받지 못한 것은 조선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연 전에는 <영산무>가 주목을 끌었다. 예컨대 1930131일의 <매일신보(2)>조선정조를 가득 실은 가지가지의 무용이라는 제목 아래 영산회상의 고악과 영산무라는 부제를 사용할 만큼, <영산무>는 이 공연의 대표곡으로 소개됐다.

 

기사의 본문에서도 그 무용은 모두 조선의 정조를 가득히 실은 최양 독특의 무용들이며, “그중에도 <영산무><영산회상>이라는 조선고악에 맞추어 추는 춤으로 더 한층 조선의 향내를 발산하는 것이라고 특별한 설명을 곁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공연이 끝난 후에 신문과 잡지에 보도된 평론들은 <인도인의 비애><사랑의 춤>, <오리엔탈><마주르카> 등의 현대무용에 대한 감상이나 평론이 있었지만 <영산무>에 대해 언급한 글은 단 한편도 없었다. 관객과 평론가들의 이같은 무관심 때문인지 이후 최승희는 19333월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영산무>를 조선에서 다시 공연하지 않았다.

 

 

기대를 받았던 <영산무>가 조선에서 외면 받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최승희의 조선무용이 조선의 관객들에게 충분한 호소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일본유학을 통해 연마한 것은 서양식 근대무용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재와 의상을 조선의 전통에서 찾기는 했으나 그것이 조선무용 작품으로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혹은 <영산무>에 최승희 선생이 직접 출연하지 않고 그의 제자 2-3명이 출연했던 것도 이 작품이 널리 알려지거나 호평을 받지 못했던 원인이었을 수 있다. 193021<영산무>가 경성공회당에서 조선 초연되었을 때에는 조영애(趙英愛)와 노갑순(盧甲順)에 의해 발표되었고, 19349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일본 초연되었을 때에도 카이 후지코(甲斐富士子), 김민자(金敏子), 가토 에미토(加土惠美子)에 의해 공연되었다.

 

최승희 무용 공연, 특히 그의 초기 공연에서는 모든 시선이 최승희 본인에게 집중되었으므로, 그가 직접 출연하지 않은 작품에는 세간의 관심이 적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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