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 <에헤야 노아라(1933)>가 아니라 <영산무(1930)>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많은 저자들이 1930년 경성에서 초연된 <영산무(1930)>의 존재를 알면서도 <에헤야 노아라>를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서술하곤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일본 문헌을 답습한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영산무>보다 <에헤야 노아라>보다 먼저 발표됐던 것은 사실이다. <영산무>1934920일 일본청년관에서 최승희 선생의 <1회 무용발표회>에서 처음 공연되었던 반면, <에헤야 노아라>는 그보다 약 1년반 전인 1933520<레이조카이(令女界)> 주최의 <근대여류무용대회>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1933년 일본청년관에서 발표된 것이 <에헤야 노아라>의 초연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1931년 조선의 경성에서 초연되었음을 보여주는 문헌들이 있다.

 

먼저 조선의 여성지 <신여성(19345월호)>이다. 이 기사는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연대가 1931년이라고 서술했다. 필자는 처음에 이 서술에 의문을 가졌다. <신여성> 기사는 작품 제목을 <에헤노아라>라고 잘못 기록한 바 있다. 또 최승희 선생의 <에헤야 노아라> 공연 사진이 “193311월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재발표할 때 촬영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실은 19331022일의 <이시이바쿠 무용단 가을공연>이었다. 날짜를 잘못 서술한 것이다.

 

<신여성> 기사의 이같은 오류들 때문에 필자는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연대가 1931년이라는 서술도 오류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이 기사의 서술대로라면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은 <근대여류무용대회(1933520)>보다 약 2년이나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사의 서술을 뒷받침하는 다른 문헌이 있다. 다카시마 유자부로(高嶋雄三郞)의 평전 <최승희(1981[1959])>이다. 이 책의 118쪽에서 저자는 <에헤야 노아라>1931년 서울에서 초연되었다고 기록했다.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연대가 1931년이라고 서술한 <신여성>의 기사와 일치된 주장이다.

 

그러나 다카시마 유자부로의 서술에도 문제가 있었다. 같은 책 41-49쪽에서 저자는 <에헤야 노아라>1933년 작품이며, 여성잡지 <레이조카이(令女界)>가 일본청년관에서 주최한 <근대여류무용대회(1933520)>에서 초연되었다고 서술했다. 같은 책에서 같은 작품의 초연시기와 장소에 대해 전혀 다른 서술을 제공한 까닭이 무엇일까?

 

언론인(=신문기자)이자 안막-최승희 부부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다카시마 유자부로가 이같은 사실을 서술할 때 추측이나 자의적 판단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저자가 같은 사실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언급을 기록했을 때에는, 그 각각을 뒷받침하는 문헌, 혹은 증언 자료가 존재했었음에 틀림없다.

 

 

필자는 다카시마 유자부로의 ‘1933년 도쿄 초연설이 다른 언론사들의 기사가 근거였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근대여류무용대회>가 끝난 후 도쿄의 신문들은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가 그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며 그날 일본청년관에서 발표된 것이 초연이라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반면, ‘1931년 서울 초연설은 최승희의 증언을 직접 듣고 기록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1931년 최승희는 경성에서 활동했고, 재차 도쿄에 가기 전이었으므로, 일본에서 활동했던 다카시마 유자부로는, 최승희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혹은 다카시마 유자부로가 안막에게서 들었을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은 193159일이므로 안막은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에 대해 직접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면으로 보나 ‘1931년 서울 초연설의 근거는 최승희가 다카시마 유자부로에게 직접 전했거나 혹은 안막의 증언을 통해 건네졌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경우이든, 다카시마 유자부로는 같은 사건에 대한 상이한 서술을 기록하면서 어떤 것이 사실에 더 부합하는지 검토하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던 것은 사실이다. (2022/8/26,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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