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20일 오후, 고성에 도착했다. 2차 조사의 시작이었다. 1차 조사 방문까지 합치면 다섯 번째 방문이었는데, 이번 방문의 목적은 고성-통영 조사의 계획을 다시 세우는 것으로 잡았다. 우선 1차 조사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셨던 <고성방송국>의 한창식 선배님을 만나서 조사 재개를 의논하기로 했다.
이날 모임에는 문화기획자이자 민예총 사무총장 강욱천 선생도 동참했다. 강욱천 선생은 18일 강원도 방문, 19일 서울 연남동에서 열린 <조각배들의 노래> 콘서트와 밤샘 뒷풀이까지 다 참석하고도, 다음날 통용 약속에 나타났다. 대단한 동선이고, 놀랄만한 열정이다.
사실 이날 약속은 두 달 전에 이뤄진 것이었다. 통영을 네 번째 방문했던 6월말에 나는 한창식 선배님과 다찌 저녁상을 처음 마주했다. 다찌란 일정한 메뉴가 정해져 있지 않고, 시절에 맞는 해물 중심으로 안주를 무한 리필로 제공하는 방식을 가리켰다.
그동안 통영을 자주 방문했지만 대개 단독 방문이었으므로 다찌를 즐길 수 없었다. 다찌는 혼밥/혼술의 1인 고객에게는 제공되지 않았다. 아마도 경제성, 즉 본전이 빠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더러 ‘반’다찌라는 메뉴가 홍보되지만, 굳이 1인 고객을 꺼리는 풍토를 거스를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리고 통영에는 다른 맛있는 해산물 식당들도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한창식 선배님과 다찌 한 상을 마주하고 좋은 시간을 가졌으니 나로서는 감격적인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sns에 약간 자랑질을 했던 것인데, 그랬더니 강욱천 선생이 통영 다찌 회동을 한 번 더 하자면서 8월20일로 일찌감치 날짜를 잡았다.
이 약속이 지켜질는지 의문이 없지 않았다. 8월이면 누구나 한창 바쁘거나 휴가철이었기 때문이다. 수시로 문화행사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강욱천 선생이나, 사전계획도 없이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취재를 다니는 내가 두 달 후의 다찌 약속을 지킬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이 날짜를 기억했고, 20일 고성에 모였다. 한창식 선배도 약간 들뜬 모습이었다. 강욱천 선생이 합류하니 더욱 즐거운 모습이었다. 한선배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통영 다찌 모임을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잘 산다는 게 그냥 그런 것이 아닐까?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좋아하는 일을 자주 같이 하는 게 ‘슬기로운 인생살이’일 것이다.
암튼 우리 세 사람은 고성에서 만나 이내 통영으로 이동, 항남동 선창가에서 다찌집을 찾아 들어갔다. 금요일 저녁이었고, 거의 모든 집이 만원이어서 세 집 문을 두드렸다가 퇴짜를 먹었고 4번째 집에서야 테이블을 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신선한 해초류와 갑각류, 생선회와 구이가 테이블에 오르기 시작했다. 먹성 좋은 우리들은 접시들을 금방금방 비웠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접시가 날라져 왔다. 맥주와 소주는 얼음을 채운 바께쓰에 담긴 채 테이블 아래 놓였다. 바께쓰가 비면 금방 새로 채워졌다. 과연 다찌답다.
항남동 다찌 골목은 ‘도깨비 골목’이라고 불렸다는데, 지금도 골목 여기저기에 그런 팻말이 달린 아치형 장식물들이 세워져 있다. 어부들이 하루의 노동으로 애써 번 돈을 밤새 다 털어먹는 선술집과 아가씨들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런 관행이 사라졌지만, 주량을 넘겨 과음할 수밖에 없는 도깨비 골목의 분위기는 지금도 그대로 남은 것 같다.
시시각각 새로워지는 안주 위에서 우리는 이야기하며 마셨고, 마시고 또 이야기했다. 한창식 선배의 통영-고성이야기도 재밌었고, 강욱천 선생의 민예총 사무총장 적응기도 흥미로웠다. 나는 아주 취하기 전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희생자들을 찾을 계획을 간단히 밝혔다.
“한창식 선배님이 고성 조사를 맡아서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아 주세요. 저는 통영을 조사해서 남익삼씨의 연고를 밝혀 보겠습니다.”
이게 다였다. 이날은 뭐든지 간단해야 했다. 길게 의논하기에는 다찌가 너무 좋았고, 좋은 안주 때문에 술기운이 금방 오를 것이 뻔했다. 한창식 선배님도 ‘그러자’고 하셨고, 빠르게 술잔을 비우셨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계획(^^)은 세워졌다. 이제 실행에 옮기면 된다. (2022/8/23,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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