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8[우리학교 무용신] 일본 방문단은 다카라즈카를 방문합니다. 이 다카라즈카 방문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긴 사연이 있습니다. 1백년이 넘는 시간 끝에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배려와 우애의 노력이 낳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20세기 전반 한일간의 불행했던 역사가 씨줄로 관통하는 중에도, 양국 시민들이 서로에게 보여준 존중과 감사의 인간애가 날줄로 단단하게 짜여서 만들어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1914년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씨가 다카라즈카에서 사망하신 것으로 시작됩니다. 김병순씨는 고향 강릉을 떠나 다카라즈카로 이주, 고베수도공사에 참가했다가 터널 낙반사고로 사망하셨습니다. 1915년 남익삼, 장장수씨도 비슷한 사고로 사망하셨고, 19293월에는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중에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윤길문, 오이근씨가 사망하셨습니다.

 

이분들의 죽음은 이내 잊혀졌습니다. 유사한 사고는 많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사망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철도공사에서 사망하신 두 분의 주검은 화장되었고 유해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뿌려졌습니다. 수도공사에서 사망하신 세 분의 유해는 사고 현장에서 가까운 타마세 마을에 거두어져서 장례도 치러지고 참배묘도 마련되었지만, 이런 사정은 타마세의 바깥 세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섯 분의 죽음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반세기가 지난 후였습니다. 다카라즈카의 향토역사가 정홍영 선생님과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1983년부터 이 지역의 조선인들의 흔적을 찾기 시작하셨습니다. 신문기사를 뒤져서 윤길문, 오이근씨의 사망 소식을 찾아내셨고, 다카라즈카를 방방곡곡 답사하시면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사망 사실도 밝혀내셨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키워드로 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도 없었으니 일일이 종이신문을 넘겨가며 조사하시거나 기사 스크랩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현립 아카이브가 없었을 때이므로 각 지역 관청에 보관된 기록을 찾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조그만 실마리라도 나오면 현지를 방문해서 살펴보고, 주민들에게 탐문해야 했습니다.

 

어렵게 모아진 자료와 증언들은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 하나의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 정리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세 분이 사망하신 고베수도공사와 두 분이 사망하신 구국철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고베수도공사 희생자에 대해서는 사망 이후의 사정을 찾아내지 못하셨지만,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 사망자에 대한 기록과 사고현장을 확인하실 수 있었고, 두 분은 그때부터 매년 윤길문, 오이근씨의 기일(326)에 맞춰 위령 제사를 드려오셨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이 위령제사에는 점점 더 많은 일본인 활동가들과 재일동포들이 참여하셨습니다.

 

20001월 정홍영 선생님께서 타계하신 후에도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위령 제사를 계속하시는 한편, “이 두 분을 위한 추도비를 세웠으면 좋겠다는 정홍영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지역 인사들의 도움을 얻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추도비 건립을 두 달 앞둔 2020223일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교사 시절 동료이자 다카라즈카지역 사회활동가로 함께 일하시던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을 통해 놀라운 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고베수도공사에서 사망한 세 조선인의 위패가 타마세 만푸쿠지에 모셔져 있고, 매년 824일 지역 부녀회와 함께 무연고자 참배를 드려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에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 만푸쿠지의 아다치 타이쿄-아다치 치쿄 스님은 다섯 명의 조선인 희생자를 함께 기리는 추도비를 세우기로 하셨고, 마침내 2020326일 키리하타 사쿠라공원 앞, 신수이광장에 추도비를 건립하셨습니다. 정홍영-콘도 도미오 연구팀이 조사를 시작한 지 35, 정홍영 선생님이 타계하신지 20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깨닫고 감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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