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는 1939년 유럽 순회공연을 단행했다. 이 순회공연은 한국예술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아마도 1964년 비틀즈의 미국 침공(British Invasion)에 비견할 문화적 사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문화와 예술의 차원과 방향을 질적으로 도약시킬 계기였기 때문이다.

 

이차대전과 냉전이 아니었다면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비틀즈의 팝과 록에 비견할 문화 현상을 이뤘을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제실 무용이 한동안 유럽 발레를 이끌었던 것처럼 20세기 조선무용이 유럽이나 동양에서 그런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한국 예술 전반이 일찌감치 세계화를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한편, 1930년대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한류의 이름으로, 2010년대의 비티에스에 비견되기도 한다. 현상의 규모와 내용의 면에서 그 둘이 비교될 수 있는 대목이 분명히 있다. 특히 둘 다 민족문화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해 나갔다는 점에서 그렇다.

 

최승희의 유럽공연은 조선의 민족무용이 어떻게 처음으로 유럽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해 유럽 관객과 비평가와 언론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1939131일 살플레옐 극장에서의 공연은 그 서막이었다. 그 레퍼토리를 찬찬히 살펴보면 이 공연이 최승희와 조선무용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1939년 유럽순회공연 중의 최승희.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포즈를 취했다.

 

살플레옐 공연의 레퍼토리는 1936년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처음 구상할 때부터 구성되기 시작했고, 1937년 무용영화 <대금강산보>를 촬영하면서 구체화되었고, 1938년 미국 무대에서 일차 테스트를 거친 후, 파리에 도착한 후에도 심사숙고 끝에 보완되어서 발표되었다.

 

유럽의 관객과 평론가들이 최승희 공연의 내용과 의미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유럽에는 조선이라는 나라와 민족을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으니, 그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를 갖춘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승희와 안막도 자기들의 의도를 말로나 글로 설명하지 않았다. 안막은 글을 잘쓰기로 유명해서 이미 20세에 경성의 주요 일간신문에 두루 문학평론을 연재했다. 최승희도 25세의 나이에 자서전을 출판한 저술가이고, 단편소설까지 발표했을 뿐 아니라 여러 잡지에 자전적인 회고록을 기고하던 작가이기도 했다.

 

그런 안막과 최승희가 공연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이들이 말이나 글로 작품을 설명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선 말/글로 설명해야 의미가 전달되는 작품이라면 예술적 감동의 효과는 반감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작품이라면 예술성에 의심의 여지가 생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이유는, 공연 의도와 의미를 말이나 글로 공개할 경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조국 조선의 피식민 상황 때문이었다. 외국에서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일본공관에 의해 본국에 보고되고 있었고, 잘못된 말 한마디나 글 한 줄이 향후의 공연 활동뿐 아니라 이들의 생활과 생존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말과 글이 없었더라도 최승희 공연과 그 발표작품들의 의미를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최승희의 조선과 일본 공연을 감상한 숱한 조선인들과 재일동포들이 생생하게 증언했던 점이다.

 

80년이나 지난 지금도 나는 살플레옐 공연의 발표작품 리스트를 보는 순간 최승희와 안막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불과 수년전만 해도 조선무용의 문외한이었던 내가 그랬을 정도이니, 오늘날의 한국 무용인들과 평론가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 레퍼토리를 다시 한 번 공개하고 그에 대한 해설과 기초 분석을 제공해 보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최승희의 유럽공연의 의도가 조금 더 뚜렷해 지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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