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9일, 최승희의 결혼기념일이다. 90년 전인 1931년 5월9일 오전11시, 안막과 최승희는 동대문 밖의 전문요리점 <청량관>에서 가족과 친척들만 모인 가운데 서정화 선생의 주례로 조촐한 결혼식을 가졌다. 결혼식에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이었다.
최승희의 ‘결혼식장’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 평전들은 대부분 <청량원>이라는 식당을 결혼식장이라고 서술했지만 그런 이름의 식당은 없었다. 그밖에도 문헌에 따라 <영도사>와 <청량사>라는 사찰이 결혼식장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최승희의 결혼과정에 대한 거의 모든 문헌을 섭렵한 끝에 나는 안막-최승희의 결혼식장이 <청량원>도 <영도사>도 <청량사>도 아닌, 전문요리점 <청량관>임을 밝힐 수 있었다. 그것을 조사하는 과정은 원고지 80매 가량이 들어간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거두절미하면 결론이 <청량관>이었다.
그런데, 최승희의 결혼식장으로 <영도사>와 <청량사> 등이 언급되면서 혼란이 생겼던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결혼식 전까지의 매체 보도에 혼란이 생긴 것은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식이 촉급하게 결정되었고, 그에 따라 결혼식장을 예약하는 것 자체가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 결정은 그해 4월17일 이후에 내려졌고, 최승희 부모의 승낙이 떨어진 것이 4월말이었다. 따라서 결혼 일시를 정하고 식장을 예약할 시간이 약 일주일뿐이었다.
특히 결혼식에 임박한 5월5일의 <조선일보>와 7일의 <동아일보>가 결혼장소를 보도하지 못한 것은 이례적인데, 이는 그때까지도 결혼식장이 정해지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혹은 이 결혼식을 가족만의 조촐한 모임으로 진행하기 위해 가족들이 일부러 함구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날짜는 발표하면서 장소만 함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매일신보>가 5월6일 보도에서 결혼장소를 <청량사>라고 한 것은 실수에 따른 오보였을 것이다. 혹은 5일까지의 취재를 통해 당사자나 가족으로부터 ‘식장으로 <청량사>를 고려 중’이라는 정도의 언질을 받고 그대로 기사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정확한 보도를 한 것은 5월8일까지의 취재를 통해 결혼식장이 <청량관>이라고 서술한 5월9일의 <경성일보> 뿐이었다.
매체들의 혼란보다 조금 더 이례적인 것은 최승희의 부정확한 기억이다. 그는 두 권의 자서전(1936, 1937)에서 자신의 결혼 일시를 잘못 기록했고 결혼식장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
<조선중앙일보(1934년 3월1일)>와의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결혼이 “재재작년(=1931) 5월 <청량관>”이었다고 옳게 대답했지만, <삼천리(1935년 7월호)> 기고문에서는 “소화7년(=1932년) 봄 청량리 영도사(永導寺)”라고 서술했고, <조광(1940년 9월호)>과의 인터뷰에서는 “그 이듬해(?) <청량사>”라고 답변했다. 시간이 갈수록 최승희의 회상이 사실과 멀어짐을 알 수 있다.
결혼한 지 4-5년만에 자신의 결혼식 일시와 장소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모호해질 수 있는 것일까? 더구나 결혼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여성에게 훨씬 더 중요했던 시대였던 것을 고려하면 최승희의 망각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그러나, 그동안 최승희의 삶과 춤을 조사하고 연구해 오던 지난 3년여 동안의 경험과 느낌으로 말한다면, 최승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최승희의 삶은 일생을 통해서뿐 아니라 하루하루의 생활도 무용에 파묻힌 외골수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에 든 인터뷰나 기고문을 작성하던 시기는 1933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새롭게 조선무용 분야를 개척하던 시기이다. 그의 최초의 조선무용 작품 <에헤야 노아라(1933)>가 이 시기에 발표되었고, 잇달아 <검무(1934)>, <승무(1934)>, <봉산탈춤(1935)>, <코리안 듀엣(1936)>, <초립동(1937)>, <보살춤(1937)> 등의 걸작을 창작하는 데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특히 1935년 5월부터는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무용연구소를 세웠으므로 이를 꾸려나가는 데에도 혼신의 힘을 쏟고 있었다. 온 신경이 신작품 창작과 무용연구소 운영에 집중되어 있을 때였다. 다행히 이런 노력은 결실을 거두었고 1936년부터 최승희는 조선은 물론 일본 제일의 무용가로 꼽히면서 1938년부터의 세계순회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할 때 당시 최승희에게는 자신의 결혼식에 대한 기억마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무용 활동에 대해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하고 실행해 나가면서도, 그 밖의 일상사에 대해서는 너무도 명백한 오류를 범하곤 했던 것이다.
그렇다. 최승희는 자신의 결혼식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던 무용가였다. 자기 결혼식의 날짜나 장소를 잊거나 혼동하는 것은 쉽게 나타나는 실수가 아니다. 자기 인생의 중대사를 잊어버리는 ‘맹한 실수’일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맹한 실수’는 정신을 온통 무용 한 군데에 집중하던 시기에 최승희에게 일어났던 일시적 건망증, 혹은 기억착오였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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