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잘 알려진 니시노미야의 가장 유명한 역사적 사실은 코요엔(甲陽園) 지역에서 발굴된 지하호일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7개의 땅굴 중에서 제4호 땅굴의 벽에서 조선국 독립이라는 벽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일제 군부는 본토 결전을 위해 전국에 땅굴을 팠는데, 니시노미야의 지하호는 일제 해군의 전투기 시덴카이(紫電改)를 조립하던 카와니시(川西)항공사의 부품생산 공장이 들어설 예정이었습니다.

 

 

이 땅굴을 판 것은 대부분 조선인이었습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5-6백명이 최악의 노동조건 속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가 강행됐지만, 카와니시사가 이 비밀공장에서 비행기 부품 생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본은 패망했습니다.

 

 

이 땅굴의 존재는 종전 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4호 땅굴에서 조선국 독립(朝鮮國獨立)”푸른 봄()”이라는 벽서가 발견된 것은 198711월이었습니다.

 

 

이를 발견한 탐사대는 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탐사대장은 재일조선인 향토사학자 정홍영(鄭鴻永) 선생이었고, 그의 동생 정지영(鄭志永), 그의 아들 정세화의 친구인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그밖에도 탐사 장비를 운반하기 위해 자원한 재일조선인 청년 한명이 동행했다고 합니다. 신도 도시유키 선생은 필자에게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신 바 있습니다.

 

 

그날, 우리 네 사람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지하호 현장으로 갔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은 종전 후에 공개된 미군 전략폭격 조사보고서를 조사하던 중, 니시노미야가 폭격의 대상이 된 것은 거기에 있던 카와니시 항공기회사의 지하 공장이 있었기 때문임을 아셨습니다. 그 지하공장의 위치를 파악하신 후에 가까운 분들과 탐색대를 꾸리신 것이지요.

 

처음에는 정홍영 선생의 아들이자 내 친구인 정세화씨도 같이 가기로 했으나 뭔가 사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고, 조선인 청년 한명이 짐을 운반해 줄 아르바이트로 따라 나섰습니다. 그날 카메라와 전등, 간이 발전기 등을 비롯해서 운반할 짐이 꽤 많았거든요.

 

 

지하호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갈래 길이 나왔어요. 한쪽은 천장과 벽이 시멘트로 발라진 다듬어진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울퉁불퉁한 암벽이 드러난 거친 길이었지요. 우리는 두 패로 나뉘어 탐색에 나섰는데, 나는 정홍영 선생과 함께 거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칠흑 같이 깜깜한 굴속에서 손전등으로 벽을 훑어보았을 때 나는 무언가 글씨 같은 것을 본 것 같았어요. 즉시 정홍영 선생님께 알리자 자세히 살펴보시고 조선인 노동자들의 글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급히 다른 두 사람을 불러서 이 대단한 발견을 알렸고, 다들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우리는 내가 가져간 카메라의 플래시와 타이머를 이용해서 그 글씨를 배경으로 4명의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20001월 정홍영 선생이 타계하셨을 때,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은 <무쿠게통신(178, 2000130일자)>에 수록한 조사에서 정홍영 선생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정홍영 선생은) 효고 조선관계 연구회의 중심 멤버 중 한 명이지만, 무엇보다도 <조선국 독립>이라는 문자가 남아있는 니시노미야시 코요엔의 지하벙커의 발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정선생은 니시노미야, 다카라즈카, 이타미 등의 재일 조선인 역사를 정력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 터널을 발견한 것도 이전부터 미군 전략폭격 조사보고서를 조사하다가 그 지역의 새로운 택지개발 소식을 듣고 달려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요엔에 택지가 개발되면 땅굴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을 우려해 정홍영 선생이 급히 조사를 단행하셨던 것인데, 뜻밖에도 이때 지하호의 벽서가 발견되었던 것이지요.

 

이 니시노미야 코요엔의 지하호 벽서는 일본 정부가 부인하는 조선인 노동자 강제 동원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근거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jc, 202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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