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을 무대로 무용영화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것은 최승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경성관광협회의 기업인들이었고, 조선총독부의 외사과였다.

 

1937218일자 <매일신보>수일 전 조선호텔에서 열린 관광협회와 로터리클럽 회원들의 간담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최승희의 도구(渡歐)에 당하여, 그의 예술을 통해 천하의 명승 금강산을 널리 세계에 선전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고 보도했다. 구체적으로 “(최승희가) 금강산을 배경으로 조선 정서가 농후한 금강산 춤을 추는 영화를 제작하자는 것이었다.

 

기사는 이 제안이 각 방면에서 크게 기대를 모았고, “총독부 외사과와 조선관광협회를 통하여 구체화되었으며, 217일에는 아이카와(相川) 외사과장이 최승희 여사의 친형 최승일씨와 예비교섭을 한 끝에 “(최승희) 여사의 입성과 동시에 실현될 모양이라고 전했다.

 

<매일신보>의 예상대로 <대금강산보> 제작 결정은 신속하게 내려졌다. 경성관광협회와 로터리클럽의 간담회 날짜가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수일 전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215일 전후였을 것이다. 이날의 간담회 결과는 바로 총독부 외사과에 접수되었고 내부검토 끝에 영화 제작이 결정되었다.

 

1937년 2월18일의 <경성일보>는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최승희의 무용 영화가 제작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아이카와 가츠로쿠(相川勝六, 1891-1973) 외사과장은 17일 오후3<경성방송국>에 근무하는 최승일을 총독부로 초청했다. 아이카와 외사과장으로부터 최승희씨가 금강산 무용영화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최승일은 즉석에서 동생이 일찍부터 금강산을 무용화하려고 연구해 왔다면서 이를 수락했다.

 

최승일이 지금의 국정원장에 해당하는 총독부 외사과장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최승일의 승낙은 곧 최승희의 승낙이나 다름없었다. 최승희는 220-21일의 공연을 위해 19일 아침에 경성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최승일이 이 결정을 전화나 전보로 동생에게 알렸는지는 알 수 없는데, 아마도 최승희는 경성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 결정을 통고받았을 것이다.

 

이후에도 일은 신속하게 진척되었다. 최승희는 음악이 있어야 안무할 수 있다면서 금강산 무용영화의 음악으로 아악과 양악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고, 이를 수용한 총독부와 관광협회는 음악에 대한 세부사항을 최승희에게 일임했다.

 

최승희는 아악에는 이왕직 아악부의 리종태(李鍾泰), 양악에는 홍난파(洪蘭坡)를 작곡자로 지명해 220일 밤10시에 작곡자 회의를 가졌다. 이종태와 홍난파는 바로 작곡에 들어가 49일 주제곡 <금강산의 곡(金剛山曲)>을 비롯해 모든 음악의 작곡을 끝냈다. 최승희는 악보를 바로 편곡자에게 넘겼고 526일경 편곡이 완성됐다. 최승희가 편곡된 음악을 바탕으로 무용 안무를 끝낸 것은 6월 말이었다. 이 과정은 모두 언론에 세세하게 보도되었다.

 

1937년 2월18일의 <매일신보>는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최승희의 무용 영화가 제작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조선관광협회와 총독부 철도국 관계자들은 최승희를 대동하고 19373월말 강원도 고성군수의 안내로 외금강 일대를 시찰하면서 촬영계획을 세우는 한편, 6월 중순에는 총독부 외사과의 지원을 받아 유수 영화사인 니카츠(日活)에 금강산 무용영화 촬영을 의뢰했다.

 

니카츠 영화사는 제작예산이 10만원이라는 말에 재정난을 이유로 난색을 표했으나, 외사과의 설득과 철도국의 재정지원을 약속받고 촬영과 배급을 맡기로 했다. 마침내 71,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의 촬영을 타마가와(多摩川) 촬영소에 배당했다고 발표했다.

 

215일경 경성의 기업가 간담회로 시작된 금강산 무용영화 계획은 불과 넉 달 반 만에 음악과 편곡, 안무와 원작을 마치고, 71일 영화사 선정을 끝낸 것이다. 일의 진척이 이렇게 빨랐던 것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들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외사과는 정보기관이자 권력 기구였고, 철도국은 전국적으로 조직이 가장 크고 돈이 많은 기관이었다. 권력과 돈이 함께 움직이니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던 것이다.

 

도대체 금강산 무용영화가 누구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업이었기에 유력 기관들이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서 그다지도 신속하게 일을 진척시켰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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