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순혁명으로 쫓겨난 셰이크 하시나를 살피다 보니까, 방글라데시 현대사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이 또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BNP)의 칼레다 지아(Khaleda Zia)입니다.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는 죽고 죽이는 가족사의 원한이 얽힌데다가, 이들의 정당이 정권을 다투는 주요 정당이었기 때문에, 방글라데시 현대사에서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두 여성은 1991년 이래 방글라데시의 총리를 역임했습니다. 칼레다 지아는 1991-1996년과 2001-2009, 셰이크 하시나는 1996-2001년과 2009-2024년에 방글라데시 총리였습니다.

 

칼레다 지아의 남편인 지아우르 라흐만은,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해방군 사령관을 역임한 군인으로, 1975년 쿠데타를 일으켜, 셰이크 하시나의 부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살해하고 대통령이 된 인물입니다. 지아우르 라흐만은 셰이크 라흐만의 아내와 형제들, 세 아들과 며느리들까지 모든 가족을 사살했고, 서독을 방문 중이던 셰이크 하시나와 그의 여동생 셰이크 레하나만 살아남았습니다.

 

 

쿠데타에 성공한 지아우르 라흐만은 1975년 계엄령 아래서 정부수반이 된 후, 1977년 대통령이 되어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를 창당, 이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5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젊은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1981년 사살당했습니다. 쿠데타 세력이 쿠데타를 당한 것이지요.

 

이 쿠데타로 집권한 후세인 에르샤드(Hussain Muhammad Ershad, 1930-2019)1983-1990년에 대통령으로 방글라데시를 통치했고, 재임중 창당한 자티야당(Jatiya Party)를 자신의 정치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에르샤드의 쿠데타정권은 그가 죽인 지아우르 라흐만의 아내 칼레다 지아의 BNP와 지아우르 라흐만이 죽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의 AL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1991년 총선에서 패배했고, 이 선거에서 승리한 BNP의 칼레다 지아가 총리가 됐습니다.

 

다음 총선인 1996년 선거에서 승리한 AL의 셰이크 하시나는 집권하자마자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을 죽인 1975년 쿠데타 가담자들을 체포해 주모자들을 죽였는데, 주모자의 대표격인 지아우르 라흐만을 처단하지 못한 것은, 그가 이미 에르샤드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이었지요.

 

 

셰이크 하시나는 또 정적인 칼레다 지아도 부정부패 정치인으로 몰아 5년형을 받고 복역하게 만들었는데, 올해 셰이크 하시나가 실각한 다음날 칼레다 지아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방글라데시의 세 주요 정당인 ALBNPJatiya가 쿠데타로 죽고 죽임을 당하면서 얽히고설킨 가운데 탄생한 셈입니다. AL이 중도좌파 정당이지만 좌파정당이 아니라 쿠데타의 잔재이자 민족주의 정당인 Jatiya와 연합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그것은 BNP의 기반인 민족주의 지지자들을 갈라놓기 위해서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암튼,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는 가족의 원한이 얽힌 가운데서도 지난 30년간 방글라데시의 정치를 이끌어왔다고 볼 수 있는데, 둘 다 부친과 남편의 후광으로 정치해 왔다는 공통점을 뺀다면, 칼레다 지아는 셰이크 하시나에 비해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셰이크 하시나가 축출된 지금, 석방된 칼레다 지아가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설지가 주목됩니다만, 80세에 가까운 칼레다 지아가 다시 총리에 도전할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방글라데시에는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정당들도 있지만, 존재감이 미미합니다. 가장 큰 좌파정당은 방글라데시 공산당(Communist Party of Bangladesh, CPB)인데, 총선 득표율이 1% 미만입니다. 이는 쿠데타 정권들이 공산당과 사회주의정당, 그리고 노동운동을 심하게 탄압해왔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CPB는 다른 좌파정당들과 연합하여 좌파민주전선(Left Democratic Front, LDF)을 결성, 꾸준히 총선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 오늘날 방글라데시의 정치지형은 독립운동 세력과 쿠데타 세력이 방글라데시의 세 주요정당을 구성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군소 좌파정당들이 독자적으로나 세 주요정당과 연합해서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어째 대한민국 정치 지형의 복사판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jc, 202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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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8월의 방글라데시 몬순혁명의 성공으로 셰이크 하시나 총리는 사임하고 인도로 망명했습니다. 셰이크 하시나는 어떤 이유로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의 표적이 되었던 것일까요?

 

 

셰이크 하시나는 제1(1996-2001)와 제2(2009-2024)를 합해 20년 동안 총리로 재임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물론 세계에서도 최장기 여성 정부수반으로 기록됩니다.

 

셰이크 하시나는 방글라데시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과 2대 총리를 역임한 세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의 딸입니다. 셰이크 라흐만은 인도의 식민통치 아래서 발생했던 1757년의 벵골 독립전쟁 플래시 전투(Battle of Plassey) 이래 2백년 만에 벵골의 독립을 성취한 정치지도자로, 방글라데시의 국부로 칭송되는 인물입니다.

 

 

셰이크 라흐만은 1975년의 쿠데타로 암살됐습니다. 셰이크 하시나는 인도로 망명해 군부정권에 의해 입국 금지 당했지만, 부친 셰이크 라흐만이 설립한 방글라데시 아와미 연맹(AL)의 당수로 궐석 선출되어 1981년 귀국, 34세의 나이로 야당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중도좌파 성격의 AL 당수로 하시나는 후샤인 에르샤드(Hussain Muhammad Ershad) 군부정권의 탄압을 받았으나, 또 다른 야당 방글라데시 민족주의정당(BNP)의 칼레다 지아(Khaleda Zia)와 함께 에르샤드 군부독재에 맞섰습니다.

 

 

1991년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총선에서 승리한 BNP의 칼레다 지아가 방글라데시의 첫 여성 총리에 취임했고, 1996년 총선에서는 AL가 승리해 셰이크 하시나가 총리에 취임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도 민주화가 정착되고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시나는 첫 임기동안 긍정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인도와 관계를 개선했고, 인플레이션을 5%미만으로 묶었고, 국민총생산(GDP) 연평균 성장률을 5.5%로 유지했습니다. 식량 생산이 증가했고 빈곤율이 낮아졌고, 주택마련 기회가 늘었고, 저소득층의 수입증가 기회도 생겼습니다.

 

외자유치에 성공해 기업 성장을 도왔고, 군부독재가 독점했던 IT산업을 민영화해 가격을 낮추고 사용자를 증가시켰습니다. 소액금융과 식량지원 등의 정책으로 소외계층의 기회를 넓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셰이크 하시나는 안정과 성장을 이끈 정치지도자로 인식되었지요.

 

 

성공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AL2001년 총선에서 BNP에 패배했고, 칼레다 지아에게 정권을 넘겨야 했습니다. 2006년 총선을 앞두고 쿠데타가 발생,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는 군부정권에 의해 부패정치인으로 기소됐고, 하시나는 2008년 아들이 사는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200812월 총선에서 AL는 군부독재의 잔재인 자티야당(Jatiya Party)을 포함한 14개 정당을 연합해 총선에서 승리, 두 번째 총리임기를 시작했으나, 이때부터 그의 행보는 권위주의적 지배의 경향을 보였습니다.

 

 

2014, 2019, 2024년 총선에서 연속 압승했으나 국내외에서 부정선거로 비난받았고, 소액금융으로 빈민의 재활을 돕던 무하마드 유누스와 결별했습니다. 야당과 학생운동과 언론을 탄압했고, 2018년에는 인터넷을 통제하는 디지털 보안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경제성장이 멈추고 외채가 급증한 가운데 2022년에는 상환불능 외채가 210억달러에 달해 IMF체재에 들어갔고, 그 와중에 부정축재 스캔들에도 휘말렸습니다.

 

 

2024년 청년 실업률이 40%를 넘어선 가운데,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공무원직 30%를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공정성에 반한다는 대대적인 반발을 초래했고, 군경과 당조직까지 동원해 반정부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다가, 적어도 650명의 사망자를 낸 유혈사태를 초래한 끝에, 셰이크 하시나는 총리직을 사임하고 인도로 망명하게 된 것이지요.

 

 

좋은 집안에, 최상급 교육을 받고, 군부독재에 맞서 투쟁하고, 빈민과 여성의 인권과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셰이크 하시나가 어째서 이렇게 추락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방글라데시의 학자들이 분석, 해설할 일이겠고, 저는 권위주의 정부를 무너뜨린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에 집중해야 할 것 같군요. (jc, 202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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