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강산보>의 감독과 배우 지명이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특급 촬영감독을 위촉한 것만으로도 니카츠 영화사는 성의를 보인 셈이었다. 금강산의 경치를 찍는 ‘관광영화’이자 최승희의 무용을 찍는 ‘무용영화’라는 점을 고려한 배려였을 것이다.
촬영이 시작되자 외사과와 철도국의 협조도 재개되었다. 철도국은 니카츠 촬영팀의 이동에 최대한 편의를 주었고, 외사과는 촬영지 섭외를 위해 애썼다. 특히 금강산 지역은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았지만, 니카츠 촬영팀이 이에 구애되지 않도록 일본군의 협조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외사과였다.
평전과 연구서들을 종합하면 니카츠 촬영팀의 조선 로케이션은 1937년 10월18일부터 11월24일까지였다. 10월22일의 <매일신보>와 10월27일의 <동아일보>가 “감독 미즈가에 류이치(水ヶ江龍一) 외 14명의 선발대가 20일 오후 1시35분에 입경하여 그날 밤으로 금강산 로케이션을 떠났다”고 보도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10월18일 도쿄를 출발했을 것이다.
최승희는 촬영팀에 뒤늦게 합류했다. 10월25일의 <매일신보>는 “주역이 될 반도가 낳은 무희 최승희 여사는 일행과 함께 24일 오후1시35분 <아까츠키(あかつき)>로 입성”했고 “경성에서 2박한 후 25일 금강산으로 향할 터”라고 전했다. 최승희가 늦게 합류한 것은 10월14일부터 도쿄츠키지(東京築地)극장에서 공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최승희는 1달이 넘는 로케이션 기간 동안 촬영팀과 함께 조선에 머물지도 못했다. 예컨대 10월30일에는 시마네(島根)현의 마츠에(松江) 시공회당에서 <최승희여사 신작무용 발표회>의 일정이 잡혀 있었으므로, 이 공연을 위해서라도 일본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마츠에 공연을 마치고 촬영을 위해 언제 조선에 돌아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음 공연이 12월5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의 <도구고별공연>이었으므로 아마도 다시 촬영팀과 합류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10월25일부터 10월30일까지 불과 5일 동안의 촬영으로 금강산과 석왕사를 포함, 부여와 수원, 경주와 평양 로케이션을 모두 소화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미숙한 감독과 배우, 스탭들과 분주한 공연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촬영에 최선을 다했다. 무용영화였기에 다행이었던 것은 다른 배우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8개 무용작품 장면만큼은 자신의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극영화’로서의 성공은 보장할 수 없더라도 ‘무용영화’로서의 작품의 수준은 최승희가 결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는 <대금강산보>의 촬영에도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1937년 12월7일자 <미야코신문(都新聞)>은 금강산 촬영장면을 이렇게 서술했다.
“(옥류담) 위로는 산 전체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산 정상에서 최승희의 라스트 신을 찍었다. 으스스한 찬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흰옷 한 벌만 입고 춤을 추었는데 산을 내려와서 보니 일손을 거들었던 일행은 모두 콧물을 훌쩍였지만 그녀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미야코신문> 보도가 12월7일인 것으로 보아 옥류담 촬영은 최승희가 시마네현 마츠에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11월 중순 이후였을 것이다. 11월 중순이면 금강산 속은 한겨울이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흰옷 한 벌만 입고 춤을 춘다는 것은 배우는 물론 무용예술가라면 절대 시도하지 않을 일일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이를 마다하지 않았고 기꺼이 촬영에 임했다. 그만큼 <대금강산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옥류담 촬영에 동참했던 동료 배우 코노 켄지의 발언도 주목할 만하다. “최승희는 (촬영을 위해) 금강산을 올라가면서도 이번 외국여행을 대비한다며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정말 감탄했다.”
당시의 최승희가 얼마나 의지가 단단하고 열의에 차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반드시 완성된 <대금강산보>를 가지고 세계 순회공연에 나서고 싶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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