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역 2층의 구내식당은 최승희의 무용 경력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1926년 3월25일 아침 9시, 최승희의 부친 최준현씨와 큰오빠 최승일, 그리고 이시이 바쿠 부부와 무용단원들이 한데 모여 경부선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시이 바쿠는 그의 자서전 <춤추는 바보(1955)>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출발 직전이었지만 경성역 2층 레스토랑에서 관계자 일동과 간단히 이별의 잔을 교환하게 되었을 때, 거기 모인 사람은 데라다 학예부장, 승희의 아버지, 오빠 승일, 조선 학생복을 입은 승희, 그리고 우리 무용단원들이었다.”
이시이 바쿠는 ‘이별의 잔(別れの盃)’을 교환했다고 했지만 아침부터 술잔을 돌렸을 리는 없었고, 아마도 커피나 차를 나누었을 것이다. 이날 아침 경성역 2층 식당 모임에 대해 최승희도 잡지 <신여성> 1933년 1월호에 기고한 “석정막과 나와의 관계”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떠나는 날 경성역 식당에서 석정 씨들과 우리 가족 사이에 다시 구체적으로 계약이 되어 수학연한을 2년, 의무연한을 1년으로 하였습니다.”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처음 만난 것은 그로부터 이틀 전인 3월23일 저녁,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던 이시이 바쿠의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최승일은 감동에 젖은 동생을 데리고 대기실로 찾아가 이시이 바쿠를 만났고, 그에게 동생을 제자로 입문시켜 주기를 부탁했다. 3월25일의 <경성일보>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다.
“... 경성 제3회 공연을 끝낸 23일 밤10시경 공회당의 이시이씨 일행의 대기실을 찾아와 제자가 되고 싶다고 부탁한 아름다운 조선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경성)부내 체부동 137번지 최준현씨의 영양(令孃) 최승희(16세)였다.”
그날은 최승희가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날이기도 했다. 최승희는 23일 오전10시에 숙명여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졸업식에 참석했다. 이날 졸업한 숙명 17회 졸업생은 모두 76명이었고, 최승희는 그중 8등의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3월7일의 <시대일보>는 숙명 17회 졸업생들의 진로를 유형별로 보도했는데, 사범학교 진학생이 39명, 일본 유학이 13명, 국내 전문학교에 진학자가 5명, 교원 취업자가 2명, 그리고 졸업과 함께 혼인하는 학생이 16명이었다. 그런데 진로가 결정된 학생들의 수를 합해 보면 75명밖에 되지 않는다. 진로가 정해지지 않은 졸업생이 1명 있었다는 말이다. 최승희였다.
그러나 최승희의 진로는 이내 결정되었다. 졸업식 날 저녁 이시이 바쿠를 만났고, 제자 입문을 허락받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이틀 후에 최승희는 가족과 무용단과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경성역 2층 식당에서 계약을 맺고 도쿄로 출발했다.
최승희가 출발한 다음날인 3월 26일자 <매일신보>는 최승희가 무용 유학을 떠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특히 무용시가 남매(=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눈에 띤 가련한 흰옷 입은 조선 소녀의 아담한 자태가 매우 흥미를 끌어 ... 청년 문사 최승일(崔承日)씨의 영매로 올해 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최승희양이 다행히 부모의 승낙과 이시이씨 남매의 눈에 들어 이십오일 아침 경성을 떠나게 된 것이다.”
최승희가 무용계에 투신하게 된 계기로 3월23일 밤의 이시이 바쿠 경성공연을 들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날 난생 처음 신무용을 관람했던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무용시에 감명을 받았고 자신의 운명을 바꿀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그 운명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출발점은 <경성역 2층식당>이었다. 그날 이시이 무용단과 최승희 가족이 함께 마셨던 모닝커피는 이시이 바쿠의 표현대로 ‘이별의 잔’이기도 했지만, 스타 탄생을 알리는 ‘축하의 잔’이기도 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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