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예술가의 눈에 띤 최승희양." 1926년 3월26일자 <매일신보> 2면에 실린 기사 제목입니다. 이 기사가 이른바 "최승희 현상"의 출발점이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20년 동안 '최승희'라는 이름은 조선과 일본 전역에 퍼졌습니다. 중국과 타이완과 오키나와는 물론 남북 미주와 유럽 언론의 주목도 받았습니다. 해방 후 남한 매체에서는 그의 이름이 지워졌지만 북한에서는 더 대대적으로 퍼졌을 것입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소련과 동유럽 각국에서도 그 이름에 열광했습니다.
대부분의 평전들은 <매일신보>의 이 기사가 최승희의 이름이 신문에 보도된 첫 기사라고 서술해왔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매일신보>보다 하루 전인 3월25일에 최승희를 보도한 신문이 있었습니다. <매일신보>의 자매지이자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입니다. 일본어로 발행되었던 이 신문의 3면에 최승희 기사가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습니다.
<경성일보>의 기사는 최승희(16세)가 “경성부내 체부동 137번지 최준현씨의 영양”이며 “금년 3월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일뿐 아니라 “학교시절부터 성악을 잘해서 학우들부터 <카나리아 누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서술했습니다.
또 이 기사는 최승희가 “음악학교를 꿈꾸었으나 입학허가를 받지 못하자 여자사범학교를 지망하여 4월부터 다니게 되었”지만, “마침 이시이 남매가 경성에 온다는 말을 듣고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 오늘 아침10시에 일행과 함께 도쿄로 향하게 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경성일보>는 또 “승희씨는 두 오빠를 가진 사랑스런 외동딸로 ...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고 “숙명여학교에서도 최연소 졸업생으로 부러움을 받아” 왔으며, 이제 “조선이 낳은 한 사람의 무용가로서 밝은 희망을 가슴에 품고 떠나게 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기사에는 몇 가지 ‘오보’가 끼어 있습니다. 첫째, 최승희는 숙명여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한 것은 아닙니다. 78명의 졸업생 중에서 7등이었고, 졸업반 성적이 90점 이상으로 우등상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숙명여고보 17회의 수석 졸업자는 이미 작가로 활약하고 있던 박화성입니다.
둘째 오보는 가족사항입니다. 최승희가 “외동딸”이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최영희(崔英喜)라는 이름의 언니가 있었습니다. 최영희도 진명여고보 출신의 재원이었고, 졸업후 일찍 결혼했지만, 최승희가 숙명여고보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혼하고 친정에 돌아와서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셋째는 그의 진로에 대한 오보입니다. 기사는 “승희씨는 음악학교를 꿈꾸고 있었으나 입학허가를 받지 못하자 여자사범학교를 지망하여 4월부터 다니게 되었”다고 서술했지만, 최승희는 음악학교에 응시한 적은 없습니다. 또 <경성사범학교>에도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낙방했으므로 “4월부터 다니게 되었”다고 한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몇 가지 오보에도 불구하고 <경성일보>의 기사는 최승희의 부친과 큰오빠의 이름을 확인해 주었고, 그의 무용 유학을 도와준 데라다(寺田)와 기무라(木村)씨 등의 일본인들의 이름도 밝혀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떠나게 된 과정과 그 정확한 날짜와 시간까지 알려주고 있으니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경성일보>가 최승희의 무용유학을 가장 먼저 보도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요? 첫째, 이시이 바쿠의 경성공연 후원사가 <경성일보>였습니다. 둘째, 최승희-최승일 남매가 이시이 바쿠를 만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준 사람이 <경성일보>의 학예부장 데라다 도시오(寺田壽夫)였습니다. 그는 이시이 바쿠를 대신해서 최승희를 면접까지 했었기 때문에 최승희의 가정과 학력에 대해서는 물론, 최승희의 무용유학이 결정된 것도 가장 먼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매일신보>는 <경성일보>의 3월25일자 단독기사를 보고 몇 가지 오보를 바로잡은 후, 다음날인 3월26일, 조선어 신문으로는 처음으로 최승희의 무용유학을 보도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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