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사는 <매일신보>가 최승희의 결혼식장으로 보도한 사찰이다. 최승희 자신도 <조광(1940년 9월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청량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회상했다.
청량사(淸凉寺)는 천장산(天藏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비구니 도량이다. 예부터 탑골 승방 보문사, 두뭇개 승방 미타사, 새절 승방 청룡사와 함께 한양 인근의 4대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한 돌꽂이 승방도 이 곳이다. 지금은 돌꽂이 승방과 청량사가 같은 절이지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청량사는 홍릉 자리, 돌꽂이 승방은 임업시험장 자리에 따로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원래는 별개의 사찰이었다.
청량사의 창건연대와 창건자에 대한 자료가 없지만 <고려사절요> 제3권 예종12년(1117년)의 기록에 그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예종(1105-1122년 재위) 이전에 창건된 역사 깊은 절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명성왕후의 묘(=홍릉)가 그곳에 조성되면서 청량사는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돌꽂이 승방과 합사된 것도 이즈음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 시민들의 대표적인 소풍 유원지는 성 안의 동물원과 성 바깥의 청량사가 있었다고 한다. 1912년 5월7일의 <매일신보>에 실린 여행기 <경성일장10감>에도 영도사(8감)와 함께 청량사가 9감으로 선정되었고, 1915년 3월16일의 <매일신보>도 “초춘의 일요일”이라는 기사의 부제가 “천지 가득한 봄의 동물원과 청량리”였다.
또 1915년 4월20일의 <매일신보>는 “요새 놀러 가는 손이 제일 많기로는 동대문 밖 청량사”라면서 그 이유는 “한가하고 고요한 절의 취미는 도무지 구경할 수 없고 속되고 번요하기는 시내의 요리집보다 심하지만 교통도 편하고 연도의 녹음도 좋은 까닭에 찾는 사람이 많고, 찾는 사람이 많은 까닭에 음식도 다른 곳보다는 구비한 즉 절간에 밥을 사먹으러 가려면 경성 근처에서는 ... 역시 청량사나 탑골승방의 두 곳”이 가장 낫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영도사와 마찬가지로 청량사도 풍기문란과 일탈범죄의 온상으로 지목되었고, 이에 1917년 4월24일의 <매일신보>는 “요새 경성 내 방화수류객들이 청량사에 모여들어 주식(酒食)이 난만하여 더욱 갈수록 도량이 오손(汚損)되므로 5,6일 전부터 청량리 헌병 출장소로부터 밥팔고 술파는 것을 일절 엄금”했다고 보도했고,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919년 4월22일 <매일신보>는 “주식(酒食)판매 금지되어 청량사가 쓸쓸하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그러나 1920년대 들어 활기가 되살아났다. 1923년 4월7일의 <조선일보>에 실린 <청량사에 하루>라는 기행기사는 “청량리의 울창한 송림 사이를 지나서 청량사 문턱에 발을 멈추었”더니 “이 초막, 저 초막 할 것 없이 벌써 유산객들은 방방칸칸이 꽉 들어차서 만금을 주더라도 한 칸의 초막을 차지하여 보기가 어려울 만치 풍성풍성하게 보인다. 어떠한 대자대비한 여승에게 좌청우알을 하여 간신히 얼음장보다도 찬 마루 한 칸을 빌어가지고 일행 3인이 다리를 쉬이고 절밥을 맛”보았다고 썼다. 다시 단속 이전의 성황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는 또 청량사 내방객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절에 온 사람들은 법관도 있으며 관리도 있으며 변호사도 있으며 학교의 교사도 있으며 사상가도 있으며 과격자도 있으며 문학가도 있으며 미술가도 있으며 신문사의 기자도 있으며 회사의 사무원도 있으며 거만한 사회주의자도 있으며 심술 많은 공산주의자도 있으며 신사 같은 고등 부랑자도 있으며 아비어미 속 썩이는 보통 부랑자도 있으며 찬찬의복으로 몸을 감고 애교를 부리고 돌아다니는 기생과 또는 무명한 미인도 있고 서양머리를 틀어 얹고 굽 높은 양화를 맵시 있게 신은 여학생같은 비여학생도 있다.” 남녀노소와 신분고하를 막론한 사람들이 청량사를 찾았다는 말이다.
영도사와 마찬가지로 청량사에도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고, 조선체육회와 언론인단체 무명회를 비롯한 각종 단체의 총회와 회식, 그리고 각종 추도회와 출판기념회 등도 자주 개최되었다. 심지어 우국지사들의 회동이 청량사에서 열리고 독립군 밀사가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기도 해 일본 관헌의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최승희의 결혼식이 청량사에서 열렸을 가능성도 아직은 배제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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