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하면, 1931년의 언론보도와 이후 최승희의 회상에 따르면 그가 결혼했을 지도 모르는 예식장 후보는 3군데였다. 불교사찰인 <영도사><청량사>, 그리고 요리점 <청량관>이었다.

 

이제 그 각각의 기관이 소장한 기록을 조사하는 것이 순서이고 정도이겠으나, 나는 이 기관들이 기록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레 결론을 내렸다. 당시는 기록이 화를 부를 수 있었던 일제 강점기였으므로 사찰이든 식당기업이 기록을 충실히 남겼을 리 없었다. 설사 그런 기록이 있었다 해도 이후 90년의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한국전쟁, 매카시즘과 무차별 근대화의 시기에 그런 기록이 남아있을 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내가 최승희와 안막이라면어떤 곳을 결혼식 장소로 선택했을 지를 추론하기 위해 상황을 파악하고 감정이입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일본 여성지 <부인공론> 1935년 6월호에 실린 최승희와 안막의 결혼 사진. 아마도 <청량관>의 뒷산을 배경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추론에 활용할 근거 상황을 파악할 때는 3가지 축에 주목해야 한다. ‘시간공간인간이 그것이다. , 당시 최승희와 안막이 어떤 시간틀(time frame) 속에서 어떤 활동 맥락(work context)에 처해 있었는지를 파악하면 그들의 공간적 위상(locational position)도 추론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셋은 항상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오빠 최승일과 그의 배재고보 동창 박영희의 주선으로 안막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는지 서술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최승희와 안막이 각각 어떤 시간틀과 공간 위상 속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면 이들이 언제 처음 만났는지 추론해 볼 수 있다.

 

최승희는 193127일 경성공회당에서 <2회 신작발표 무용공연회>를 가졌고, 곧 지방순회공연에 나섰다. 부산(2/17-18), 춘천(2/21), 대구(2/24-25), 마산(2/26-27), 이리(3/1), 전주(3/2-3), 군산(3/4-5), 김제(3/6), 예산(3/8) 등의 남선 지방에서 공연을 가졌고, 경성으로 돌아와 약 3주간 휴식을 취한 다음, 평양(3/31-4/1), 정주(4/3), 신의주(4/5-6), 의주(4/9), 사리원(4/12), 개성(4/14) 등의 북선 지방에서도 공연했다. 그로부터 2주 후인 51일부터 3일까지는 단성사에서 <3회 신작발표 무용회>도 열었다. 그렇게 분주한 공연활동이 일단 마무리되고 나자마자 일주일 만에 최승희는 59일 안막과 결혼한 것이다.

 

한편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안막은 방학을 이용해 경성에 돌아왔다고 했다. 일본의 학기제에 따르면 8월초부터 9월말까지 여름방학, 12월말부터 1월 중순까지 겨울방학, 그리고 2월 중순부터 3월말까지가 봄방학이다. 안막은 1931년의 봄방학을 맞아 경성에 돌아왔다가 방학이 끝나고도 도쿄의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경성에 머물러 있다가 최승희와 결혼한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 겹치는 부분은 (1) 안막이 경성에 돌아온 210일경부터 최승희가 남선 순회공연을 떠난 217일 사이의 일주일과 (2) 최승희가 남선 순회공연에서 돌아와 북선 순회공연을 떠나기 전인 38일부터 331일 사이의 약 3주일의 기간이다. (3) 안막이 4월초에 시작되는 신학기에 복학하지 않았으므로 최승희가 북선 순회공연에서 돌아온 414일 이후도 시공간이 겹치기는 하지만, <별건곤> 4월호가 이미 최승희의 약혼설을 보도한 것을 보면 최승희와 안막이 처음 만난 것이 414일 이후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안막과 최승희가 박영희의 서재에서 처음 만난 것은 (1) 210일부터 17일 사이이거나 (2) 38일부터 31일 사이였음에 틀림없다. 최승희의 자서전에 따르면 두 사람의 결혼이 첫 맞선 후 2-3회의 데이트 후에 비교적 빠르게 결정되었고 결혼 준비도 바쁘게 진행되었다고 했으므로, 두 사람이 맞선을 보고 두세 번의 데이트를 한 것은 (2)38-31일 사이였고, 결혼 준비는 최승희가 북선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3) 417일 이후였을 것이다.

 

맞선을 본지 2달 만에 결혼한 것은 그리 빠른 것이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시 최승희의 공연 스케줄을 고려하면 결혼 결정과 준비에 시간이 넉넉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안막의 결혼 전력 때문에 최승희가 부모의 허락을 얻는 데에 난항까지 겹쳤던 사정을 고려하면 실제로 결혼날짜와 식장을 결정하는 일에 시간이 더더욱 모자랐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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