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미국 공연: 정체성 주장의 실패와 공연 중단
안승자의 여권 발급이 거부됨
세계 순회공연이 결정되자 오빠 최승일은 최승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최승희라는 한 사람이 조선 민족을 세계무대에 내놓게 되었다는 것을 너는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을 조언했고, 최승희는 중국 소설가 노신(魯迅)을 인용해 “애굽(埈及)이 망했으나 그 민족과 예술은 망하지 아니하였으며 유대(猶太)는 망했으나 그 민족은 망하지 아니 하였”다면서 조선민족과 그 예술이 건재함을 보이는 것이 세계 순회공연의 목표이라고 답장했다. (나의 자서전, 1937:71-73).
그러나 최승희의 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최승희는 남편 안막과 딸 안승자와 함께 순회공연을 떠날 예정이었고, 따라서 일본 외무성에 세 사람이 여권을 신청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1937년 9월10일 최승희(여권번호#340980)와 안막(#340978)에게만 여권을 발급하고 안승자의 여권발급은 거부했다.
안막-최승희 부부는 세계 순회공연이 3년으로 계획했으므로 5세의 딸을 떼어놓고 갈 수 없었다. 또 최승희는 안승자를 무용가로 키우고 싶었기 때문에 딸에게 세계 무용무대를 견학시키며 조기교육을 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안승자는 당시 취학연령이 아니었으므로 이 같은 ‘가족적 이유’는 보통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일제 외무성이 안승자의 여권 발급을 거부한 것은 아마도 최승희 가족의 망명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일제는 1931년의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침략국으로 지탄을 받고 있었고, 특히 미국에서는 반일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일제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미국 여성들의 ‘일제 실크 불매운동’은 일본 무역수지를 악화시켰고, 일본군 무장 유지에 필수적인 석유와 철광석 및 고철 수입에 차질을 빚었다.
더구나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1937년 11월-1938년 1월)이 미국에 알려진 후 미국 내 반일 감정은 더욱 격화되었기 때문에 일제는 대책을 마련해야 했고, 최승희의 미국 순회공연이 그 대책의 일환이었다. 일본 최고의 무용가를 예술사절로 파견해 미국내 반일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던 것이었다.
세계 순회공연 중에 최승희 가족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망명을 시도한다면 일본은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될 터였다. 이를 우려한 일제 외무성은 딸 안승자의 여권발급은 거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모의 세계 순회공연 동안 안승자는 할머니와 함께 도쿄의 자택에 머물러야 했다.
안막-최승희 부부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망명을 기획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의 정황을 보면 최승희 부부가 망명 의사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둘 다 경성에 가족이 있었고 도쿄에 저택과 무용스튜디오가 있었다. 또 조선과 일본에는 그를 추앙하는 수천만의 팬들과 후원자들이 있었다. 최승희는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비로 세계 순회추진할 수 있었고, 2만 달러 이상의 예금과 상당한 주식을 일본에 남겨둔 상태였다.
따라서 최승희가 가족과 재산과 팬들을 버리고 외국으로 망명하기란 쉽지도 않았고 구체적인 실익도 없었다. 더구나 최승희의 목표가 세계 순회공연을 통해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면, 망명이나 난민 신청은 그러한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외무성이 안승자의 여권 발급을 거부한 것은 최승희의 망명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게다가 안승자를 인질로 일본에 잡아둘 경우 미국과 유럽에서 최승희와 안막의 언행을 통제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었다.
일본 외무성이 안승자의 여권발급을 거부한 사실은 일제 당국이 처음부터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세계 순회공연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주장할 계획이었던 최승희는 출발 전부터 일제 당국의 견제를 받았던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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