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입국 기록에 나타난 코리안최승희

 

일제 당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자신이 조선인임과 자신의 무용이 조선무용임을 홍보하겠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제 당국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대단히 조심해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미묘한 상황이 처음으로 현실로 나타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였다. 19371229일 요코하마를 출발한 최승희는 193811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하선에 앞서 여객선 치치부마루(秩父丸) 측이 미국 이민국에 제출한 입국자 명단에 최승희와 안막의 국적(Nationality)일본(Japan)’으로, 민족(Ethnicity)일본인(Japanese)’로 적혀 있었다.

 

최승희와 안막의 민족정보를 일본인으로 표기한 것은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1937년경 최고 인기의 예술가였던 최승희의 별명이 반도의 무희였던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더구나 19364<반도의 무희>라는 제목으로 최승희 영화가 개봉됐고, 이 영화는 그 후 4년 동안 조선과 일본 전역에서 인기리에 상영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열도를 내지,’ 조선을 반도라고 불렀다. 따라서 최승희가 조선인임을 모르는 일본인은 없었다. 그런데도 최승희를 일본인으로 표기한 것은 미국에서 그녀를 일본인 예술가로 소개할 필요가 있었던 일제 당국의 영향력이 개입했다는 증거였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동안 치치부마루 선상에서 열리곤 했던 일본식 선상파티. 안막은 유카타 차림이지만 최승희는 한복차림으로 참석했다. 사진설명에는 최승희가 "조선인 무용가(Chosunese Dancer)"라고 소개되었다.

 

입국 수속 중에 잘못된 민족 정보를 발견한 안막과 최승희는 미이민국 관리에게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따라 입국자 명단에서 두 사람의 민족 정보는 코리안(Korean)’으로 수정됐다. ‘일본인코리안으로 수정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데에 머문 것이 아니라, 최승희 미주공연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조선무용 공연을 위해 미국에 온 최승희로서는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코리안으로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었다.

 

이로써 최승희는 일제 당국의 필요를 정면으로 거부한 셈인데, 이것이 문젯거리로 불거지지는 않았다. 최승희의 인종이 코리안인 것은 사실이었고, 최승희의 국적은 여전히 일본이었으므로 일제 공관들이 최승희를 일본예술가로 소개하는 데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때 최승희는 자신의 민족명 표기를 조선인(Chosunese)’에서 코리안(Korean)’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약 2주일 동안 항해하면서 최승희는 자주 선상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최승희는 항상 한복차림으로 참석했고 자신을 조선인이라고 소개했다. 최승희를 조선인(Chosunese)”이라고 설명한 선상 파티 사진도 발견되었다.

 

[자료. 최승희와 안막의 미국 샌프란시스코 입국 기록] 안막과 최승희의 국적과 민족명이 모두 일본/일본인으로 되어 있었으나, 아마도 두 사람의 이의 제기를 통해 인종명이 일본인에서 코리안으로 수정되어 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에 내려 입국 수속을 밟으면서 최승희는 입국서류에 잘못 기입된 일본인(Japanese)”조선인이 아니라 코리안으로 수정했다. 이는 아마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 조선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최승희는 미국과 유럽에서 자신을 조선인(Chosunese)”을 자칭한 적은 없었고, 언제나 코리안(영어)” 혹은 꼬레안느(프랑스어)”로 소개했다. 서구인들에게 낯선 이름을 새로 소개하기 보다는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름에 편승하기로 한 것이다. ‘코리아는 고구려와 고려에서 유래한 이름이므로 이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는 이미 일본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이름 앞에 코리안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바 있었다. 193510월의 제2, 19369월의 제3회 신작무용발표회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일본어 제목에 이어 영어 제목을 덧붙였고, 여기에 저명한 코리안 무용가(Noted Korean Dancer)”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정작 세계 순회공연이 결정되고 19379월에 개최한 고별무용회의 프로그램에는 코리안 댄서라는 영어 표현을 생략했는데, 아마도 해외 공연을 위해 출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제당국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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