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는 자신과 자신의 예술에 대한 민족 정체성으로 무장한 채 미주 공연을 시작했으나 공연과 정체성 주장 모두 실패했다. 자신과 조선무용의 정체성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한 채 공연을 중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 내 반일 감정이 예상보다 심했고, 최승희의 무용공연도 ‘일본인의 일본예술’로 간주되어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주 순회공연에서 ‘조선무용’을 ‘코리안 댄스’로 소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공연의 모든 레퍼토리는 조선무용이었으므로 이를 ‘코리안 댄스’로 소개하고 홍보하더라도 일본 교민 언론이나 미국 현지 언론, 그리고 일제의 공관으로부터 이의가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승희를 ‘코리안 무용가’로 소개하는 일은 미묘한 사안이었다. 샌프란시스코와 LA 공연에 앞서 일본 영사관은 최승희 환영리셉션을 열어주었는데, 여기에는 현지의 외교관과 언론인, 예술가와 평론가들이 초대되었다. 이 리셉션 때문에 현지인들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인식했고 언론도 그렇게 기사화했다.
이에 대해 최승희는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가 소지한 일본여권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개적으로 일본인임을 부정하면 배일분자로 찍혀 송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최승희는 그저 자신을 “코리안”으로 홍보하면서, 일본공관이 이를 “(일본인이자) 코리안”으로 해석해 주고, 미국인들은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 표현도 문제로 지적되었고, 최승희는 LA주재 일본 영사관을 방문해 ‘코리안 댄서’라는 표현을 해명해야 했다. 최승희는 <반도의 무희>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임을 강조하고, 이를 영어로 직역하면 ‘댄서 오브 페닌슐라’라는 우스운 말이 되므로 <코리안 댄서>로 의역해야 한다고 해명했다. 또 이미 일본에서의 정기공연에서 2년 연속 ‘코리안 댄서’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었고, 당시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LA영사관은 최승희의 설명에 납득했고, LA영사관의 보고에 따라 일본 외무부에서도 이를 양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승희는 일본 외교공관이 자신을 일본인 예술가로 홍보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제 외교공관이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할수록 최승희의 공연은 일화배척, 즉 일제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상황은 일본 외교공관과 최승희에게 모두 딜레마였다.
한편 일부 평전은 재미 조선인들이 ‘일본인’으로 소개되는 최승희를 비난했다고 서술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평전들은 조선인 동포들이 최승희에게 “일본인이 아니”라고 공개선언하기를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공연을 보이콧하겠다고 ‘협박’했다고 서술했지만, 최승희는 “나는 코리안”이라고 말할 수는 있었지만 “일본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사실 조선인 교민들의 요구는 ‘협박’이 아니라 ‘조언’이자 ‘제안’이었다. 모처럼 열린 조선무용 공연회가 미국인들에 의해 ‘일본공연’으로 분류되어 보이콧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재미 조선인들이 최승희에게 “일본인이 아니”라고만 말해 주면 자신들이 다른 반일 운동가들을 설득해 조선무용 공연이 진행되도록 하겠다는 뜻이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일부 평전들은 또 최승희가 ‘사이 쇼키’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한 점, 일본 외교공관/언론사와 가깝게 협조하면서도 조선인단체/인사들과의 면담을 꺼렸다는 점을 들어 최승희를 비난했다고 서술했으나,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최승희가 한인단체/인사들과의 면담을 자제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일제공관이 최승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주 조선인 동포들의 기관지 <신한민보>는 1938년 2월3일자 기사에서 최승희가 “조롱속의 새”와 같은 신세라는 사실을 지적했고, “공개적으로 그 가슴 가운데 쌓인 민족정서를 활발하게 발표치 못함은 여사의 숨은 고충이오. 우리의 아픈 유감”이라고 이해했다. 이같은 인식을 공유했던 조선인 동포들이 공연을 빌미로 최승희를 협박했을 까닭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미국내 반일 정서 및 일제 불매운동과 다른 한편으로 일본 공관의 예술사절 행사 강행이 맞부딪히는 상황 속에서 최승희의 미국 순회공연은 결국 중단되었고 최승희는 미국인들에게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제대로 주장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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