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파리 공연과 최승희의 조선인 정체성 주장
미국 공연 중단으로 반년 이상 뉴욕에서 보낸 최승희는 1938년 12월17일 프랑스 여객선 <파리>호로 뉴욕을 출발해 유럽으로 향했다. 8일간 대서양을 횡단한 끝에 그는 12월24일 오후3시 프랑스 서안의 항구도시 르아브르에 도착했다. 기차로 갈아탄 최승희는 그날 밤 파리 생라자르역에 내렸고 기다리던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유럽 순회공연은 여러 면에서 성공적이었다. 파리와 마르세유, 브뤼셀과 안트베르펜, 암스텔담과 헤이그 등에서 열린 주요 공연은 모두 흥행에 성공했고 비평도 호평이 많았다. 특히 1939년 1월31일의 파리 살플레옐 극장 공연과 6월15일의 샤이오 극장 공연은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파리 무용계에도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33건에 달하는 최승희의 파리공연 관련 기사에 따르면 조선무용의 예술성은 스페인과 인도, 일본과 발리 등의 민속 무용뿐 아니라 발레 루소로 대표되는 유럽 정통 발레와도 대등하게 비교 평가되었다.
최승희 자신도 스페인의 라 아르헨티나(La Argentina, 1890-1936), 인도의 니오타 이뇨카(Nyota Inyoka, 1896-1971), 중국의 메일란팡(Mey Lanfang, 1894-1961) 등의 정상급 민속 무용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나아가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na, 1881-1931)와 마리 비크만(Mary Wigman, 1886-1973), 사하로프 부부(Alexander & lotilde Sakharoff, 1886-1963, 1892-1974), 하랄트 크로이츠베르크(Harald Kreutzberg, 1902-1968) 등의 현대 무용가들과도 동등하게 평가되었고, 유럽 발레의 세르주 리파르(Serge Lifar, 1905-1966), 다르자 콜린(Darja Collin, 1902-1967) 등과도 교류를 가졌다. 최승희는 세계일의 반열에 올라섰고, 전설적인 무용가들과 나란히 호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평전들은 최승희가 이같은 예술적 성취와 함께 유럽에서 조선인 정체성을 한껏 펼쳤다고 서술했다. 정병호(1995)는 최승희가 (1) “국적의 성격을 띠기도 하는 민족명을 ‘재패니스’가 아니라 ‘코리안’이라고 했”고, (2) 파리에서 “‘코리안 댄서’라는 말을 ... 사용한 데에는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는 민족의식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3) 최승희가 프랑스에 도착한 이후 “파리의 거리에는 ‘조선의 자랑 최승희를 환영한다,’ ‘조선이 낳은 천재적 무희 파리 공연’같은 표어로 된 플래카드가 나붙었”다고 서술했다.
이 서술은 다른 평전과 연구서들에 널리 인용되었지만 몇 가지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파리에 오래 거주하던 중 이차대전 발발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온 화가 배운성의 증언에 따르면 “파리에는 조선동포가 10여명 있었”을 뿐이므로 이들이 플래카드를 거는 등의 환영 행사를 조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 중요한 의문은 ‘코리안 무용가’라는 표현에 대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 말이 영사관에 해명해야 할 만큼 민감한 표현이었는데, 파리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을까? 일제 외교공관들이 최승희를 일제 문화선전대로 활용할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면 파리에서도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해야 했을 것이다. 파리 대사관이 미국의 영사관들보다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 주장을 더 관대하게 대할 재량권을 가졌다고 가정할 근거는 없어 보인다.
마지막 의문은 파리 언론과 시민들의 반응이었다. 과연 파리의 관객들과 언론인들이 처음부터 최승희를 ‘코리안 무용가’로 환영할 수 있었을까? 파리의 일본 대사관이 암묵적, 혹은 명시적으로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했던 반면, 최승희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코리안’으로 주장했다면, 이처럼 상반된 입장을 목격하면서 파리의 언론과 관객들이 손쉽게 최승희의 편을 들어줄 수 있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지금부터 최승희가 파리 체재 동안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주장했고 일본 대사관은 여기에 어떻게 개입했는지, 그리고 파리 언론이 최승희와 일본 대사관의 상이한 주장을 어떻게 기사에 반영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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