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무용가와 조선 무용

 

최승희는 19381224일 프랑스에 도착했고, 193913일부터 언론을 통해 자신의 조선무용 공연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131일에는 살플레옐 극장에서 첫 번째 유럽 공연, 615일에는 샤이오 극장에서 두 번째이자 파리 마지막 공연을 단행했다.

 

일본 대사관은 121일 최승희 환영 리셉션을 열었고, 일본인 유학생과 교민들에게 최승희의 공연에 참석하도록 총동원령을 내렸다. 파리의 언론들은 기사와 광고의 형태로 최승희와 일본대사관의 입장을 선별적으로 보도했다. 파리 언론은 대부분 수동적인 입장이었겠지만 때로는 최승희와 일본대사관의 입장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독자적인 해설기사를 게재하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과 샤이오 공연에 직접 관련된 프랑스 매체의 기사는 모두 146건이었다. 최승희의 조선인 정체성이 보도된 추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이 기사들을 5개 기간으로 나누어 내용을 살폈다.

 

1938년 12월27일의 <라디페쉬 드브레스트>는 "극동의 무용가" 최승희가 12일24일 르아브르를 거쳐 파리 쌍라자르 역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1) 1223일부터 12일까지의 최승희의 프랑스 도착에 관한 보도 (10개 기사), (2) 13일부터 121일까지의 최승희 공연 홍보 관련 보도(12개 기사), (3) 일본대사관 리셉션 다음날인 122일부터 131일의 살플레옐 공연까지 최승희 관련 보도(32개 기사), (4) 살플레옐 공연 이후 21일부터 약 한 달 동안의 최승희 관련 보도(25개 기사), 그리고 (5) 615일의 파리 두 번째 공연인 샤이오 공연을 전후로 한 최승희 관련 보도(67개 기사)였다.

 

각 기사로부터 두 가지 사항만 확인했다. 첫째는 최승희를 소개하는 문구이다. 각 기사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했는지 꼬레안느 무용가로 서술했는지, 혹은 그 밖의 다른 문구로 소개했는지를 구분했다. 둘째는 최승희의 무용 작품을 일본무용으로 서술했는지 조선무용으로 서술했는지를 정리했다.

 

한 기사에 두 개 이상의 서술어가 등장할 경우 자의적으로 선택하기 보다는 모두 인용해 두기로 했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기사 중에 명시적으로 꼬레안느쟈포네스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 기사 전체를 통해 일본이나 조선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지를 찾아보고, 그에 따라 그 기사를 조선인 무용가혹은 일본인 무용가로 분류했다.

 

예컨대 기사 중에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혹은 미카도 제국이 언급되었다면 이는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 기사 중에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왔을 경우에는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지칭한 것으로 보기로 했다.

 

 

1938년 12월26일의 <엑셀시오르>(왼쪽)과 <르주르>(오른쪽>은 최승희의 파리 도착을 보도했다. <엑셀시오르>는 최승희를 "극동의 무용가"라고 서술한 반면, <르주르>는 "일본인 무용가"라고 보도했다.

 

대부분의 기사는 최승희를 쟈포네스 무용가(danseuse japonaise)’ 혹은 꼬레안느 무용가(danseuse coréenne)’라고 서술했지만 극동의 무용가(danseuse de l'Extrême-Orient)’라는 표현도 자주 등장했다. ‘극동이란 유럽에서 동쪽으로 가장 먼 아시아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북쪽으로는 시베리아에서 남쪽으로 인도차이나의 각국과 인도네시아와 자바 등의 남방 도서 국가들까지 포괄하는 말이다. 예컨대 23일자 <르악시옹 프랑세즈>에 실린 평론 기사에서는 인도, 발리, 캄보디아, 중국, 한국, 일본의 춤을 극동의 춤으로 서술한 바 있었다.

 

보통의 경우 프랑스 언론이 극동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특정 국가를 지칭할 필요 없이 동아시아 일반을 가리키기 위해서였지만, 최승희 관련 보도에서는 쟈폰(Japon)’꼬레(Coree)’라는 두 단어를 피할 수 있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프랑스 언론인들은 일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삼일운동이 대대적으로 프랑스 언론에 보도되었던 이래로 꼬레쟈폰의 식민지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와 일본대사관의 주장이 대립되었을 때 프랑스 매체는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기 보다는 극동이라는 표현으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의 호칭에 따라 기사를 분류하는 방법은 최승희의 공연 작품을 가리키는 표현을 분류하는 데에도 똑같이 적용하기로 했다. 따라서 각 기사가 최승희의 무용을 조선무용이라고 지칭했는지 혹은 일본무용이나 그 밖의 다른 용어로 표현했는지를 구분해서 정리해 보았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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